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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편은 철저하게 육아를 분담하고 있다. 아이 픽업은 유치원 거리 때문에 남편이 보통 차로 데리러 간다. 아직 스웨덴 운전면허증이 없어서 픽업이 어려운 나는 어쩌면 다행이다 싶은 마음으로 빨래를 대신하고 있다. 

며칠 전, 남편이 회식 때문에 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려올 수 없었다. 집에서 도보 30분 정도 왕복 1시간 거리, 선택을 해야 했다. 아예 픽업하기 싫으면 유치원에 보내지 않는 거다. 몇 시간의 자유를 누리느냐 아니면 힘들게 픽업을 하고 마느냐?

그런데 일기예보에 눈 소식이 있었다. 3월에도 눈 내리는 북유럽의 날씨, 이제 놀랍지도 않네. 둘째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서 눈밭을 헤치며 오르막에 위치한 유치원으로 향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눈 맞으며 유모차 미느라 낑낑대는데 왜 이리 무식하게 보일까?  

그렇게 아들과 집에 있게 되었다. 유치원을 보내지 않은 미안함에서인지 열정을 다해 책을 읽어주고 한글 학습지도 했지만, 5세의 집중력은 10분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아직 100일도 안 된 둘째도 있어 같이 케어하기가 영 쉽지 않았다. 사실 점심 차려주고서 하루가 절반이 남은 시점에 이미 체력이 방전되었다. 

"엄마, 오늘 수영 안 가지?"

내 정신 좀 보게나, 오후 일정을 깜빡했다. 유치원도 안 갔으니 당연히 수영도 안 가는 줄 아는 아들내미. 생각해 보니 마지막 수업이었다.

"지난 학기도 메달을 받지 못했는데..."

수영 수업은 과정 수료에 상관없이 참여한 모든 아이들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파란색 줄에 매달린 금색 메달인데 꽤 근사하게 생겼다. 그런데 지난 학기는 아파서 수업에 참석하지 못해 그 메달을 놓쳤다. 순간 아이가 유치원 노벨상 행사 때 받은 메달을 자랑하던 게 떠올랐는데, 분명 수영장 메달도 받는다면 기뻐할 게 분명했다. 아, 이번에도 빠져야 하나 괜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유치원은 쉬어도 수영은... 가자
 
눈 앞에 있는 수영장도 멀게 느껴졌던 순간
 눈 앞에 있는 수영장도 멀게 느껴졌던 순간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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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때 남편이 "셋이서 뭐 해? 수영도 안 가는데 하루종일 집에 있겠네" 문자가 왔다. 수영 수업을 안 간다고 한 적이 없는데 왜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걸까? 유독 스웨덴 날씨를 핑계 삼아 오늘은 비가 내리니까 감기 걸릴 수도 있어, 바람이 많이 불어서 감기 걸려, 너무 어두워서 위험해, 참 못 나갈 이유도 많았던 거 같다.

그런데 오늘은 빼박이지 않나? 이렇게 눈이 내리는데? 그러니 남편도 당연히 내가 수영장 간다는 걸 기대하지 않은 듯했다. 얼마나 눈이 많이 내렸나 창문을 보는데 유모차와 개를 끌고서 산책하고 있는 여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씩씩하게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개 줄을 잡고서 걷고 있었다. 눈을 맞아가며 산책하는 그 모습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리암아 그냥 우리 수영장 갈까?"

마음에 없는 말도 아니고 있는 말도 아니었다. '갑툭튀'다. 그냥 생각할 겨를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이는 이미 안 간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싫다고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가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수영장 매점에서 초콜릿을 사주겠다고 꼬셨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왜 이렇게 갑작스레 수영장을 가야 했는지. 모든 이유가 가야만 하는 걸로 바뀌었다. 수영장은 유치원보다는 가깝다. 집에서 특별히 할 것도 없고 수영장 가면 메달도 받을 수 있다. 둘째는 슬링으로 안고 첫째는 여기서 수영복 다 입히고 가면 번거롭지 않을 거다.

수영장 갈 채비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하늘이 나를 시험해 보겠다는 건지 아까보다 더 거세게 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눈은 그칠 생각 없이 소복이 쌓여갔다. 덕분에 다시 선택의 시간이 돌아왔다. 이 눈을 뚫고 가는 게 맞는 걸까? 갓난아기와 5살짜리 데리고 감기 걸릴 수도 있는데...

아까와 다르게 집에 머물러 있기 싫어졌다. 이상하게 뭔가에 굴복당하는 느낌이랄까? 애들 옷 두둑이 입혀서 다녀오면 갈 수 있을 거야. 평소보다 긴장된 마음으로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섰다. 내 비장한 마음을 대변이라도 한 듯 눈이 휘몰아치는데 아이는 춥다, 앞이 안 보인다며 집에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엄마 너무 추워요. 나가기 싫어."

유모차에 있는 둘째는 괜찮을까 싶어 레인커버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머선 일이고? 이 날씨에 자신을 끌고 나온 나에게 놀란 건지 아니면 이런 날씨를 태어나서 처음 봐서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집에 갈까.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이 오갔다. 이거 진짜 나 강철부대 찍는 건가. 눈밭에 유모차 운전도 어찌나 힘들던지 앞바퀴에 박힌 눈을 털어내며 어째 저째 수영장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함께라 용감할 수 있었다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20분 넘게 걸려 다다랐다. 눈을 흠뻑 맞은 탓에 생쥐 꼴이 된 우리지만 도착했을 때 마라톤 결승점 들어온 것처럼 기뻤다. 유모차를 얼른 세워두고 슬링 아기띠를 메고서 수영 강습장으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하고서 한 15분이 지났을까? 한 엄마가 신생아용 바구니 카시트를 두 손으로 들고서 강습장을 들어왔다. 아빠가 먼저 큰 아이와 참석하고 엄마는 뒤늦게 들어온 듯했다.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몇 초간 쳐다보았다.

이내 서로의 모습만으로 친근감(?)이 느껴져서인지 개월수를 물어보며 육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6개월 아기를 데리고 온 그 스웨덴 엄마는 첫째 마지막 수업을 보기 위해 참석했다고 했다. 수업이 다 끝나고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메달을 수여했다.  
"리암아 너는 정말 용감해, 이제 물안경 없이 잠수도 할 수 있잖아."

물에 들어가는 것조차 겁냈던 아이가 지금은 신나게 점프까지 할 수 있었다. 예전 모습이 어색할 정도로 지금은 물과 친해진 아이의 모습이 흐뭇하기만 했다. 메달을 목에 걸고서 아빠에게 전화하고 싶다는 첫째. 영상통화를 하면서 연신 메달 자랑을 해댔다. 전화를 끊고서 둘째 유모차를 태우던 와중에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잘했어. 너는 강해."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 좀 어색하기도 했지만 아이가 받은 메달처럼 나를 으쓱하게 만들기도 했다.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수영장 도착했을 때만 해도 어찌 집에 가나 걱정이 앞섰지만 어느새 눈은 그쳐 있었다. 하지만 이전보다 더 많이 쌓여있는 눈.
 
자전거 트레일러를 세워두고 있는 한 엄마의 모습
 자전거 트레일러를 세워두고 있는 한 엄마의 모습
ⓒ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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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수영장으로 올 때 낑낑거리며 온갖 요령을 다 부려본 결과 아예 앞바퀴 들고서 곡예하듯이 뒷바퀴로 운전하는 게 훨씬 편했다. 아들은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연신 자기 발자국을 남기며 신나했다.    아이 사진을 찍어주다가 자전거 트레일러를 세워두고 있는 한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저 엄마도 나처럼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가는 길이려나. 유모차를 다시 밀면서 오늘 만났던 엄마들이 떠올랐다. 눈 맞으며 개와 산책하던 엄마, 카시트를 통째로 들고서 등장한 엄마, 트레일러로 아이를 태우고 가던 엄마까지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함께여서 용감할 수 있었다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runch.co.kr/에도 중복 게재 됩니다.


태그:#엄마는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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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설레며 살고 싶은 자유기고가. 현재는 스웨덴에서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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