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도 샤프 쓰고 싶어!"

초등학교 4학년 둘째가 어느 날 넌지시 샤프 이야기를 꺼냈다. 샤프는 심이 가늘고 잘 부러지기 때문에 악력 조절이 어려운 초등학생들에게 별로 좋은 도구가 아니라고 여겼기에 망설였다. 바느질을 하다 바늘허리를 부러뜨리는 모습까지 봤기 때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샤프는 연필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힘이 덜 들어가기 때문에 필체가 흐릿해지고 선이 가는 글씨에 익숙해지는 경향도 있어 일찍 사용하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냥 반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샤프를 쓰고 싶다는 아이에게 글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를 고민했다. 필기구를 바꾸고 싶은 이유를 물어보고 샤프의 장단점을 설명한 후 홀더펜이라는 타협점을 찾았다.

연필과 샤프, 그 중간의 홀더펜
 
바늘 허리도 부러뜨리는 학생이라면 0.9mm 이상의 제품을 추천한다.
▲ 왼쪽부터 0.3mm, 0.5mm, 0.9mm 샤프 바늘 허리도 부러뜨리는 학생이라면 0.9mm 이상의 제품을 추천한다.
ⓒ 임은희

관련사진보기

 
샤프는 심의 굵기(지름은 mm표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아주 가늘어서 전문가용으로 사용하는 0.3mm(중고등학생들이 필기할 때 색깔펜으로는 이 두께를 많이 사용한다. 보충설명을 적기에 적합한 두께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0.5mm, 상대적으로 두꺼운 편에 속하는 0.9mm, 1.2mm 등이 대형 문구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규격이다.

그런데 이중 가장 두꺼운 1.2mm도 튼튼한 연필과 비교하면 부실하다. '연필과 샤프 중간 정도의 뭔가가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던 중 홀더펜이 생각났다. 

사실 홀더펜은 샤프의 조상이기도 하다. 1900년대 수요가 급증한 만년필 시장에 파란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 홀더펜이다. 하지만 두꺼운 홀더펜을 지금 형태의 샤프펜슬로 만든 것은 일본이다. 와쿠이 요시유키, 와쿠이 사다미의 저서 <문구의 과학>에 따르면 계산기로 유명한 일본 회사 '샤프'에서 처음 만들었다.

탄성이 좋아 잘 부러지지 않는 샤프심은 플라스틱 함량이 높다. 플라스틱 수지와 흑연을 원료로 하는 샤프심과는 달리 홀더심은 연필처럼 흑연과 점토로 만들기 때문에 지름을 줄이기 어렵다. 플라스틱과 물리학이 낳은 가느다란 샤프에 가려져 특수 펜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홀더펜이 일반 문구시장에 재등장한 것이다. 

홀더펜의 지름은 2mm로 연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입학 후 2B를 사용하다 B나 HB로 단계를 올려야 하는 시점에 등장한 구세주다. 샤프는 노브를 누르면 심을 고정한 클러치가 아래로 내려오며 심을 내보낸다. 하지만 대부분의 홀더펜은 개폐를 관장하는 클러치가 없다. 노브를 한 번 누르면 홀더심이 전부 빠져나오기 때문에 조심해서 눌러야 한다. 대신 심통과 스프링만 있는 간단한 구조라 고장 나기도 어렵다.
 
연필심처럼 굵어서 잘 부러지지 않는다.
▲ 위에서부터 차례로 까렌다쉬, 스테들러, 파버카스텔 홀더펜 연필심처럼 굵어서 잘 부러지지 않는다.
ⓒ 임은희

관련사진보기

 
동네 문방구인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기준으로 심을 한 단계씩 내려보내는 홀더펜은 스테들러 재팬의 제품이 유일하다. 스테들러는 독일 회사지만 스테들러 일본에서 개발한 특수한 필기구들이기 때문에 제품 측면에 JAPAN이라는 문구가 따로 붙어있다.

까렌다쉬는 연필과 가장 흡사한 형태라 초등 저학년이 쓰기에도 무리가 없다.  파버카스텔 제품은 사용한 제품들 중 가장 튼튼하다. 잡는 부분에 완만한 경사와 빗살이 있어 그립감을 해치지 않으면서 미끄러짐도 방지한다.   취향에 맞지 않는 필기구는 백 개가 넘게 있어도 손이 잘 가지 않는다. 검은 펜으로만 필기를 하는 것이나 알록달록 꾸미기 위해 다양한 필기구를 구비하는 것도 나름의 취향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취향을 어린이라고 해서 무시당할 이유는 없다. 좋아하는 필기구를 들고 공책 앞에 앉으면 나오는 글씨가 달라진다. 자로 잰 듯 반듯한 글씨는 아니더라도 분명 어제보다는 괜찮은 글씨가 나온다.

어린 시절 필기구에 깃든 잔잔한 이야기
 
좋아하는 펜으로 필기했다고 모두 좋은 글씨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필기를 했다는 점이다.
▲ 초등학교 4학년 둘째 아이의 노트필기 좋아하는 펜으로 필기했다고 모두 좋은 글씨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필기를 했다는 점이다.
ⓒ 임은희

관련사진보기

 
필기도구에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에는 부모가 골라주는 대로 쓰지만 학교를 다니며 필기도구 취향이 생겨난다. 연필, 잉크펜, 젤리펜, 지워지는 볼펜, 만년필, 펠트펜, 형광펜, 볼펜 등 선호도와 필요에 따라 다양한 필기도구를 선택한다.

인터넷으로 필기구를 주문하더라도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며 취향을 존중해 보자. 어쩌면 내 아이가 문구에 푹 빠져있는 아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모를 땐 아이에게 물어보면 된다.

쓸데없는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화로 분쟁을 줄여가는 과정을 익히는 것이다. 사춘기 청소년과 대화하는 기술을 미리 연마하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크게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쓰던 연필들을 보관하고 있다. 연필 끝에 씹은 흔적이 있는 것들은 첫째 아이의 것이고 2센티미터 미만이 될 때까지 사용한 연필들은 둘째 아이의 것이다.
▲ 연필의 추억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쓰던 연필들을 보관하고 있다. 연필 끝에 씹은 흔적이 있는 것들은 첫째 아이의 것이고 2센티미터 미만이 될 때까지 사용한 연필들은 둘째 아이의 것이다.
ⓒ 임은희

관련사진보기

 
또 샤프를 쓰기 시작했다고 연필에 관한 추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 잡았던 연필이나 연필을 들고 했던 일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앨범처럼 연필을 보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모든 연필을 다 보관할 순 없겠지만 특별히 좋아했던 연필들을 보관해 두면 향후 대화를 이끌어 낼 좋은 재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화가 줄어드는 청소년기에 성적이나 진학이 아닌, 웃으며 연필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족에게 큰 축복이다. 

일상의 사소한 기억에서 시작된 슬며시 웃을 수 있는 추억을 우리는 행복이라 부른다. 어린 시절 필기구에 깃든 잔잔한 이야기가 어쩌면 글씨 교정보다 아이의 삶을 더 반듯하게 이끌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태그:#필기도구, #홀더펜, #샤프, #연필, #초등학교필기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노동자입니다. 좀 더 나은 세상,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