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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편집자말]
어느 금요일 저녁,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어디긴, 집이지."
"엥? 금요일 밤에 네가 웬일로 친구 안 만나고 집에 있어?"
"언니, 나 금요일 밤에 집에 있는 거 엄청 오래 됐어."


이 통화를 한 게 벌써 10년쯤 전이니, 이미 내가 30대 중반이던 때였다. 금요일 저녁이면 퇴근 땡 소리와 함께 눈썹이 휘날리도록 집으로 향한 게 벌써 몇 년째였건만, 언니는 이 상황을 사뭇 의아해했다. 친구 만나느라 집밖을 나다니던 20대의 나만을 기억하던 언니는 금요일 저녁에 집에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던 거다.

'내가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나?' 전화를 끊고 내 어린 날을 파노라마처럼 쭉 돌아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 주야장천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그만큼 친구를 만나는 게 즐거웠고, 당시에는 친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다. 그랬다, 나는 친구라면 죽고 못 사는 아이였다. 웬만하면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이 생소하기까지 하다.

친구 관계도 변한다
 
미혼인 나와 정이는 바다로, 산으로 둘이 함께 여행을 다녔다.
 미혼인 나와 정이는 바다로, 산으로 둘이 함께 여행을 다녔다.
ⓒ 변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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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40대가 되니 부모님이 자식을 생각하듯, 나도 부모님을 걱정하는 '자식마음'이 생겼다는 나의 기사(관련기사 : 40대 비혼인데 '자식 마음'이란 게 생겼다)에 한 독자가 친히 댓글을 남겨주셨다. '마흔 넘어서 만날 친구가 없으니, 이제 남은 게 가족이라 부모한테 잘하는 거'라는 요지였다. 마음에 화가 가득한 이 독자는 세상을 참 삐뚤게 보시는구나 싶었지만, 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마흔 넘으니 만날 친구가 없다'라는 말, 맞다. 마흔 넘으니 만날 친구가 없어진다. 어영부영 알고 지내던 또래를 당연히 친구로 삼았던 20대와는 달리, 지금은 새로운 친구를 만들 확률이 매우 희박해졌다. 이미 있는 친구마저 자연스럽게 정리되어 친구로 부를 만한 유효수도 확연히 줄었다. 심지어 친구를 만나고자 하는 내 안의 의욕과 열정도 언젠가부터 사그라져버렸다.

이러하니 이제는 친구를 만나는 일 자체가 드물어졌다. 종종 안부를 나누고, 가끔씩 만나서 수다삼매경에 빠지지만 예전처럼 친구라면 죽고 못 살던 어린 나는 이제 없다.

지난해 여름 누구보다 투철한 방역 정신으로 나홀로 사회적 거리두기 5단계를 2년간 충실히 지키던 나는 사적인 만남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었다. 인간과의 격리는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신체를 주었지만,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마음의 병이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기 직전인 내 마음에 심폐소생술이 필요했다. 난 친구들을 만나야 했다.

나의 절친, 30년지기 정이(가명)와 선이(가명)와의 만남이 극적으로 성사됐다. 우리는 우정의 징표로 주황색 방울머리끈을 머리에 질끈 묶고 다니던 고등학교 때부터 삼총사로 유명했다. 셋은 언제나 함께였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림자처럼 늘 서로를 따라다녔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우리의 우정은 한평생 변함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드래곤이 진즉에 노래한 바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불변의 진리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1도씩, 1도씩 서서히 달라지던 인생의 방향은 중년이 되면서 이제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우정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미혼인 정이와 나와는 달리, 결혼을 한 선이는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사회의 직장인으로 바쁘게 살아갔다. 연락은 뜸해지고, 얼굴을 마주대고 만나는 건 점점 어려워졌다.

수능을 망쳤다며 우는 선이를 위로해주던 10대의 나와 원하던 직장의 문턱에서 낙방한 나를 토닥여주던 20대의 선이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는 모습도, 짊어진 삶의 짐도, 인생의 관심사도 달라진 40대의 우리는 서로의 삶을 고스란히 공유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가끔씩 톡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미혼인 정이와는 그나마 연락을 하고 만나는 게 수월했다. 마음이 통하면 갑작스럽게 둘이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20대의 우리처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살았던 우리는 서울과 세종이라는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멀어져 있었다.

지난여름의 만남도 정이는 코로나 후 처음이었으니 거의 2년 만이었고, 선이와는 무려 5년 만의 만남이었다. 하지만 3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 덕분이었는지, 5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는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추억 이야기에, 신세 한탄에, 시답지 않은 농담에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혼자 살고 있는 정이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계획이었던 나와는 달리, 선이는 남편과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우정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삼총사였던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늘 함께였다.
 삼총사였던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늘 함께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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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바다를 보기 위해 서해바다로 가을여행을 떠났지만, 그때도 선이는 함께하지 못했다. 젊은 날에는 언제나 셋이 바라보던 바다를 어느 순간부터 우리 둘만이 바라보고 있었다. 삼총사는 그렇게 혼자가, 가끔은 둘이, 드물게 셋이 되었다.

친구에 안달복달하던 열정 넘치던 20대를 지나, 우리는 40대라는 나이가 그려놓은 궤적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는 버겁고, 해결해야 할 일도 신경써야 할 일도 많다.

심지어 체력도 예전 같지 않아 한 번의 만남에도 녹초가 되기 일쑤이다. 20대에는 친구를 만나고 남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했다면, 이제는 해야 할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에 친구들을 만난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달라진 거다.

하지만 만남의 횟수가 적어진다고, 여행에 동행하지 못한다고 해서 친구 사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서운해 하거나 섭섭해 할 일도 아니다.

어릴 때처럼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지는 못해도,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저 이해해준다. 서로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 것, 친구 사이에 포기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걸 받아들이는 게 중년의 우정인 것 같다.

살다가 마음이 버석버석 말라버렸을 때, 마음 여기저기에 마찰이 생겨 생채기가 나려할 때 난 친구들을 만난다. 나의 삐걱거리는 마음에 친구들은 윤활유를 뿌려주어 인생의 마찰이 조금 사그라지는 기분이 든다. 삶에 지쳐 쉼표가 필요한 순간 서로의 인생에 기름칠을 해주는 것, 그게 40대 어른들의 친구이다.

우리 삼총사는 4월이 가기 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꽃이 예쁠 시기에 함께 모이는 건 참 오랜만이다. 과연 우리는 완전체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설령 둘만이 꽃을 바라본다 해도, 혹은 파투가 나서 나 혼자 꽃과 대면해야 한다 해도 받아들이련다. 이미 세월은 견고하게 우리는 맞추어 놓았고, 그 시간의 힘을 나는 믿는다. 우정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친구이다.

1인 가구 여성들이 혼자 살면서 알게 되는, 또 새롭게 깨닫고 경험하게 되는 이야기들에 대해 씁니다.
태그:#친구, #중년의 우정, #30년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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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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