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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태풍 카눈이 잰걸음으로 전국을 훑고 지났다. 기차를 타고 11일 오전 10시경 서대전역에 내리자 비가 막 갰는지 길바닥이 젖어 있었다. 낮에는 언제 태풍이 지났냐는 듯 내내 땡볕이 내리쬈다. 

어제저녁만 해도 태풍을 걱정하며 대전지역 민간인 학살지 답사 일정을 취소할지 다들 고민했다. "우리가 답사할 즈음에는 태풍이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상태일 것"이라며 한 분이 예정대로 모이자고 제안했다. 그 말 듣고 다들 모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 시청' 건물. 현 중구청 구관
▲ 옛 대전 시청 건물 한국전쟁 당시 '대전 시청' 건물. 현 중구청 구관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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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지역 학살의 출발점

이날 우리 답사팀은 목사, 신부, 전도사까지 모두 아홉 명이다. 멀리 제주와 강원 원주, 강화, 의왕, 대구, 여수 등 전국에서 모였다. '국가폭력과 기독교'라는 주제에 관심 있는 기독교 성직자들의 작은 모임이다. 모인 곳은 대전 옛 중구청이다. 첫 모임 장소를 왜 이곳으로 정했는지는 모임을 제안한 최태육 박사(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의 설명을 듣고야 알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현 중구청 구관 건물은 '대전시청'이었다. 1950년 6월 28일, 바로 이 대전시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열고, 무초 특사(주한특별대표부)와 회담을 했으며 긴급명령 제1호를 발표했다. 또한 시청 뒤편에 방첩대(CIC: 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있었고 시청 건너편에는 중부경찰서에 헌병사령부가 있었다.

우리는 오늘 대전 산내 학살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째서 옛 중구청에 모여 답사를 시작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한국전쟁 직후 대전지역 모든 학살의 출발 지점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대전시청에서 긴급명령 제1호(비상사태에 있어서의 반민족적 또는 비인도적 범죄를 엄중 처단)를 발표한 뒤, 김창룡 대령에게 군검경합동수사본부 설치를 지시했다.

1950년 7월 11일 치안국이 보도연맹과 예비검속자 처형 지시를 전국 각 경찰서에 하달한 곳도 바로 옛 대전시청(현 구 중구청)이었다. 건물 외관만 봐서는 평온하고 고풍스러운 관공서쯤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유족들에게 오랜 세월 피눈물을 안긴 곳이라니 그냥 봐선 실감하기 어려웠다.
  
한국전쟁 기간 수천 명(약 750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대전 산내 골령골. 최태육 박사가 설명하는 중이다.
▲ 산내 골령골 한국전쟁 기간 수천 명(약 750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진 대전 산내 골령골. 최태육 박사가 설명하는 중이다.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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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출신 장로의 고백

산내 골령골로 가는 차량에서 최 박사는 대전의 A 장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 박사가 목회를 접고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할 무렵인 2008년경 만난 분이었다. 그는 대전 산내 학살 관련자 수백 명의 명단을 입수해 "관련 사실을 증언해 줄 수 있느냐?"고 여러 사람에게 연락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직접 찾아가 만나기 시작하였다. A 장로를 만났을 때도 처음에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무거운 입을 떼기 시작해 당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술술 증언했다.

A 장로는 당시 경찰이었고 두 번이나 불려 가서 산내 골령골 학살에 가담했다고 한다. 윗선의 명령이라 마지못해 한 짓이었으나 그게 평생 무거운 짐이었다. 아무에게도 말도 못 한 채 속으로 끙끙 앓다가 80세가 다 되어서야 참회하듯 털어놓은 거였다. 최 박사는 A 장로에게 "학살지를 직접 함께 가 보자"고 했다.

산내 골령골에 다다르자 그는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더 이상 못 가겠다"고 주저앉더란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당시 자신이 저지른 장면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학살 가담자는 많았다. 허나 그 사실을 참회하며 증언한 사람은 A 장로를 비롯해 네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의 증언은 산내 골령골 학살 조사로 진실을 밝히는 데 상당히 이바지했다.

산내 골령골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진 산골 같았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밭이었다고 한다. 군경은 이곳에서 대전 형무소의 수천 명에 이르는 재소자를 끌고 와 집단 학살했다. 수많은 유해가 나온 곳인데도 외형상으로는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세운 작은 표지석과 곳곳의 펼침막들만이 이곳이 학살터임을 알려 주었다.

우린 그곳에서 학살당한 분들을 위해 잠시 기도했다. 기도를 맡은 박덕신 목사는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계시는 거냐, 자비로운 분이 맞느냐?"라며 마치 욥처럼 부르짖었다. "어찌 동족끼리 이처럼 끔찍한 학살을 벌이는데 그냥 지켜 보시기만 하셨느냐?"며 탄식하는 기도였다.
  
대전 형무소 망루. 형무소 건물들은 사라졌고 망루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 형무소 망루 대전 형무소 망루. 형무소 건물들은 사라졌고 망루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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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망루와 우물

마지막 들른 곳은 대전 형무소가 있던 곳이다. 그 사이 형무소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망루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안창호, 김창숙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수형 생활을 한 곳이란 안내판이 보였다. 그분들이야 워낙 유명해 기억이라도 되지만 누군지 알려지지도 않은 채 학살당한 수천 명을 생각하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형무소를 지키는 망루 바로 옆에는 자유총연맹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바로 부근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는 우익들에 대한 보복 학살이 벌어졌다고 한다.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한 뒤 산내 학살 가담자들과 우익 인사들을 색출해 보복 학살을 벌인 거였다. 우물은 여럿이 함께 물을 길어 먹던 공동 샘이다. 이런 우물에 사람을 죽여 넣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앞쪽에 즐비하게 시신을 늘어놓기도 했다.
 
대전 형무소의 우물. 여기서도 우익들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 형무소의 우물 대전 형무소의 우물. 여기서도 우익들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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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혹한 '전쟁과 광기 시대'는 이제 다 끝난 걸까? 아니다. 여전히 오늘 한국 사회에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고 걸핏하면 '척결,' '처단,' '타도' 따위의 살벌한 말들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닌다.

다른 한쪽 사람들을 모두 없애야 참 평화와 천국이 이루어질 것처럼 서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과연 그러한가? 동포, 형제끼리 서로를 악마처럼 여겨 숱한 사람을 죽이고도 여태 조금도 교훈을 얻지 못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태그:#대전 산내 학살, #산내 골령골, #대전 형무소, #최태육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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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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