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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말이 들려서 물어보니 군산에서 온 청소년들이었다. 한국 국기만 걸려있던 한국인 위령탑. 우리는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역사도, 추모도 반쪽짜리로 해야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 오키나와 평화 공원에 있는 한국인 위령탑 한국 말이 들려서 물어보니 군산에서 온 청소년들이었다. 한국 국기만 걸려있던 한국인 위령탑. 우리는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역사도, 추모도 반쪽짜리로 해야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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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남부 이토만 시는 오키나와 전투(1945.3.26-6.23) 중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가 있었고, 최후까지 미국의 폭격을 많이 받아 희생이 더욱 컸다. 이곳에 전쟁의 참상을 전하고, 평화를 기원하며 세운 오키나와 평화 공원과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의 외관은 다소 화려하고, 규모가 컸다. 무료로 대여해준 한국어로 된 오디오 설명을 들어보니 전시 내용은 객관적인 편이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서도 많은 학살이 있었고, 그중에는 조선인들도 있었다고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오키나와 주민들의 억울함을 담아내려고 노력한 곳"이라고 표현한 오키나와 출신 가나이 상의 말처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일본 정부가 세운 원자폭탄 기념관에서 느낄 수 있는 피해자 관점의 색채가 짙은 공간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부르며 죽어간 군인들

방대했던 전시 공간 중에서도 특히 한국어로 된 전쟁 피해자들의 증언록을 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죽은 아이를 업고, 미친듯이 뛰어다니는 여자를 본 사람, 큰 부상에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식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애원하던 아버지, 죽은 어미의 젖을 먹고 있던 아기, 자신의 아이만은 좀 데려다 키워달라고 부탁하며 죽어가던 여인, 그러나 본인도 살길이 막막하여 아기를 데려갈 수 없었다는 증언자, 일본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에서 일본군에 의해 잔인하게 어머니가 살해 당하는 것을(당시 오키나와는 독자적인 언어가 있었다) 지켜봐야했던 어린 소년, 동굴에 숨었다가 아기가 소리를 내자 일본 군인들이 아기를 죽이려고 했고 결국 자기 자식을 데리고 나갔다가 혼자 돌아온 여인에게 아기는 어떻게 되었냐고 아무도 묻지 않았던 사람들, 죽 한 그릇에 사람들을 죽인 일본 군인들.

이들의 증언은 제주4.3 피해 내용과 노근리 민간 학살을 다룬 <작은 연못>이라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겹친다. 너무나도 닮은 전쟁의 얼굴들이다. 또한 증언록에 따르면 군인들은 "조국 만세!"가 아니라 "어머니!" 또는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고 한다. 

평화의 초석, 분단된 추모

기념관에서 나오니 마부니 언덕 아래로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폭격에 맞거나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 결국 몸을 던졌을 푸른 바다, 미군들은 후에 이 언덕을 '자살의 언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공원 안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평화의 초석'이 늘어서 있다. 

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국적이나 군인, 민간인의 구별 없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24만여 명이다. 그중에는 조선인들의 이름도 있다. 가나이 상은 "일본 정부에서 당시 자료를 많이 없애버렸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들은 약 1만 명으로 추산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일동포 2세 박수남 감독이 2012년 개봉한 다큐영화 <누치가후-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오키나와에는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수만여 명의 조선 청년들과 위안부로 끌려간 천 여명의 조선 여성들이 있었다. 일본 군인은 조선인 징용자들에게 폭탄을 짊어지고 미군 탱크에 돌격하라고 강요했다. '옥쇄(玉碎, 교쿠사이)'는 '옥처럼 부서져라'는 뜻으로 '미군이 상륙하면 항복하지 말고 천황 폐하를 위해 모두 다 교쿠사이하라'는 말에서 나왔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미국의 포로가 되어 정보를 누설할까봐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스스로 죽게끔 '집단자결'을 하게 했고, 일가족이 몰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비석에는 이름이 확인 안된 첫째, 둘째로 자식들을 표기한 경우도 있다.
▲ 평화의 초석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미국의 포로가 되어 정보를 누설할까봐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스스로 죽게끔 '집단자결'을 하게 했고, 일가족이 몰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비석에는 이름이 확인 안된 첫째, 둘째로 자식들을 표기한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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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희생자는 2019년까지 갱신되어 있었는데 여전히 조사중이다. 오키나와 평화 해설가 오키모토 히로시 상은 '미디어 뻐꾹'의 영상 자료에서 "희생당한 사람 중에는 이곳에 미군 사령관, 미국 군인들, 일본 사령관, 일본 군인들이 다 같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름 새기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적힌 이름들을 보려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북한 출신과 남한 출신이 나뉘어져 있었다. 희생당한 1945년에는 조선인이었지만 분단이 된 우리는 추모도 나눠서 하게 됐다. 반대편에 있던 '한국인 위령탑'에는 한국의 국기만이 걸려 있었다. 형제들이 부모의 제사를 따로 지내는 꼴이었다. 

공평해 프로젝트 송강호 선장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인간이지만 전쟁을 용인하지 않는 것도 인간이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전쟁을 용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숙제를 안고 기념관에 나왔을 때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학생들이 반가워 인솔하는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우리 활동을 전하며 "헤노코에 가보셨어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은 "무서워요"라고 하며 고개를 저었다. 숙제의 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선생님의 모습에 느끼는 바는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냉소보다는 관심이 필요하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전쟁통과 다를 게 없다. 지옥과 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헤노코에 모인다. 다시는 이런 지옥을 겪지 않게,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감는 비겁한 사람들이 되지 않게, 우리 인간성을 다시 회복하자고 말이다. 항해를 하며 주민들을 만나고, 역사의 현장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방하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활동이 어떤 이들에게는 '그곳은 어떤 곳인가요? 어떤 사람들이 있나요?'라는 이웃에 대한 호기심과 따스함으로 전해지길 기대해본다.

태그:#오키나와전투, #태평양전쟁, #오키나와평화공원, #오키나와평화기념관, #헤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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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사가 나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임을 깨닫고 몸으로 시대를 느끼고, 기억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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