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1 17:02최종 업데이트 23.05.11 17:02
  • 본문듣기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칠레 상원에서 근로시간을 주 4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는 법안이 가결된 3월 21일(현지 시각) 히아네트 하라 노동부 장관(가운데)이 정부 대변인 카밀라 바예호(왼쪽), 성평등부 장관 안토니아 오레야나(오른쪽)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 EPA=연합뉴스

 
지난 한 달 동안 이어진 지구 반대편 나라 소식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칠레에서 노동시간 기준을 현재 주 4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인다는 내용이었다. 노동 시간을 점차 줄여가고 있는 국제적 추세에 비추어 본다면 그다지 특별한 내용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제목만 보고도 "지구 반대편에서도 이러는데 대체 왜 우리는?"이라는 한숨과 자괴감을 막을 도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기사들을 찾아 읽으면서 부러움의 깊은 탄식이 이어졌다.

우선 제도를 추진하는 방식이 그러했다. 칠레 정부는 제도가 안착할 수 있도록 순차적으로, 하지만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전면적으로 노동 시간을 단축하기로 했다. 2024년에는 주 44시간, 2026년에는 42시간 그리고 2028년에는 주 40시간으로 말이다. 지금이 2023년인데 목표 달성 시기를 무려 5년 뒤로 잡았다니 '빨리빨리' 한국인의 성에 차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기한을 넉넉하게 잡되 기업 규모별 차등 없이 한꺼번에 적용하도록 했다. 노동 시간 단축 논의가 시작되면서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 사업주들은 당연히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한 대응이 바로 순차적, 전면적 적용이다. 칠레 정부는 중소기업을 위한 특별한 지원 조치도 법령에 포함했다.

우리 사회는 무슨 규제든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장 적용 제외를 당연시한다. 오래전부터 그래왔기에 익숙하다. 이를테면 건강보험은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시작했고, 이후 공무원과 교직원을 거쳐 점차 적용 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사회보험 중 가장 먼저 도입된 산재보험은 1964년 법령에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는 사업장에 도입한다고 해놓고, 동시에 시행령을 통해 상시 500인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광업과 제조업 이외 모든 사업장은 법 적용에 예외를 둔다고 정해버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런 '필요'보다는 보험료 '지불능력'과 정부의 관리 효율성을 우선했던 셈이다.

옛 이야기만도 아니다. 지금도 근로기준법은 일부 조항들을 제외하면 상시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1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취업규칙을 작성할 필요가 없고, 3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최대 주 52시간 노동 이외에도 '근로자 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한 경우' 추가 8시간의 노동을 더 할 수 있다. 중대재해처벌법도 마찬가지다. 상시 근로자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하지 않고, 50인 미만 사업장에는 3년 유예기간을 줬다.

작은 기업일수록 대비를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노동권은 보호받지 않아도 된다고 국가가 인정해 주는 것은 대단히 이상하지 않은가? 연차별로 다 함께, 모든 규모의 기업에 전면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도입함으로써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한다는 칠레의 결정은 그래서 부럽다.

200개 이상 단체가 대화 참여해 도출
 

국민의힘 김병민 최고위원(오른쪽에서 세 번째), 장예찬 청년최고위원(왼쪽에서 세 번째)과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대표단, 고용노동부,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3월 24일 오후 서올 종로구 한 치킨집에서 일하는 청년들의 내일을 위한 간담회 겸 치맥 회동을 가졌다. ⓒ 유성호

 
이러한 개혁안이 만들어지고 통과되는 과정도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노동 시간 단축법안이 처음 제출된 것은 2017년이었고, 하원을 통과한 것은 2019년이었다. 하지만 이후 상원의 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추진되지 않았다. 2021년 진보적 성향의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정부는 이 법안을 되살리기 위해 2022년 8월에 수정안을 제출했다.

그런데 이 수정안은 관료나 전문가들이 모여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칠레 전역의 다양한 견해를 대변하는 200개 이상의 사회단체들이 참여한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 도출한 것이었다. 뒤이어 의회에서 치열한 토론과 대화 끝에 올해 3월 21일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4월 11일에는 하원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주 40시간도 아니고 주 52시간 제약 때문에 마음껏 일할 수 없어 속상하다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MZ 노동자들'의 의견과 열 명 남짓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회'의 권고를 바탕으로 노동 시간 개혁안을 내놓은 한국 정부의 사례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보리치 대통령은 4월 15일 법률 서명 행사에서 "일하는 남성과 여성의 복지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날 대통령의 발표 그리고 상·하원의 법안 통과 현장을 전하는 뉴스 사진에는 어김없이 여성 정치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정부 대변인 카밀라 바예호, 노동사회부 장관 히아네트 하라, 여성·성평등부 장관 안토니아 오레야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찍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학생운동과 여성 인권 활동에서 성장해온 여성 정치인들이다. 특히 카밀라 바예호는 국회의원이던 2017년 이 법령을 처음 제출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설령 이러한 사진들이 연출이라 해도, 이 연출이야말로 노동 시간 단축 법안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한국 정부가 노동계와 시민 사회의 비판에 대응하여 근로시간 개편안을 저출산 문제와 연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자료까지 내놓은 것과 역시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노동절에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 약자'를 언급하며 "소수만이 기득권을 누린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노동 규제 정책들이야말로 노동 약자들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 미뤄놓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김명희 /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소셜 코리아 운영위원) ⓒ 김명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명희는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셜 코리아> 운영위원이기도 합니다. 관심 영역은 건강불평등, 노동자건강권, 보건의료의 공공성입니다. 한국건강형평성학회의 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사회역학> <노동자건강의 정치경제학> <예방의학의 전략> <과로자살> 등의 번역서와 <보건의료 사유화: 불편한 진실> <한국의 건강불평등> <몸은 사회를 기록한다>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등의 책을 펴낸 바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