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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그날의 피로를 소주 한 잔으로 함께 풀던 정든 직원들도 최근 회사를 떠나 마음까지 참 무거워졌다는 친구.
 저녁이면 그날의 피로를 소주 한 잔으로 함께 풀던 정든 직원들도 최근 회사를 떠나 마음까지 참 무거워졌다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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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만난 친구가 삶의 고충을 토로했다.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 친구는 매출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함께 일하던, 저녁이면 그날의 피로를 소주 한 잔으로 함께 풀던 정든 직원들도 최근 회사를 떠나 마음까지 참 무거워졌다는 얘기였다.

이 친구는 본래가 기가 막히게 유쾌한 친구였다. 대학교 때 만난 이 친구는 2학년 여름 기말시험을 준비하며 제망매가를 개작해 아래와 같은 패러디 시를 남겼다.
 
제망매가 원본
▲ 제망매가 원본 제망매가 원본
ⓒ 서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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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점가]

A+과 F의 길은 여기 있으매,
나는 잔다는 말도 못하고 잡니까.
어느 여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성적표처럼, 
한 스승께 배웠으되 받은 점수 다르구나!
아, 평양만두*에서 만날 나, 도닦아 기다리리라.
* 친구가 좋아하던 술집 이름이다. 충무로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친구는 특유의 위트함을 시험에서는 살리지 못했는지 C와 D가 가득찬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고, 그와 나는 성적이 나온 방학 날 그가 좋아하던 평양만두에서 소줏잔을 나눴다. 그래도 이때는 성적은 나쁠지라도 청춘이 있었다. 성격 만큼은 빛났기에 그에게서 어두운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친구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됐다. 위트 본능이 가득찬 그는 평범한 청첩장은 보내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도착한 청첩장엔, 한국의 위대한 시 윤동주의 서시를 패러디 한 아래와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윤동주 서시 원본
▲ 윤동주 서시 원본 윤동주 서시 원본
ⓒ 서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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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본전도 못 뽑을 우려에 우린 두려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안 온 사람들을 기억해야지.
그리곤 그들의 결혼식도 안 가야겠다.
오늘밤에도 우리의 비망록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는 그렇게나 삶의 여러 이벤트들 앞에서 항상 유쾌한 사람이었다. 이제는 한 사람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친구는 여전히 즐겁게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어제 만난 그는 그렇지 않았다.

얼굴에서 묻어나는 삶의 무게, 고됨이 느껴졌다. 특유의 위트는 여전했지만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느낌은 아니었다. 우리는 술자리를 나누고 서로 열심히 살아갈 것을 이야기하며 헤어졌다. 그날 저녁, 친구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패러디한 시다.
 
이형기 시인 낙화 원본
▲ 이형기 시인 낙화 원본 이형기 시인 낙화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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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매출은 떨어지고 있다.

분분한 퇴사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구직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새 직장을 향하여

나의 재직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룽하룽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회사, 나의 월급.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아내의 슬픈 눈


예전 그의 패러디 시에선 당장의 힘듦은 있을지라도 항상 위트와 즐거움, 행복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 시에선 우울감만이 느껴졌던 것은 단순한 나의 착각일까. 아니면 청춘이기만 했던 전과 달리 이제는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와 책임감 때문일까.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지. 힘든 일과 즐거운 일 사이에서 울고 웃으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일 것이다. 

다음 번엔 그의 위트가 살아넘치는, 그런 즐거움과 행복감이 넘치는 시를 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찰나의 즐거움이라도 더해줄 친구의 시를 소개하며 작은 응원을 건넨다.

태그:#인생살이, #패러디, #제망매가, #서시, #낙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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