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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벌로 내게 글짓기를 시켰다." (책 <독일어 시간>, 지그프리트 렌츠 지음)

글짓기는 고역이다. 오죽하면 하고 많은 벌 중에 글짓는 벌이 존재할까. 내게도 글짓기가 고역이었던 경험이 있다. 아주 오래 전, 방과후 기타를 배우던 초등생 아들을 차에 태워 귀가하다 교차로에서 유턴하는데 갑자기 '우지직' 차 문짝이 우그러드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오른편 차창 너머로 허리께를 가격당한 검은색 중형차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게 보였다.

차에서 젊은 운전자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아줌마! 운전을 그렇게 이상하게 하면 어떡해요!" 그 자가 소리를 질렀다. "뭐? 넌 신호도 안보고 운전하냐? 신호를 봐야지 신호를!" 나도 맞받아쳤다. 연락을 받고 보험사 차량이 도착했다. 검은 차 운전자는 잘못한 게 없다고 바득바득 우겼다. 할 수 없이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관이 종이와 볼펜을 내어주며 사고경위를 적으라고 지시했다.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누르며 방금 일어난 일을 육하원칙에 따라 동영상 분석하듯 적었다. 살면서 글쓰는 게 그렇게 고역이던 적은 없었다. 앞면을 꽉 채우고 뒷면에 도로 상황까지 그림으로 그린 뒤 이렇게 덧붙였다. '아버지 차를 끌고나온 듯한 저 젊은이가 신호를 안지키고 멋대로 운전했으므로 경찰관님께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하여 정의를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경찰관이 나를 불렀다. "아주머니, 이런 경우에는 증인이 없으면 도리가 없어요"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더니 내 옆에 있는 아들을 자기 책상 근처로 데리고가 의자에 앉혔다. "얘야, 지금부터 네가 본대로 사실을 말해야 한다. 알았니? 엄마가 유턴할 때 신호등 색깔이 초록색이었니? 빨간색이었니?" 허이구, 차 뒷좌석에서 강아지처럼 뒹굴거리던 열 살 짜리 아들녀석이 퍽이나 조신하게 신호등을 관찰했겠다.

아들은 긴장된 목소리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경찰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유일한 증인인 아드님께서 모른다고 하네요. 이 건은 쌍방과실로 처리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두 분 얼른 합의하시고요~ 이상 솔로몬의 판결이었습니다!" 그는 책상 위에 서류를 탁탁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서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벌겋게 상기된 아들 얼굴이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엄마 때문에 오늘 나 완전 질렸음.'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검은 차의 왼쪽 문이 찌그러지고 내 차의 앞 범퍼와 번호판이 차에서 떨어져나가 땅바닥에 나뒹굴던 사고처리는 보험으로 해결했다. 아마 지금이라면 혀를 끌끌 차며 '오늘 운수가 아주 사나운 모양이네' 하고는 무심하게 보험회사에 처리를 맡기고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초등생이던 아들이 검은 차 운전자와 비슷한 나이가 된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다. 어린 아들 눈에 비친 엄마 모습이 별로였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그프리트 렌츠의 소설 <독일어시간>은 독일 감화원에 수감된 소년수 '지기 예프젠'이 벌로 글을 쓰며 비뚤어진 어른의 모습을 기억해내는 이야기다. 글쓰기를 통해 편협한 의식을 지닌 어른, 구체적으로는 아버지의 일그러진 정신세계를 통렬히 비판하는 소설이기도 한데, 아들이라는 거울에 비친 부모의 추한 모습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아 소설을 읽는 내내 허를 찔린 듯 내 모습을 되돌아봐야 했다.

독일의 감화원은 청소년범이 소년원으로 이감되기 전 구금생활에 대한 적응교육과 순화교육을 받는 곳이다. 소년수 지기 예프젠은 그림절도범으로 체포되어 감화원에 와있다. 독일어시간에 글짓기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않아 독방에 감금되어 <의무의 기쁨>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중이다.

지기는 의무에 강박적인 아버지에 대해 쓴다. 누가 그랬던가. 세상의 모든 글은 기억의 재생산이라고. 기억 속에 숨어있는 어린 시절 루크뷜의 땅과 물, 그리고 어른들의 대화가 하나하나 건져올려진다.

지기 아버지는 북독일 시골마을의 파출소장이다. 베를린의 나치정권이 지방 경찰관인 아버지에게 같은 지역 출신인 풍경화가 막스 루드비히 난젠의 그림을 압류하고 그를 감시하라 통보했을 때 아버지는 아무 의심없이 그 지시를 따른다. 역사적으로 나치는 독일 예술을 타락시키는 것을 '퇴폐'라 규정하고 1937년 뮌휀에서 '퇴폐미술전'을 열어 독일 전역에서 압수한 예술품을 전시해 조롱한 바 있다.

화가 난젠은 아버지의 죽마고우다. 아버지는 친구를 돕는 대신 베를린의 지시를 충직하게 수행함으로써 친구와 대립하는 길을 택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치 정권이 무너졌음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의무를 잊지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념이기 때문이었고 모로 보나 자기보다 출중한 능력을 지녔으며 인성도 좋아 사람들의 신망을 받는 친구에 대한 일그러진 질투심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또한 이런 사람이었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 자해소동을 벌이던 큰아들을 혼내고 그 아들이 군에서 탈영해 집에 오자 즉시 신고한 사람. 군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아들의 서류가 폭격으로 사라져 석방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이를 무시해버린 사람. 전쟁이 끝나 석방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함부르크로 도망가버리자 아들의 사진을 식탁위에 올려놓고 분노의 가족재판을 벌인 사람. 그리고 아들을 이 집에서 영원히 추방한다고 선고한 후 사진을 갈기갈기 찢어 아궁이에 던져버린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모든 일을 규율의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인간이었다. 규율이야말로 모든 조건에 상응한다고 믿는 인간.

지기가 기억하는 또 하나의 아버지 모습은 이렇다. 종전 후 아버지는 3개월 간의 구류를 살고 풀려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그로 되돌아갔다. 그가 가장 먼저 신경쓴 것은 바람 빠진 순찰용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를 집어넣는 일이었고, 복직이 이루어진 날에는 사람들에게 구류 중에 있던 일을 지치지 않고 말하며 그들의 시선을 태연히 감내해냈다. 지기는 그런 아버지를 두고 임무만 주어졌다 하면 평생토록 거기에 집착하는 위인이라 기록했다.

지기는 아버지가 화가의 그림들을 압수해 파손하고 불태우며 만족해하는 모습에 충격과 공포를 느껴 화가의 아틀리에로 숨어들어가 그림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발각되어 그림절도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지기의 절도행위는 착란과 망상이라는 정신병에서 기인한 것으로 변호되었는데, 그런 지기의 상태를 병으로 인정해준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친구인 화가 난젠이었다.

지기는 감화원 원장과 인터뷰하던 중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자기를 그림절도범으로 체포했지만 정작 이곳에서 교화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닌 루크뷜의 파출소장인 아버지라고.

감화원 원장은 대답한다. 이곳에서는 빵과 노동의 관계를 배우고 순종과 의무의 기쁨을 터득하는 것이 먼저라고. 공동체규율을 준수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조건이라고. 감화원 원장의 목표는 오직 하나다. 감화원 내의 소년수들이 규율을 지키며 순종과 의무의 기쁨을 맛보는 것.

감화원 원장은 소년수 지기 예프젠이 감화원에서 글짓기 규율을 충실하게 준수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이를 참작해 지기를 사면한다고 전한다. 원장은 지기의 글을 읽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읽지않을 공산이 크다. 하긴, 지기가 쓴 작문 한 편으로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거다. 지기는 감화원에서 성년을 맞은 다음날 세상으로 나온다.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어서

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빛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북해 연안의 해변길, 수평선 위에 드리워진 안개 자락, 드넓은 지평선 위로 두 다리가 잘린 남편을 손수레에 앉히고 앞만 보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힐데 이젠뷔텔의 모습.... 지기가 서술하는 고향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맹종과 맹신,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인간의 못생긴 내면과 묘하게 대조되는 느낌이다.

루크뷜의 정신박약아 시설에서 두 아이가 사라진 일이 있었다. 조류감독관과 제방감독관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백방으로 찾아다니다 해변의 어망속에서 아이들을 찾아냈다. 응당 있어야 할 공권력인 파출소장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파출소장 부인인 어머니는 그런 아이들에게 관심쏟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 애들은 사회에 문제만 일으키는 쓰잘데 없는 '것'들이니까. 지기는 그런 부모님에게서 못난 인간의 모습을 본다.  

규율과 법을 앞세워 행해지는 저 수많은 비열한 일들은 왜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반복되는 걸까.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어서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범한 소시민에서 많이 배웠다는 엘리트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에 의해 지금도 다반사로 일어나는 비인간적인 일들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독일어 시간 1

지크프리트 렌츠 (지은이), 정서웅 (옮긴이), 민음사(2000)


태그:#독일어시간, #지그프리트 렌츠, #북해, #의무의 기쁨, #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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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애호가, 아마추어화가입니다.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씁니다. 책을 읽고 단상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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