메뉴 건너뛰기

close

육군사관학교가 교내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겠다고 결정해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0년간 자료준비와 답사를 진행하고, 3년 동안 집필한 뒤 지난 6월 홍범도 소설 <범도>를 펴낸 소설가 방현석 중앙대 교수의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8월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故)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8월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소설 <범도>를 쓰기 위해 지난 13년간 홍범도의 삶을 추적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나는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홍범도가 대한민국의 첫 군인이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최초의 헌법인 '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하고 제6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병역의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2년(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1920년을 '대한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대한민국 군무총장 노백린은 '군무부포고 제1호'를 발동한다.
 
충용한 대한의 남녀여. 혈전의 시각, 광복의 계절이 도래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라. 정의를 위하야, 자유를 위하야, 민족을 위하야 철과 혈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 혼 있고 피 있는 대한의 남녀여. 선조를 위하야, 후손을 위하야, 무도한 왜적에게 학살을 당하는 너의 부모 형제자매를 위하야 최후의 희생을 바칠 때가 이때가 아닌가...(<범도>2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병역의 의무를 부여한 다음 대한민국 군인의 자격으로 전쟁에 나선 첫 군인들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참전 장병들이었다. 홍범도는 대한민국의 첫 군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첫 부대를 지휘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었다.

두 번째는 봉오동전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에 따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최초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첫 전쟁의 개막전이 봉오동전투였다. 홍범도가 대한민국 첫 군인으로 대한민국의 첫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선전포고와 전투개시 명령을 기다렸다는 사실은 1919년 12월에 그가 발표한 '유고문'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대한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후 상으로는 임시정부가 군국대사를 주관하며 하로는 민중이 단결하여 만세를 제창하니 우리의 공전절후한 독립군이 출동하였도다. 강권 아래에서 오직 정의와 인도만 주창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요, 무권리 상태의 민중들이 한갓 평화회의와 국제연맹에만 의뢰함도 역시 불가능한 일이다. 고로 배수의 진을 치고 일전을 벌여 적의 무릎을 꿇려야 마땅하나 가벼이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오직 정부의 공명정대한 선전포고를 대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 노령 주둔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참모 박경철 이병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여한 1919년 노령(연해주)에 집결했던 홍범도부대는 이듬해 대한민국 군무부가 포고령 1호를 발동하고 '공명정대한 선전포고'를 하자 만주로 이동해 봉오동에서 대한독립 전쟁을 개시한 것이다.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대한민국의 첫 군인들을 이끌고 홍범도가 결전에 뛰어드는 장면을 나는 <범도>에서는 이렇게 그렸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이기려 하오. 이겨보이려 하오. 기어이 이길 것이오. 그러니 우리, 끝내 이깁시다. 대한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오늘 우리는 죽을 수는 있어도 져서는 아니 될 독립전쟁의 첫 번째 대회전을 벌이고 있소. 반드시 이겨서, 지울 수 없는 승리의 이정표를 이 봉오동에 새겨두어야 하오." - <범도>2권

그렇게 싸워서 봉오동과 청산리에 지울 수 없는 승리의 이정표를 새겨둔 대한민국 첫 군인들이 바로 홍범도와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다.

연해주와 만주 동포들의 존경을 한몸에
 
서울겨례하나 관계자들이 1일 오후 서울 독립문 앞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계획 철회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서울겨례하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계획 철회!" 서울겨례하나 관계자들이 1일 오후 서울 독립문 앞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계획 철회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관보와 다름없었던 상해판 <독립신문>은 이 전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 제1회전에서 거둔 대승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심지어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도 홍범도에 대한 경외감을 표시했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서 일반조선인들, 특히 부하들로부터 하느님과 같은 숭배를 받는다. 홍범도가 각 독립군이 단호한 결심이 없음을 분개하며 단독으로 삼수, 갑산 방면으로 국경을 습격하여 여론을 환기시키고 독립군의 의기와 기백을 보이려고 하는 것에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 일본군의 간도 출병 기록 문서 중

연해주와 만주의 동포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적들조차 경외감을 표시한 대한민국의 첫 군인이 홍범도였다. 그렇지만 홍범도에게 승리는 언제나 승리한 그 하루뿐이었다. 남은 모든 날이 패배였다. 그는 승리한 그 하루의 힘으로 남은 모든 날의 패배에 맞서야 했다.

아내는 일본군의 고문을 받다 죽었다. 큰아들 홍양순은 16세의 나이로 그와 함께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던 중에 태백준령에서 전사했다. 마지막 남은 가족인 둘째 아들 홍용환도 일본군과 싸우다 이역만리에 죽었다. 일본군에게 빼앗긴 아내의 시체도 찾지 못했다. 두 아들을 전장에 묻어둔 채 어금니를 깨물고 돌아서야 했던 홍범도다. 재산 한 푼 남기지 않았고, 핏줄 한 점 남기지 못한 채 평생을 일제에 쫓겨 다니며 싸웠다. 끝내는 스탈린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당해 극장 수위로 최후를 마친 그다. 죽어서도 80년 동안 후손이 차려주는 제삿밥 한 그릇 얻어 먹어보지 못한 홍범도다.

누가 감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나라와 동포들을 위해 바쳤으면서도 무엇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의 삶을 능멸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이념이나 노선, 정치적 이해득실의 문제로 따질 일이 아니다. 애국과 매국의 문제도 아니다. 심지어 일본군조차도 용맹과 헌신성을 경외했던 그를 다시 어디로 내쫓겠다는 것인가.

수위로 일하며 모은 월급을 평생토록 누구에게도 대접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독립군 동지와 부하들에게 모두 털어주고 카자흐스탄에서 죽은 그를 78년만에 모셔올 때 대한민국 정부는 무엇이라고 말했던가.

'이제야 모시러 와서 죄송합니다.'

모셔온 지 고작 2년 만에 평생을 일본군에게 쫓겨다니다 끝내는 러시아에서 강제추방당했던 그를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강제추방하겠다는 것인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서도 첫 번째 군인으로 자기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을 승리로 이끈 독립영웅을 이렇게 능멸한 적은 없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결단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홍범도
 
지난 1일 유보비 예술총감독이 홍범도장군이 수위로 일했던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배우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흉상 이전 계획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지난 1일 유보비 예술총감독이 홍범도장군이 수위로 일했던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배우들과 함께 피켓을 들고 흉상 이전 계획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 고려극장

관련사진보기

 
대한민국의 첫 군인 홍범도 장군은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다.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시절부터 카자흐스탄 정부와 봉환 교섭을 한 끝에 2년 전에 간신히 모시고 왔다. 그의 봉환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홍범도를 차마 떠나보내려 하지 않는 50만 고려인들의 마음을 달래는 일이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끝내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장군께서 꿈에도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 편히 쉬시기를 바라며 어렵게 봉환에 동의했다. 그렇게 눈물 속에 떠나보낸 홍범도 장군이 고국에서 당하는 능멸을 지켜보며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동포들은 지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한고려인협회 노알렉산드라 회장은 '이럴 거면 차라리 장군님을 다시 돌려보내라. 창피해서 못 살겠다'는 얘기들이 터져나온다고 전했다. 고국에서 홍 장군이 당하는 모욕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직접 서울로 온 카자흐스탄독립유공자재단 청년회장인 독립지사 계봉우 선생의 후손 계이리나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어떻게 독립영웅인 우리 장군님에게 대한민국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 대한민국이,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차마 사람이 해서는 아니되는 일이 있다. 대한민국의 첫 군인으로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첫 번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네 장군과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지휘관 3500명을 배출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인 이회영 선생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쫓아내고 옮기려는 시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광복회장의 말씀대로 차라리 깨끗이 파쇄해서 없애는 것이 이미 충분히 능멸당한 그분들을 더 능멸하지 않는 길이다. 오죽하면 분노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시위 피켓을 들고 외치겠는가.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 홍범도 장군이 문제면 고려인 동포 50만도 적인가."

홍범도장군이 수위로 일했던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요즘 화병에 걸릴 지경이라고 한다. 홍범도 배역을 맡아 열연해온 주연배우 최로만과 함께 극단을 이끌어온 유보비 예술총감독은 말했다.

"카자흐스탄에는 천산산맥이 있다. 아무리 눈보라 치고 태양이 작렬해도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홍범도 장군은 이 산맥과 같은 영원한 우리의 정신적 지주다. 체제와 정권은 바뀌어도 홍 장군님은 변치않는 우리의 독립전쟁 영웅이다. 7천만 겨레의 가슴 속에서 홍범도 장군이 사라지지 않도록 고려극장은 온 힘을 다해 지킬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의 첫 군인으로 대한민국의 첫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홍범도가 대체 대한민국 군대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어서까지 이런 능멸을 당해야 하는가.

10년 넘게 소설 <범도>를 쓰기 위해 그의 삶을 추적하며 취재하고 조사한 나는 홍범도 장군이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단 하나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은 못하더라도 자신의 재산과 목숨, 가족들까지 모두 나라에 바친 독립영웅들의 흉상 하나는 온전히 지키고 모시는 것이 그가 남긴 나라에 사는 사람 된 도리가 아닌가.

[관련기사]
대전현충원서 홍범도 장군에게 큰절 할 수 없었던 이유 https://omn.kr/24klr

태그:#홍범도, #육군사관학교, #흉상 철거 논란
댓글4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