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리집 입구에 사람들을 맞이해 주는 특별한 이가 생겼다.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무 인형이다. 그 모습이 다소곳해 들어서다 말고 멈칫해서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 안녕하세요, 인사까지 나눈다. 작은 인형 하나가 뭐라고 보는 순간 사람의 마음이 선해짐을 느낀다.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랄까. 인형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서 오세요.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이 인형은최근 남편이 만든 작품이다. 봄에 잘라낸 매화나무의 몸통을 버리지 않고 말려 두었다가 만든 것이다. 그동안 매화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매실을 선물해 줬지만, 올봄에는 잎이 너무 무성해 벌레가 생기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어쩌면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아 숨 쉬는 것이 힘들어 그리 된 것인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매화나무의 잔가지만을 정리할 생각이었으나, 해마다 높이 달린 매실을 따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높이를 조절하기로 했다. 과감하게 몸통을 잘라내는 일을 하는 것으로.
남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기톱으로 매화나무를 자를 때는 내 몸이 다 찌릿찌릿했다. 전정가위로 가지를 자를 때는 나무가 이발을 하는 것 같아 시원한 느낌이 들었는데, 몸통을 자를 때는 큰 수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잘린 나무 사이에선 금세 잎이 자라나 안심이 되었다. 어찌 됐건 우리가 벌레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나무를 아프게 한 건 사실이니까.
나무를 자른 후 가지를 정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종량제 봉투에 담으려면 길쭉한 가지들을 가위로 잘게 잘라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가지를 잘라내 정리를 했더니 어느 새 그 양이 20킬로그램 종량제 봉투 10포대가 훌쩍 넘었다.
어찌어찌 잔가지는 그렇게 처리했는데 이제 커다란 몸통이 문젯거리로 남았다. 몸통을 자르는 것은 잔가지를 정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자르다 말고 마당 한 구석에 방치해 말렸는데, 골칫거리였던 그 몸통이 저렇듯 예의바른 인형이 돼 주었다. 환골탈태가 따로 없었다. 그게 지난 토요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남편은 또 다른 작품을 탄생시켰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쉬고 있던 나를 남편이 불러냈다. 남편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온몸에선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얼굴 위로는 투명한 물방울들이 열기를 식히려는 듯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나는 고생을 사서 하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굳이 이 일을 이 더위에 해야할 이유가 없는데 하고 있으니 말이다. 본인 말대로 고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즐거운 걸까.
"아, 더운데 좀 쉬지. 또 뭘 만들었어요?"
나의 말에 남편이 턱을 내밀어 마당 한 켠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나무 인형이 있었다. 작품명이 부부라나 뭐라나.
"우리야."
남편이 말했다. 인형들을 보고 있노라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행복감이었다. 그러고 보니 행복은 쓰나미처럼 밀려와 온몸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가랑비처럼 서서히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개그 프로를 볼 때의 박장대소가 아니라,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미소가 만들어내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은 맞다. 아무리 큰 행복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고 만다. 그러니 우리는 일생에서 큰 행복 몇 번을 누리는데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큰 행복을 잘게 잘게 나눠 소분한 후 오래도록 길게 길게 누려야 할 것 이다.
큰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감사할 일들이 참 많다. 이러한 작은 일들에 감사하다 보면 세상은 행복투성이다. 삶은 감당하기 벅찬 초대형 행복에 의해 빛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문지르고 닦아낸 소소한 일상들에 의해 빛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버려질 뻔한 작은 나무 토막에서, 그 토막을 다듬는 남편의 땀방울에서 보았다. 행복을 만들어 주는 것이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란 걸 알게 되면 우리는 조금 더 쉽게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카카오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