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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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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오천 년 동안 같은 피부색과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만 살았다고 생각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다른 피부색과 눈동자는 언제나 주목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다른 피부색의 아이들이 한국 국민으로 태어났다. 피부색의 다름이 어떤 고통을 줄지 아무 것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한국전쟁 후 70년이 지났다. 현재는 '다문화'라는 개념이 학교 교과 과정에도 포함되어 있고, 지역 학교에선 다양한 언어로 가정통신문이 발송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1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다문화 가정 자녀만 15만 명 가까이 된다.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우리 곁을 떠난 '그들' - 혼혈인의 미국 이주>에 따르면, "(과거 미군을 아버지로 뒀던) 혼혈인의 수는 지금까지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 적게는 2만 명에서 많게는 6만 명 정도가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에서 얼마나 많은 혼혈인이 태어났는지는 정확하게" 모르는 실정이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진 탓에 정확한 통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시멘트에 살을 벗겨보려 했던 9살 소년 
 
동아대 졸업앨범 사진
▲ 동아대 졸업사진 동아대 졸업앨범 사진
ⓒ 김영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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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미국 엘에이의 한인타운. 한국말을 잘하는 미국인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수소문하고 연락이 닿아 만났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흑인혼혈이었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 중이었고, 이민자 논문을 쓰기 위해 만나고 싶다는 목적을 전했다.

그의 이름은 김영도. 김씨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하길, 학생이고 논문을 쓴다고 해서 만났지 다른 이유였으면 거절했을 거라고 했다. 그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또 한편의 글로 그의 삶을 복기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을 만큼 우리 사이는 가까워졌다. 

김영도씨는 1950년 12월 28일 한국 어머니와 미군 군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군GI병사, 관등성명도 제대로 모르는 아버지는 아마도 곤경에 처했던 어머니를 도와줬던 모양이다. 이렇게 짐작하는 이유가 있다. 당시 엄마를 엄마라고 하지 못하고 아줌마라고 부르던 9살 때, 같이 간 극장에서 본 영화가 그랬다. 영화 제목은 <내가 낳은 검둥이>였다.

이 영화에서는 흑인 병사가 곤경에 처한 여자를 구해준다. 그 뒤 여자는 상대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고, 혼자 키우게 된다. 아이는 주변에서 혼혈이라고 놀림을 당한다. 혼혈아이는 피부색을 바꿔보려고 우물가의 돌에 피가 나올 때까지 살을 비빈다. 동네사람들의 성화에 아이가 결국 미국으로 입양을 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를 본 후, 9살 김영도는 자신도 시멘트에 살을 벗겨보려 했다고 한다. 검은 피부색은 하얗게 바뀌지 않았고, 쓰라리고 피만 나왔다고 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영화와는 달리 김영도씨의 어머니는 끝까지 아이를 지키려 노력했다. 

여자 혼자 흑인혼혈 남자아이와 먹고살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부터였을까? 그의 어머니가 역술책을 펼쳐 놓고, 사람들 점을 봐주며 살기 시작한 것이. 부산 영도다리는 전쟁 피난민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고, 전국의 역술인들이 모여든 장소이기도 했다. 영도의 어머니는 어깨너머로 배웠든지, 신이 들렸든지 먹고 살려고 역술책을 펼쳐놓고, 이사를 간 인천에서도 점을 봐주는 사람이 되었다.

인천에서 '펄 벅 여사'가 혼혈아이들에게 돈과 옷가지들을 나눠줄 때마다, 어린 영도를 데리고 다니면서 억척스럽게 다 받아왔다고 한다. 

어린시절 김영도는 외로웠다. 동네 아이들이 피부색을 놀리며 노래를 지어부르기도하고, 돌을 던지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 괴로웠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이들은 친구들까지 불러서 구경했고, 결국 주먹다툼으로 이어졌다.

"싸우잖아, 그 다음날 그 집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에 멍멍이까지 따라왔다고. 온 집안 식구들이 나한테 뭐라 그래. 그러면 담임 선생님도 그 사람들 편이 돼서 날 혼낸다고. 그 애가 분명히 먼저 시작했는데도. 내가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런데 그게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9살 때, 어머니가 한국남자와 함께 대문을 들어왔다. 그 남자가 "이제부터 내가 네 아버지다" 하는데, 너무나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돈과 옷을 나눠 주던 곳으로 무작정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 시간 넘게 한참을 달려가니 그 곳이 나왔다고. 그가 고아원에서 스스로 고아를 자청해 살게 된 계기였다.

명성원이라는 혼혈 고아들만 모여사는 고아원. 그들을 위한 학교가 있어서, 피부색에 대한 차별과 놀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서 입양 가는 혼혈친구들도 있었다. 고아원은 처음에 (미군들이 사용하다가 떠나간) 막사를 사용했다. 나중에 증축 때문에, 영도는 어머니에게 잠시 돌아간 적이 있었다. 그는 학교 가기를 거부했다. 학교에서 "영도랑 놀지마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 공사가 끝나고 명성원으로 돌아갔다. 학교를 다시 다니려고 호적을 새롭게 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1953년생이 되었다.

'최초의 흑인혼혈 야구선수'가 되다  
 
맨 앞이 김영도
▲ 동아대 야구 맨 앞이 김영도
ⓒ 김영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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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이 되던 그해, 야구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인생이 야구를 시작하면서 달라진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말한다. "야구를 안 했으면, 주먹으로 살았을 친구"라고.

김영도씨는 동대문중학교 야구부에 뽑혔다. 중학교 때 이미 다른 선수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근력은 몇 배 더 좋았다. 방망이만 대면 힘이 좋아 홈런이었다고 했다. 어깨힘도 좋아 중학교 땐 투수로 결승전을 승리로 마무리하기도 했다. 동대문상고로 올라가서 4번타자 1루수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1968년도에 부산 동아대학교 야구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960년대 말, 대한민국은 보릿고개가 있던 때였다. 밥을 굶는 일도 허다했다. 지방은 수도와 전기가 안 들어 오는 곳이 더 많고, 시골은 마을에 라디오나 티브이가 한 대 있던 그런 시대였다. 쌀이 부족해 미국에서 받은 가축용 옥수수 사료로 빵을 만들어 학교에서 점심으로 주던 시대이기도 했다.

대학은 꿈도 못 꾸는 사람들이 더 많던 그런 시대에, 김영도씨는 대학생이 되었다. OSEN, 스포츠Q 등에서 스포츠기자로 활동한 박상현 강사에 따르면, 김영도씨는 '한국 최초 흑인 혼혈 야구 선수'였다. 
 
1972년 일본 고니시 주조팀 4:3 승리 기념사진
▲ 동아대 야구팀 단체사진 1972년 일본 고니시 주조팀 4:3 승리 기념사진
ⓒ 김영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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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교육과를 졸업한 후, 1980년에 부산 대신중학교로 왔다. 야구부가 있는 학교였다. 그는 그 시대 최초 흑인혼혈 체육교사이자 야구감독이 되었다. 대신중학교 재직 중에 결혼하고 두 자녀가 태어났다. 그는 경상도 지역 혼혈인협회 회장직을 10여 년 맡기도 했다.

야구감독으로서 그가 발굴해 길러낸 제자들은 롯데 자이언츠 등의 프로 선수들이 되었고 현재는 야구 감독으로도 활약하고 있다. 롯데 2군감독 이종운, 청운대 윤동배, 정보고 박광율 등이 있다. 한때 선수들을 많이 키워내다 보니, '선수 제조기'라는 별명도 있었다고 한다.

정이 많아 학생들 따뜻하게 챙겨주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제자 중에 김영도 선생님을 유난히 잘 따르던 심정환(전 LG트윈스 프로선수)은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제가 학교 끝나면, 선생님 댁에 가서 애기랑 놀아주고 업어주고. 제가 업어 키웠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영도씨 가족에게 마음을 열고 살지 않았다. 

흔히 볼 수 없었던 흑인혼혈, 그래서 이 가족에게는 유달리 차별과 설움이 많았다. 둘째 아들이 네 살이 되던 해 온 가족이 피부색으로 모욕을 심하게 받은 후, '내 자식들만큼은 차별과 서러움을 받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자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야구도 관둘 결심을 했다. 자녀들을 위해 미국행을 선택한 것이다. 

1982년 레이건 대통령은 베트남전과 한국전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갈 수 있는 법('아메리시안 홈커밍 빌')에 서명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태어났던 혼혈인들의 상당수가 미국으로 갔다. 한국의 다문화 역사는 사실상 70년이 넘은 것이다.     

고등학교 때 김영도씨는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나 힘들어 책가방에 "뭘 봐?"라고 써서 다녔다고 한다. 야구장에서 관중들은 피부색을 두고 야유를 보내기도 한다.

김영도씨는 동아대학교로 진학했지만, 이런 사례가 일반적이진 않았다. 당시 언론 보도 등을 살펴봤을 때, 1970년에서 80년대까지 흑인혼혈인 중에 교육공무원으로 취직해서 돈을 번 이는 김영도씨가 거의 유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 말해서 뭐해, 잊어버려야 현재를 살 수 있는데"
 
김영도씨 야구감독시절 제자들과의 단체사진. 대신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부임하면서, 야구감독을 했다.
▲ 대신중학교 졸업기념 사진 김영도씨 야구감독시절 제자들과의 단체사진. 대신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부임하면서, 야구감독을 했다.
ⓒ 김영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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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인터뷰 초기 2년 동안 야구에 대해 왜 말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과거에 야구로 유명한 거 말하면 뭐해. 잊어버려야 내가 현재를 살 수 있는데." 그의 인생을 바꾼 야구를 통째로 잊고 살아야 할만큼 미국 이민생활이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학교 때 4번타자 1루수로 시작해 야구감독까지, 그의 인생은 야구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37세에 가족의 인종차별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 그는 야구를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현재를 살았다. 심지어 성공한 사람만 한국에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김영도씨의 인생은 한국 역사와 함께한다. 그의 탄생 계기였던 한국전쟁. 처음으로 이땅에 다른 피부색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소수의 삶이 얼마나 서럽고 냉정한지 그리고 억울한지를 37년간 뼈저리게 겪으며 살았다. 그를 성공과 영광으로 이끌었던 야구를 포기하자 그의 인생은 빛을 잃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뤘던 대한민국에도 또 한 차례 흔들림이 있었다. IMF로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한 점이다. 이후로 김영도씨는 한국방문을 아예 포기했다. 그에게, 한국은 '성공하지 않으면 못 오는 나라'가 되었으므로.

자녀들만큼은 검은 피부로 인해 차별받지 않게 하려고 떠났던 조국이었는데, 성공하지 못해서 돌아오지 못하는 나라. 김영도씨의 말을 다시 재구성해 본다. '현재를 살아가려고, 야구를 머리 속에서 지웠다.' 피부색과 모든 차별을 뛰어넘는 나라가 되어, 이들 가족이 즐겁게 한국을 방문하길 희망해 본다.

태그:#야구, #다문화, #혼혈, #입양과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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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었던 한류들. 한국을 어디까지 좋아하는지, 한국의 무엇이 그렇게나 좋은지, 한국 것에 그들만의 정서를 불어넣어 한국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있는지를 찾아낸 기사로, 한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한국이름 홍지영(제보는 카톡아이디:ajy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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