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아야톨라

서울시 강남구에 '테헤란로'가 있다. 이란의 수도이름 테헤란을 그대로 따온 명칭이다. 이란의 공식적 국호는 '이란이슬람국가'로서 국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긴 하나,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가 그들의 민족종교다. 허나 현대 이란 국내에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극소수여서 다만 민족종교라는 명분만 유지하는 수준이다.   

이란 사람들은 아랍글자를 쓰지만 아랍어를 쓰지는 않는다. 마치 일본이 중국글자(漢字)는 쓰되 중국어는 쓰지 않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게다가 이란민족은 아랍계열이 아니어서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아랍사람'으로 통칭하면 기분 나빠한다.

그리고 이란은 국제테러단체 'ISIS'와 거의 무관하고 911테러 당시엔 '알카에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반미성향이 강한 나라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도 이란을 '불량국가' 혹은 '테러지원국가'로 분류하는 등 이란을 싫어한다.

1979년에 이란은 군주제(팔라비 왕조)에서 대통령제로 변화했다. 그러나 나라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어서 흔히 말하는 '민주주의공화국'과는 좀 거리를 둔다. 이슬람교 종교지도자 '아야톨라'가 모든 국가권력을 틀어쥐고 행사하는 권위주의적 신정국가다.   

이 정도만 알아도 이란 영화 <침묵의 집(Silent House)>을 관람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침묵의 집>은 수십 년 동안 홈무비 카메라로 찍은 화면을 편집해, 가족사와 현대사가 교차하며 교섭하는 장면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20회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023EIDF) 상영작 중 한 편이며, D-Box를 구독할 경우 '다시보기'가 가능한 작품이다.
 
기억과 기록   
 
 <침묵의 집> 스틸 이미지.

<침묵의 집> 스틸 이미지. ⓒ 파르나즈 & 모하메드레자 주랍치한 영화감독

 
파르나즈 & 모하마드레자 주랍치안 남매가 만든 다큐멘터리 <침묵의 집>에서 주인공은 제목에서 밝힌 것처럼 '집'이다. 굳이 대단한 저택까지는 아니다. 유령이 나온다는 식의 특이한 전설을 지닌 집도 아니다. 정원과 마당이 딸려있으며 대가족이 살기에 적당한 크기의 2층짜리 가정집이다.

다큐멘터리 <침묵의 집>은 주랍치안 남매의 증조할머니 시대에서부터 자기네들 시대까지 그 집의 역사, 아니 그 집에서 살아온 한 가족의 역사를 보여준다. <침묵의 집>은 말 그대로 기억과 기록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족들의 단편적 기억이 주랍치안 남매의 어머니가 청년 때부터 홈무비 카메라로 찍어둔 영상 속에 기록되어있다. 그 어머니의 뒤를 이어 주랍치안 남매가 가족에 관련된 여러 기억과 사건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란의 초대 국왕 '레자 샤 팔라비'의 네 번째 부인(에스마트 왕비) 소유였던 이 집을 '역사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할아버지가 구입한 이후 실질적으로 이 집을 유지보존한 사람은 할머니였고, 이후에는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남매의 어머니가 그 집을 이어받아 관리해왔다는 사실이다. 이 집에 관한 한 2대 모계상속이 실행된 것 같아 보인다. 현재도 집에 관한 모든 결정은 어머니에게 달려있다. 영화 말미, 이 집을 팔기로 결정한 사람도 어머니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슬림 가정은 가부장(家父長) 중심이라지만 모든 경우에 남자들이 실권을 지니는 게 과연 사실일까, 물음표가 생길 지경이다.   

이 집과 관계를 맺은 첫세대 즉 영화감독 남매의 할머니는 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어머니(남매의 증조할머니)는 이슬람전통을 따라 여성의 바깥활동을 열정적으로 반대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발레리나의 꿈을 강제로 포기당했다. 그런 다음, 열세 살 어린 소녀에게 다가온 사건은 이슬람전통을 따르는 정략결혼이었다. 할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본인의 의사와 달리 발레리나와 맞교환된 할머니의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영상으로 남은 기록에 따르면 부부의 모습은 다정하다. 영상기록이 할머니의 복합적 감정을 다 담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물증으로만 보면 다정한 부부가 맞다.    

백색혁명과 이슬람혁명  

외할아버지의 거의 유일한 성과물이라 한다면 이 집을 상실하지 않은 일이었다. 1979년 이슬람혁명 때 국가에 이 집이 몰수되자 그는 전재산을 털어 (무슨 국토탈환 프로젝트라도 감당하듯) 이 집을 되찾아왔다. 그러고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집의 소유권을 오락가락하게 만들었던 1979년의 이슬람혁명은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라는 인물이 이끌었으며, 이 혁명이 성공하면서 '이란이슬람공화국'이 건립되었다. 그래서 호메이니는 이란의 국부로 대우받는다. 호메이니는 이슬람근본주의자였다. 이란 사람들은 호메이니를 대체로 찬성하고 환영했다. 영화감독 남매의 어머니도 이슬람혁명을 찬성하고 환영하는 편에 서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영화 안에서 어머니는 명확하게 본인의 찬/반 의견을 밝히지는 않는다.

남매의 어머니는 2001년 대통령선거에 대담하게, 혹은 무모하게 출마한 바 있으니(득표순위 200위), 그녀만의 정치적 의견이 없을 리 없지만, 웬일인지 1979년 이슬람혁명에 대해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평가를 내리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영화감독 남매도 평가를 자제한다. 역사적 평가는 때로 간단치 않거나 명료하지 않으며, 현재진행중인 사건에 대해서는 평가가 상반되기도 하고 유보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남매의 어머니는 1979년에는 왕정을 반대하는 이슬람혁명에 동의하고 혁명에 참여한 청년 중 하나였다. 당시 이란의 통치자는 이란왕국의 두 번째 왕이었으며, 일명 '백색혁명'을 주도한 '모하마드레자 샤 팔라비'였다. 그가 실시한 백색혁명은 토지개혁, 국영기업의 민영화, 노사갈등의 조정, 여성참정권 확립, 아동결혼 금지, 교육개혁, 농촌개발, 문맹퇴치 등이었다. 백색혁명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이슬람근본주의에서 탈피하려는 경향을 띠었으며, 이란의 서구식 근대화와 친미적 성향을 추구했다.

친미적 성향이 농후한 서구식 근대화에 반발해 일어난 1979년 이슬람혁명이 성공한 이후, 이란 국내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달리 몹시 종교적으로 돌변했다. 단적으로 여성들은 백색혁명 동안에는 반드시 히잡을 벗고 다녔어야 했고, 이슬람혁명 이후에는 반드시 히잡을 써야만 외출할 수 있었다. 백색혁명 동안에는 서구식 근대화를 거부할 자유가 없었고, 이슬람혁명 이후에는 사회 전반의 이슬람화를 거부할 자유가 없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것으로 간주된 자본주의적 문화예술은 전격 금지되었다. 그때 당시 자유로운 문화예술을 즐기던 청년, 즉 남매의 큰삼촌(할머니의 큰아들 '모하마드')은 경직된 종교적 사회분위기가 싫어서 영국으로 가버렸다. 40년 뒤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매일매일 멍하니 지내다가, 끝내는 자살한다.

남매의 작은삼촌(할머니의 작은아들 '호세인')은 이슬람혁명 직후 발발한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왔다. 그는 집에 대한 누나(영화감독 남매의 어머니)의 권한행사에 불만을 품었고, 가족은 물론 타인과 적합하게 교류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집의 여유공간에 사설 테니스장을 운영하는 것을 '불법'으로 경찰에 신고하고, 어머니가 집의 또다른 여유공간에 설치하고 싶어했던 서점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어머니 몰래 집주인 명의를 자기한테로 옮겨놓기까지 했다.
 
침묵과 소통   

큰삼촌 모하마드가 우울증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머니마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감독 남매의 어머니와 이모는 여전히 사이좋게 지내지만 어머니와 호세인 삼촌은 거세게 싸운다. 결국 어머니는 정든 집을 팔기로 결정한다. 자기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들 모두를 위해서.

1979년 이슬람혁명 전후 '기획예산기구(POD)' 부설 유치원장으로 일하며 리더십을 발휘했던 어머니였다.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데에서 나아가 '샤에레' 출판사를 세워 번역과 출판을 실행했던 어머니였다. 여성은 판사도 될 수 없던 시절에 무려 대통령을 해보겠다고 나서서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어머니였다. 영화감독 남매를 영화와 사진 전공자로 뒷바라지하는 데에 열중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결과를 걱정하거나 결과에 주눅들지 않고 '지금 여기'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그녀는 이제 심리학 학위를 위해 공부중이다.  

그 여성의 앞세대와 뒷세대를 두루 품는 공간이 바로 팔라비 궁전 근처에 자리한 2층집, 그들의 집이었다. 이 집은 인간과 달리 언어로 구구절절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지 않는다. 집은 인간과 달리 혁명이나 반혁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웅변하지도 않는다. 집은 그 집을 들락거리는 가족들을 하나하나 품어주고, 감싸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의미있게 드러낼 뿐이다.

집은 무생물이고 인간은 생물이니, 존재방식이 어차피 다를 수밖에 없다. 침묵하는 집과 달리 인간은 침묵만으론 존재하기 어렵다. 팔라비 왕조 백색혁명의 문제점 중에서 '히잡 강제금지'에 대해 영화감독 남매의 어머니를 포함한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았고, 1979년 이슬람혁명의 문제점 가운데 '히잡 강제착용' 앞에서도 (지난해부터 이란에서 일어나는 히잡반대시위에서도 증명되듯)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침묵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모하마드 삼촌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이 집의 깊고 묵직한 침묵은, 오히려 역사 앞에서 어떤 형태로든 침묵하지 않으려 하는 인간들을 역설적으로 도드라지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주랍치안 남매의 영화 <침묵의 집>은 인간이 명시적 언어뿐 아니라 심지어 암시적 침묵으로도 소통하려 시도한다는 사실을 체험케 하는 독특한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침묵하는 집(사진)'을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주랍치안 남매네 가정사를 읽어내며, 나아가 이란의 현대사까지 읽어내려 하니 말이다.     
EIDF 이란 침묵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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