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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의 시작. 처음 몇 걸음은 습관적으로 무심하게 걷습니다. 어느 정도 걸으면 몸이 풀려 걷는 품새가 자연스러워지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깁니다. 마른 나뭇가지에 돋아난 꽃봉오리들, 마주 오는 사람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차량들.

어딘가에서 반가운 새소리가 들립니다. 걸음을 멈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봅니다. 참새나 까치는 아닌 것 같은데, 책에서 본 박새일까요. 귓가를 간지럽히는 맑고 고운 새소리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 산책하다 만난 총총 걸어가는 박새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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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에 기분이 좋아지는 데에는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새소리에 포함된 '1/F(진동수) 흔들림'이라는 음이 바로 그 비밀입니다. 강물이나 파도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이 음은, 행복 호르몬인 세르토닌을 생성하고 스트레스 저항력도 높인다고 합니다. 소리와 감정의 연관관계가 참으로 오묘합니다.

세상 모든 소리가 새소리처럼 듣기 좋은 소리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반대로 우리 주변엔 듣기 힘든 소음들이 산재합니다. 상사의 피드백을 가장한 비난, 층간소음, 운전자의 감정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날카로운 경적소리 등 평정을 흩뜨리는 소리들이 말입니다. 저에게 산책은 그런 소화할 수 없는 소리들을 걸러내는 과정 중 하나였습니다. 체에 거른 듯 고운 소리만을 담아, 잔뜻 굳어버린 마음을 풀어내는 것이었지요.

'오늘도 감사하며, 산책' 연재 기사의 처음 기획 의도는 산책을 하면서 마주하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소하지만 그렇기에 종종 놓치게 되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말입니다.
 
다니구치 지로 책 <산책>
 다니구치 지로 책 <산책>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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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은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이란 그래픽 노블을 읽으면서 확고해졌습니다. 책의 내용은 단순합니다. 한 중년 남자가 동네를 산책하며 마주치는 순간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책이에요. 동네 뒷산에 올라 바라본 풍경, 기찻길, 골목을 뛰어노는 아이들...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은 제가 산책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을 돌아보게 했어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글로써 이런 산책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고.

라디오를 듣는데 한 디제이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라디오는 알고리즘을 깨는 매체라고요.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비슷한 취향의 음악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이 라디오의 장점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산책이 라디오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책은 패턴이 정해진 삶의 알고리즘을 일부 깨는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출퇴근길의 반복되는 풍경이 아닌,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발견하는 우연의 순간들을 즐기는 과정인 것이지요.  때로는 나무의 수관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고, 무의식의 생각들이 불쑥 수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을 맞닥뜨리게도 하는.
 
공원 산책을 하다 바라본 하늘
 공원 산책을 하다 바라본 하늘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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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산책은 저의 신체와 조금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아마 많은 운동이 그렇겠지만, 걷다 보면 나의 몸 상태를 더 잘 인지하게 됩니다. 걷고 있는 두 다리의 길이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 오른쪽 발에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는 것, 걷고난 후 혈액 순환이 잘 되어 따뜻해진 손과 발 등 원래부터 내 것이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잘 알지 못했던 내 몸을 말입니다.

걷기의 신체적 효과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근육 강화, 치매 예방, 항암, 혈액순환 개선, 녹내장 위험 감소 등 짧은 글에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쯤 되면 만병통치약이 아닌가도 싶지만(^^), 올바른 방식으로 잘 걷는다면 건강유지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뼈와 살, 내장기관과 세포, 혈관과 혈액 등 몸의 여러 구성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반응하고 움직이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의 몸이란 얼마나 신비한 것인가 싶으면서도 반면 하나의 인간이란 사실은 얼마나 작고 연약한 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넓고 거대한 자연 속에 덩그러니 놓인 하나의 존재에 대해서 말입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에서 만난 작품 '걸어가는 사람'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에서 만난 작품 '걸어가는 사람'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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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작품 '걸어가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고독과 실존을 형상화했다는 이 조각을 보면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자코메티는 비정상적으로 길고 거칠고 앙상한 신체를 통해 인간의 고독한 실존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독한 인간은 멈춰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을 디뎌 걸음을 옮기고 있지요.

작품에서는 살아있기에 계속 걸어야 하는 존재의 고단함이 느껴지지만 그 속에는 계속 걷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실존과 고독도 생에 대한 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면 고독을 그토록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한, 어떤 상황과 감정에 놓여있든 간에, 인간은 계속 걸어가야 하는 존재겠지요? 걷는 일은 때로 무거운 의무처럼 다가오는 날도 있겠지만, 그러다가도 예전엔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니, 풀어진 운동화 끈을 질끈 묶고, 내일도 힘을 내어 걸어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감사하며, 산책' 연재를 마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한 책들 : <당신은 아직 걷지 않았다>(걸리버), <걷기의 재발견>(글담출판사), <동네에서 만난 새>(도서출판 가지), <이토록 재미있는 새 이야기>(북스힐), 두산백과 '걸어가는 사람'.


태그:#산책, #걷기, #새, #건강, #걸어가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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