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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인정은 대부분 지난한 과정을 수반한다. 소견서 작성을 거부하는 주치의, 불친절한 근로복지공단의 행정,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거짓을 일삼는 사업주, 재해자가 짊어지는 과도한 입증 부담 등 여러 고비를 넘어 업무 관련성을 인정받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남아있다. 바로 '진료계획서' 제출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47조(진료계획의 제출)
① 산재보험 의료기관은 제41조 또는 제91조의5에 따라 요양급여를 받고 있는 근로자의 요양기간을 연장할 필요가 있는 때에는 그 근로자의 부상·질병 경과, 치료예정기간 및 치료방법 등을 적은 진료계획을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공단에 제출하여야 한다.

② 공단은 제1항에 따라 제출된 진료계획이 적절한지를 심사하여 산재보험 의료기관에 대하여 치료기간의 변경을 명하는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필요한 조치(이하 "진료계획 변경 조치등"이라 한다)를 할 수 있다.

진료계획서는 요양 기간 연장을 위해 재해자가 의료기관에 요청해야 하는 서류 중 하나다. 재해자의 상병이 무엇인지, 부상이나 질병의 경과는 어떠한지, 요양 기간을 연장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 담긴다. 결코 어렵거나 복잡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재해자의 상병을 진료하는 주치의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다.
 
산재 신청을 하는 노동자에게는 거쳐야 할 과정이 많다. 이중 요양 기간 연장을 위해 필요한 진료계획서를 받는 일이 때로 장벽이 되기도 한다.
 산재 신청을 하는 노동자에게는 거쳐야 할 과정이 많다. 이중 요양 기간 연장을 위해 필요한 진료계획서를 받는 일이 때로 장벽이 되기도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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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요양 기간은 3개월 단위로 결정되기에, 장기간 요양이 필요한 재해자들은 반복적으로 진료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때마다 의료기관에 진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하는데, 많은 재해자들은 이 시기를 걱정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진료계획서를 써줄 수 없습니다'

약 8년 전 A씨는 유방암을 진단받았다. 첫 진단부터 재발, 수술과 항암 등 모든 치료를 인천의 한 대학병원에서 실시했다. A씨의 주치의는 산업재해 신청 전부터, 재해자의 상병은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단언하며 산재보험용 소견서 작성도 거부한 인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A씨의 유방암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됐으나, 주치의는 여전히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곤 진료계획서를 작성해달라는 A씨의 요청에 대해, 주치의는 여전히 "산업재해라고 생각지 않으니 써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산업재해 인정과 별개의 서류라는 점을 아무리 설명해도 듣지 않았고, 심지어 진료계획서가 받고 싶다면 다른 병원으로 전원하라며 치료 중단을 빌미로 으름장을 놨다.

B씨는 뇌경색을 진단받고 약 1년째 요양 중이다. 두 달 전 뇌경색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됐는데, 여전히 요양급여와 휴업급여는 받지 못하고 있다. 담당의가 진료계획서 작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담당의는 산재보험법에 따른 진료계획서 서식을 배운 적도 없고, 작성해 본 바가 없기에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였다. 대리인이 동행해 작성방법을 설명해도, 병원 내 산업재해 업무 담당자가 설득해도 가지각색의 변명을 하며 작성을 거부했다. B씨는 진료계획서 작성을 위해, 또 담당의를 만나야 하는데,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아시잖아요. 근로복지공단도 '을'입니다"

진료계획서 작성을 거부하는 행태를 경험한 재해자들은 근로복지공단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연락을 취한다. 그런데 해결책은커녕 막막함만 가중된다. 근로복지공단도 진료계획서 제출을 강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담당자와의 통화에서는 "아시잖아요. 병원이 갑이고, 근로복지공단은 을이에요. 병원이 안 써준다고 하면 어쩔 수 없어요"라고 답변해 황당함에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대부분의 경우 공단 담당자들은 "주치의를 잘 설득해 보세요" 또는 "진료계획서를 작성해 줄 수 있는 병원으로 전원을 고민하세요" 정도의 '조언'을 한다. 이는 재해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선 사례에서 결국 A씨는 요양 기간 연장을 포기했다. 첫 진단부터 지금까지 A씨의 건강 상태를 살폈던 주치의에게 치료를 이어가는 게 마음 편했기 때문이다. B씨의 경우 주치의를 계속하여 설득해 2개월 만에 진료계획서를 얻어냈다. 요양 기간이 소급해 인정됐기에 다음 달이면 재차 진료계획서를 요청해야 한다. 부디 이번엔 별 탈 없이 진료계획서가 제출되길 바라고 있다.

진짜, 근로복지공단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까?

과거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의료기관에서 '산업재해보상보험 요양급여신청 소견서'(아래 산재보험용 소견서) 작성을 거부해 산재신청을 방해한 사안이다.

당시 주치의들은 재해자의 상병이 산업재해가 아니라는 핀잔과 함께 최소한의 내용을 기재하는 서류 작성조차 거부했다. 이에 수많은 재해자들이 의료기관과 갈등하거나, 산재신청을 포기했다. 더욱이 근로복지공단 담당자들도 산재소견서 양식 제출이 원칙이라며 재해자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수많은 문제가 제기되자 2019년 8월 산재보험용 소견서 대신 일반 진단서나 소견서를 제출해도 된다는 내용으로 요양업무처리규정이 개정됐다.

진료계획서도 결코 다르지 않다. 산업재해보험법 시행령은 진료계획서 작성 시 기재해야 하는 사항을 명시하고 있는데,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40조(진료계획의 제출)
① 산재보험 의료기관은 법 제47조제1항에 따른 진료계획(이하 "진료계획"이라 한다)에 다음 각 호의 사항을 적어야 한다.
1. 해당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에 따른 부상 또는 질병의 명칭
2. 해당 근로자의 부상ㆍ질병의 경과, 진료내용 및 현재의 상태
3. 요양기간을 연장할 의학적 필요성
4. 향후 입원ㆍ통원 또는 취업치료 등 치료방법, 치료내용 및 치료예정기간
5. 그 밖에 해당 근로자의 진료에 필요한 사항

정해진 진료계획서가 아니라도, 위의 내용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요양 기간 연장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 심지어 요양업무처리규정은 진료계획서 내용의 보완이 필요하지만 의료기관이 응하지 않은 경우 진찰 요구나, 자문의사회의의 심의 또는 자문의사의 의학적 소견을 참고해 심사할 수 있다고 명시하며 진료계획서가 없더라도 심사가 가능함을 밝히고 있다.

즉 진료계획서 서식이 있어야만 요양 기간을 결정이 가능한 것은 아니며, 없어도 근로복지공단은 충분히 업무처리가 가능하다.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물론 진료계획서 작성을 회피하는 일부 의사들의 태도, 진료계획서 작성을 거부해도 강제할 방법이 없는 현행 제도 등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그러나 재해자들이 새로운 벽을 마주하지 않게, 종이 한 장을 위해 구걸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게 우선이다. 고작 서류 한 장에 갇혀 아픈 사람 더 아프게 하는 행정은 멈추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성민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공인노무사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산재_진료계획서, #산재_요양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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