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9 11:50최종 업데이트 23.05.1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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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정을 밖에서 바라보든 그 안에 서든, 탁 트인 하늘과 바닷물과 정자가 잘 어울린다. 구름과 모래톱과 해안선과 능선, 연미정의 처마선까지 모두 유려한 곡선이다. ⓒ 윤태옥

 
강화도의 연미정과 월곶돈대는 한강하구를 조망하기 좋다. 북에서 동으로, 북한의 개성군, 판문군, 한강, 김포반도가 이어진다. 김포반도가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작은 섬 유도도 빤히 보인다. 연미정 안팎에서 바라보면 탁 트인 공간에 하늘과 물과 정자가 잘 어울린다. 구름과 모래톱과 해안선과 능선, 연미정의 처마 선까지 모두 유려한 곡선이다. 월곶돈대의 성벽에 다가서면 하늘로는 시야가 더욱 트이고 트인다. 두 눈과 하나의 가슴이 그렇게 시원할 수 없다.

내가 연미정을 처음 찾은 것은 휴전선 답사여행 때였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한강하구를 긴장하며 마주하지만, 연미정이 건네주는 곡선의 감성은 나의 긴장감을 살며시 해제해주곤 한다. 역사의 협심증으로 발동하는 가슴 통증을 풀어주고, 덩달아 높아진 안압을 가라앉히는 느낌이다. 휴전선 답사를 십여 차례 다니면서 첫날 첫 번째 답사지로 연미정을 고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장 빈번한 월북루트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국전쟁이란 주제로 돌아와 월곶돈대 문루 옆의 배수구를 빤히 쳐다본다. 2020년 7월 탈북자 모씨가 배수구를 빠져나가 한강하구의 밀물을 타고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사단장이 해임되었다. 군사분계선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월북이란 행위는 본인의 목숨은 물론 남의 목줄까지 날려버리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연미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한강하구는, 최근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전쟁 전후에도 수도권에서 가장 빈번한 월북 루트였던 것 같다. 뱃길이니 일정 규모의 그룹을 짐까지 싣기 용이했고, 육지의 도로에 비해 감시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좋았을 것이다.

연미정에 앉아서 시간을 1946년 여름으로 되돌려본다. 해가 기울어가는 한강하구를 동에서 서로 가는 작은 배가 하나 등장한다. 마포나루(지금의 마포대교 북단)에서 출발한 작은 배에는 남녀 두 명씩 넷이 타고 있었다. 배는 한강을 따라 내려와 김포반도를 왼쪽으로 감싸면서 연미정 가까이에 있는 유도를 지났다. 예성강 하구를 지나고 교동도를 둘러 말도를 스치고는 북서로 방향을 바꿔 해주 쪽으로 올라갔다. 이미 캄캄한 밤이었고 해주 가까운 바닷가에 일행을 하선시킨 작은 배는 도망치듯 재빠르게 마포로 돌아갔다.
 

ⓒ 봉주영

 

중간에 남한의 해상검문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 우한에서 동전수매업을 하다가 폭격에 부상을 당하고 고향 옹진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꾸며댔다. 중일전쟁 시기에 일본은 중국의 구리 동전까지 수집해서 조병창에 공급했는데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동전 수거에 종사했었다.

지금은 남북으로 갈려 마주보고 있지만 한강하구는 그 북안인 황해도 연안 옹진까지 북위 38도 이남으로 온전한 남한의 관할지역이었다. 작은 배로 월북한 이들은 김학철과 누이동생 그리고 경호원과 간호사였다. 목적지가 옹진이라 하고 두 쌍의 부부처럼 보였으니 큰 의심을 받지 않고 월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은 인생을 건 월북이었다.

월북은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군정은 1946년 초부터 좌익에 대해 압박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그해 5월에는 정판사 사건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조작이란 것이 근래에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조선노동당을 탄압하는 치명적인 신호탄이 되었다. 조선노동당은 지하로 들어가면서 일부 주요 인사를 북으로 피신시키기 시작했다. 외다리라는 신체 조건으로 인해 지하활동이 불가능했으니 김학철은 북송 1호로 지목될 만했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평전 ⓒ 실천문학사

 

김학철은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41년 12월 중국 허베이성 타이항산 지역의 후자좡촌(胡家莊村)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다가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는데 총상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

일제가 패망하고도 55일이나 지나서야 석방돼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그는 서울에 돌아와서는 조선의용대 시절의 직속상관이었던 김원봉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상봉한 자리는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회의석상,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귀환보고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장안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캄캄한 밤에 김학철 일행이 하선한 곳은 운이 나쁘게도 썰물에 드러난 갯벌의 끝자락이었다. 갯벌은 걷기 힘든데다가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짐을 모두 포기한 채 겨우겨우 빠져나와 근처의 염막을 찾아 들어갔다. 김학철은 경호원을 보내 황해도 보안부장(경찰 책임자) 이춘암(일명 반해량)에게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이춘암은 바로 차를 몰고 와서 김학철 일행을 데려갔다. 이춘암은 김학철의 조선의용군 동지였다.

그날 저녁 해주 시내 모처에서 환영만찬이 열렸다. 황해도 인민위원회 서기장 이유민, 황해도당 선전부장 정율성과 그의 중국인 아내 정설송(중국 최초의 여성 대사, 네덜란드 주재 중국대사 역임) 등이었다. 이춘암뿐 아니라 이날 모인 동지들은 대부분 김학철의 조선의용군 동지였다. 북한에서의 정파로 구분하자면 연안파.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깃발 가운데 선 이가 김원봉이고 흰 원 안의 사람이 김학철이다. 김학철과 김원봉은 해방 후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회의석상에서 상봉했다.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멋지고 감동적인 귀환보고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장안의 뜨거운 시선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김학철은 1935년 보성고보 재학중이던 열아홉에 원산의 집에서 보내온 학비를 들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운 좋게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에 선이 닿았고,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 멤버가 됐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유자명 등 아나키스트 그룹인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노동당으로 활동하다가 1934년 중국으로 망명해온 최창익 한빈 허정숙 등의 조선청년전위동맹, 김성숙과 김산 등의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네 그룹이 연합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중국 국민당의 협력을 받아 창설한 무장대오였다.

조선의용대는 처음에는 국민당 군대의 대일전선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대원들이 국민당의 대일항전 의지에 의구심을 품게 됐고 이들은 중의를 모아 화중 화남의 국민당 군대가 아니라 타이항산의 팔로군과 제휴하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김원봉의 본대는 충칭에 두고 주력 대원들은 황하를 건너 북상했다. 북상 이후 조선의용대는 최창익이 이니셔티브를 잡아갔고, 1942년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한 이후에는 무정이 주도하게 됐다. 1942년 11월에는 일제의 패망에 대비하여 건국역량을 키우기 위해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1944년 옌안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군은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바로 그달 하순 조국을 향해 동북으로 행군했고, 11월에는 1천여 명이 선양에 집결하여 의용군 군인대회를 열었다. 조국으로 입국하려는 조선의용군에 대해 소련 점령군이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귀국을 일단 연기했다. 그들은 만주 지역에서 3개 지대로 개편하여 동포들이 많은 남만주와 옌볜 그리고 북만주로 진출했다. 이들은 조선인들을 보호하며 대원을 늘려갔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164사단 166사단으로 개편하여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에 대해 정치적 채권자가 됐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가 옌볜을 조선인의 자치주로 했고,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이 유엔군에 밀리자 의용군이란 명목으로 참전한 것이었다. 국공내전이 끝나자 이 두 개 사단은 1949년과 1950년 무장한 그대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바로 북한 인민군의 주축이 되 것이다.

북한의 건국이나 한국전쟁 그리고 전후복구 등에서 조선의용군과 연안파는 인적으로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다. 그러나 1956년 김일성이 소위 종파사건을 계기로 전투적으로 벌인 권력투쟁에 연안파는 크게 밀리고 말았다. 김학철, 정율성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 살아남았으나, 북한에 있던 상당수는 숙청을 당해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났다. 해주에서 김학철을 환영해준 이유민도 함경남도 인민위원장으로 있다가 숙청당해 행방불명이 됐다. 살아남은 몇몇은 오직 김일성의 충성분자였다.

숙청되었으니 그들의 공적과 역사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으려 했고 북한에서 조선의용군이라는 독립운동 역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김일성의 정치군사적 독재가 역사의 독점으로까지 뻗어가면서 독립운동의 생생한 역사는 창작으로 덧칠한 김일성 신화로 완전히 포맷되었으니.

남한에서도 한국전쟁의 엄청난 비극과 이승만과 그 이후의 군사독재 아래 북한과 연관된 것은 엄연한 역사조차도 금기어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그런 정치적 핍박은 테러는 물론 사법살인으로까지 치닫기도 했다. 그나마 40여 년이 지난 1990년 전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덕분에 해금이란 빛을 보기 시작했다.  
 

김원봉 부인 묘소 찾은 김학철옹 지난 2001년 6월 3일 경남 밀양을 방문한 '항일 독립군 마지막분대장' 김학철옹이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 여사의 묘를 찾아 묵념하고 있다.오른쪽부터 김옹, 박여사의 조카, 김원봉의 여동생. ⓒ 연합뉴스

 
젊은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사실의 재구성을 거치면서 역사학에서는 하나씩 둘씩 복권됐다. 김학철은 <최후의 분대장> <격정시대> 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한국에서 다수 출판되었고, 1989년 이후 일곱 차례 방문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여행객도 그를 알고 있으니 복권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정치적으로나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몇 년 전 <암살>과 <밀정>이란 영화를 통해 김원봉이 대중적으로 부활한 경우가 있으나 그나마도 의열단이 포커스였지 조선의용군은 핵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김학철의 월북에서 조선의용군 역사가 남북에서 어떻게 됐는지 짚어보았다. 다시 다른 월북 사례들도 몇 개를 더듬어 오늘을 가늠해본다. 김학철은 그를 수행했던 간호사 김혜원과 북한에서 결혼했다. 김혜원은 첫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친정집이 있는 부천으로 월남했고, 갓난아들을 안고 다시 월북하여 부군에게 돌아갔다. 아마 같은 루트를 경유했을 것이다. 그때는 아무리 38선이라지만 오가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목숨과 바꾼 월경

60년이 훨씬 더 지난 2013년 9월 임진각과 오두산 전망대 사이의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탄포천에서 한 남성이 철책을 넘었다. 초병의 통제에 응하지 않고 임진강에 입수했다가 우리 초병의 총격에 사망했다. 2020년 9월에는 연평도 해역에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해상에서 실종됐고 이번에는 북한 초병의 총격에 숨졌다. 

착잡하다. 철책선 경계근무가 철저해졌음을 칭찬할 것인가, 월북 행위는 총격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안타까워할 것인가. 월북을 하게 된 처지나 그 무지를 비난할 것인가. 제삼자가 보면 남북이 적대적으로 합동하여 아직도 '야만의 시간'을 철통같이 그대로 세우고 있을 뿐이다. 

국경을 무단으로 넘는 것은 국경 양측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그 경우 검거해서 조사하고, 필요하면 재판을 거쳐 처벌하는 것이 문명세계의 상식이다. 초병은 근무지침에 따라 충실하게 자기 임무를 수행했다지만, 초병 개인의 단독 행위가 아니다. 초병을 그 자리에 세운 군, 군을 세운 정부, 정부를 세운 국민 모두가 합동으로 취한 행위, 곧 국가의 행위다.

38선 월북이, 군사분계선 월북이 과연 현장의 즉결처분감인지는 되짚어볼 수 없을까. 몰래 감행한 월북이란 남한의 총격을 피한 다음에, 북한의 총격까지 피해야만 살아서 도착하는,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살 행위인 곳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전쟁이 멈추기 전까지 30만~35만이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련군 자료를 감안한 숫자라고 한다. 월남의 결과로 남한은 인구증가 이외에, 좋든 아니든, 무엇을 얻었다. 그럼 월북을 통해서 남한은 인구감소 이외에 무엇을 잃었을까. 이런 질문은 한국전쟁의 득과 실을 따지는 것과 같아서 답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일단 월북 자체에 대해 객관적으로 조사연구된 것이 거의 없다. 월남이란 현상은 남한 학자들이 늦게라도 연구할 수 있었지만 월북자들에게 대해서는 연구는커녕 기본적인 자료에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주장이나 발표는 아주 단편적인 팩트 몇 조각을 가끔 얻는 정도이다. 월북 숫자부터가 그렇다. 북한의 발표를 찾아봐도 숫자에 대해 쓴웃음만 지을 뿐이다. 

월북 이후에 남북 양쪽에서 사라져 간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그렇게 사려져간 문학사를 짚어보기 위해 깊은 숨 한번 내쉬고 임진강과 한탄강을 거슬러 철원으로 간다.
 

연미정에서 바라본 황해도 땅. ⓒ 윤태옥

 
 

나의 여행친구 이현숙이 그려서 보내온 연미정. 이 연재를 읽고 연미정 이야기도 나누더니 혼자서 현장을 다녀오기도 했단다(그림 제공: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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