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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주 열풍’이 분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진짜 삶이 궁금해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기자말]
'오십 대 남자가 혼자 산다'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까. 흐트러진 일상과 궁상맞아 보이는 집구석, 굴러 다니는 술병? 편견이 참 무섭다.

제주도 십 년차 이주민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가장 찾기 어려운 경우가 '십 년 동안 제주에서 홀로 버틴 남자'였다. 홀로 잘 사는 여자 이주민들은 주위에 정말 많았다. 하지만 남자는 드물었다. 한국 사회에서 남자는 혼자서 잘 살기 어려운 존재인 걸까.

사십 대 초반 혈혈단신 제주에 내려온 뒤 십 년째 홀로 잘 살고 있는 남자분이 있어 인터뷰를 요청했다. 제주 동쪽 세화리에서 민박집 '탱자싸롱'을 운영 중인 지준호(53)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제주 이주 후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나와는 달리, 지준호씨는 선연하게 시간의 결을 느끼며 십 년을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제주에서의 십 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유럽 여행 중 프랑스 마르세유 앞바다 부근에서 지준호씨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지준호씨 유럽 여행 중 프랑스 마르세유 앞바다 부근에서 지준호씨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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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십 년 전 제주에 왜 오셨지가 궁금해요.
"그때 제주가 한창 핫할 때였어요. 이주민들이 많아지고 있었죠. 제주는 혼자 있는 걸 잘 못 하는 사람은 안 맞는다는데, 저는 혼자 잘 놀거든요. 그래서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한 17년 광고 쪽 일을 했는데, 계속 잘 나갈지도 의문이고 새로운 게 하고 싶기도 하고, 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왠지 가면 좋은 여자를 만날 것 같은 예감도 들었고요.(웃음) 

휴가 내고 왔는데 너무 좋아서 한 달 만에 사표를 내고 다시 왔어요. 그때 기회가 닿아 바로 땅을 사게 됐어요. 게스트하우스 같은 걸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거든요. 사십 대, 아직 젊을 때 게스트하우스를 열어서 손님들이랑 같이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2년은 정말 재미있게 지냈어요.

손님들 보면 왠지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분들이 있거든요. 제가 지적인 대화를 좋아해서 관심사가 비슷한 분들을 만나면, 함께 이야기도 많이 하고 술잔도 기울이고 그랬죠. 제가 정말 진심으로 손님들한테 다가가고 소통을 하니까 즐거웠어요. 그때는 장사도 참 잘 돼서 스태프도 고용해서 운영했죠. 그러다 갑자기 대인기피증이 왔어요."

-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요?
"그때 제 집이 없었어요. 게스트하우스 옆에 컨테이너에서 살았는데, 제 삶이 너무 노출돼 있었죠. 그 컨테이너 안에서 태풍도 겪었어요. 너무 춥고 더운 데다 화장실이 안에 없어서 씻고 오가는 게 많이 불편했어요. 내 공간인데 내 공간이 아니었죠. 나오면 손님이랑 마주치고 그러면 웃으며 인사해야 하고. 가식적인 내 모습도 싫었어요. 그러다 대인기피증이 왔죠.

그때 스태프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다른 숙소를 하나 잡아서, 1박 2일 동안 그냥 누워서 뒹굴거리며 쉬다 왔어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치지 않고 살려면 뭔가를 해야겠다.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걸 매년 하나씩 정해서 하자. 그때부터 스윙댄스도 배우고 골프도 치고 요가도 하고 천문지도사 자격증도 땄어요.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자 싶었죠.

탐험가처럼 제주도의 비밀 명소를 찾아다니기도 했어요. 3~4년에 한 번씩은 해외여행도 다녀왔죠. 아이슬란드도 여행하고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어요. 중간중간 연애도 계속했고요.(웃음) 이런 식으로 뭐 하나에 빠지면 6~7개월은 시간이 잘 가더라고요. 지금은 명리학에 빠져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목표는 연봉만큼 벌자

- 혼자서 계속 뭔가 도전하고 성취해 나가는 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주위에 보면 직업을 바꾼 분들도 많은데, 십 년 동안 숙박업만 하셨어요. 이유가 있나요?
"숙박업자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숙박은 손님들 퇴실하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3, 4시까지만 청소하고 나면 나머지는 다 제 시간이거든요.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낼지 계발을 해두면 참 좋아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제주시내로 수영을 다니기도 하고, 요가원을 다니기도 했죠. 

이제 숙소 관리는 밥 먹는 것과 같아서 약간 피곤하지만 스트레스도 전혀 없어요. 예전에는 패닉이 된 적도 많았지만 이제는 웬만한 변수에는 꿈쩍도 안 해요. 모든 걸 알아서 해결하게 됐죠. 저는 제 시간에 무조건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목표예요.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최대한 빨리 청소를 끝내고 나머지 시간에는 목표한 걸 하면서 보내는 거죠."

- 근데 장사라는 게 내 마음대로 안 되잖아요. 십 년 동안 제주 경기도 요동쳤는데, 먹고 사는 게 힘들진 않으셨나요?
"숙박업은 초기 비용은 많이 들어가는데, 그 이후에는 공과금이나 고정비를 제외하고는 별로 돈 들어갈 데가 없어요. 근데 모든 업이 그렇지만, 3년만 잘 되는 것 같아요. 그 이후에도 잘 되려면 그동안 번 돈을 재투자해서 숙소를 근사하게 바꿔야 돼요. 그럼 또 3년은 잘 먹고 살 수 있어요. 이런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바꾸는 걸 세 번이나 했어요. 

처음부터 제 목표는 '마지막 연봉만큼은 벌어야 한다'는 거예요. 숙소에만 집중할 때도 있었고, 임대 수익을 올릴 때도 있었어요. 잘 안 될 때는 남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다른 숙소나 계단 청소를 할 때도 있었죠. 그런 식으로 모자란 부분을 더 벌었죠. 그게 안 되면 씀씀이를 줄였어요. 어떻게든 제 목표를 달성하면서 십 년을 버텼죠."
 
지준호씨가 제주 동쪽 세화에서 운영 중인 민박집 '탱자싸롱' 전경. 민박집 뒤로 푸른 세화 바다가 보인다.
▲ 민박집 탱자싸롱  지준호씨가 제주 동쪽 세화에서 운영 중인 민박집 '탱자싸롱' 전경. 민박집 뒤로 푸른 세화 바다가 보인다.
ⓒ 지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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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를 하면서 일정 수익을 계속 올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대단하신 것 같아요. 남자 혼자 산다고 하면 편견이 있잖아요. 왠지 제대로 살지 않을 것 같고. 근데 십 년이란 시간을 상당히 지혜롭게 보내신 것 같아요.
"일종의 강박일 수도 있는데, 하루를 루틴대로 보내요. 칸트가 몇 시만 되면 산책을 했다는 일화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예약표를 보고 예약률이 안 좋으면 금액을 조정해서 어떻게든 방이 나가게 하고, 숙소 청소하고 밥 먹고 수영하거나 헬스를 하거나, 골프 연습장을 가죠. 저는 정적인 취미와 동적인 취미를 모두 갖고 있는데, 요즘은 몸 쓰는 걸 주로 하고 있어요. 

그렇게 루틴대로 살아야 불안하지 않아요. 내가 열심히 살고 있구나, 싶고요. 사실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거든요. 늦게 일어나도 되고 늦게 자도 되고요. 그럴 때도 가끔 있지만.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이제는 알아서 아침에 눈이 떠지더라고요. 혼자 지내지만 계획대로 시간을 보내야 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숙박업을 하다 보니 살림 센스도 정말 많이 늘었어요. 어떻게 하면 절약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깔끔하게 쓸 수 있는지, 아주 잘 알죠. 식사 준비하는 게 늘 기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위해서 건강하게 먹으려고 노력해요."

좋아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삶

- 십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어떠세요, 달라진 게 있나요?
"많이 달라졌죠. 제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제주가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주 오기 전 제 화려했던(?) 시절이 전생 같아요.(웃음) 예전에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는데, 지금은 혼자 있는 게 편해요.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중시하는 가치, 추구하는 재미 같은 게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사실 십 년 전 제주는 힙한 게 있었거든요. 굉장히 매력적인 느낌이 있었고 독특한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때는 사람들과도 많이 어울리고 그랬죠. 근데 언제부턴가 생활인이 돼서 그런지, 요즘은 제주도도 그렇고 제주도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예전처럼 특별해 보이지는 않아요. 그래서 더 제 삶에 집중하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제주에 온 것도 혼자 잘 지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죠."

- 십 년 전 제주에 온 게 잘한 선택인 것 같나요?
"이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산 것 같아요. 제주가 그런 게 있어요. 같은 막일을 해도 제주에서 하면 좀 달라 보이거든요. 무슨 일을 해도 서울에서 하면 하층민 같은데, 제주에서 하면 뭔가 생각이 있어 보여요.

실제로 낮에는 막일을 하고 밤에는 합창단 지휘하는 분을 본 적도 있어요. 초창기에는 친구들이 부러워하니까 더 자유로워 보이려고,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 것도 있었죠. 근데 사십 대 후반부터는 그런 거품은 다 빠지고 제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서 살게 됐어요.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긴데, 그 안에서 내가 뭘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지적 호기심을 꾸준히 갖고 살면서, 공부를 하고 채워 나가면 행복한 것 같아요. 제주가 그런 면에서는 좀 더 좋은 환경인 것 같아요. 자연을 바라보거나 오름을 오르다 보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새로운 인사이트가 생길 때가 있거든요. 자연 속에서 그냥 있는 것 자체가 도움이 많이 돼요." 

- 계속 제주에 있으실 건가요?
"제주에서 십 년을 살아봤으니까 또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볼까 하는 구상도 한 번 해보고 있습니다."

'잘 산다는 건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이 인터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삶에서 진짜 재미란 무엇이고, 진짜 행복이란 무엇일까. 혼자든 누구와 함께든,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가장 중요한 건 '나'를 놓지 않는 게 아닐까.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갖고 나만의 규칙을 부여하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놓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타인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안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장했는지 더 퇴보했는지. 결국 잘 산다는 건, 매일 조금씩 성장해 가는 삶을 사는 게 아닐까. 그 성장의 맛을 아는 한 어디에 살든 어떻게 살든 누구와 살든, 그 삶은 결코 초라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되리라는 것도.

태그:#제주도, #이주민인터뷰, #십년차이주민, #제주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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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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