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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넘실대는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 왔다. 도대체 봄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가슴을 뛰게 하는가. 두 해째 거주하는 말랭이 문화마을에서 할 새 일을 구상하기 위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염불을 멀리하고 잿밥에만 관심있는 보살의 마음이 먼저였다. 오랜만의 외출에 신나서 남풍따라 흘러다니는 제주의 꽃향에 코를 킁킁거렸다.

올해도 말랭이 마을 어른들과 함께 새로운 활동을 기획했다. 작년에 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쓴 에세이집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을 출판하면서 어른들과 약속하나를 했었다.

"제가 마을에 글방 열어서 어머님들이 글도 배우고 아름다운 시도 함께 읽어요. 저절로 어머님들이 시를 쓰고 그림을 직접 그리게 될 거예요. 가을엔 시화전을 열어서 우리 말랭이마을을 이쁘게 꾸며보시게요."
 

마을 사람들 상당수가 내 어머니와 같은 연배여서 일일이 말로 다 듣지 않고 한두 마디만 들어도 그들이 살아온 척박하고 힘들었던 삶의 궤적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 올해 나의 계획을 들은 어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엄청난 기대와 환대를 보여주었다.

1월 군산시 문화도시센터(센터장, 박성신교수)와 함께 '말랭이 마을글방'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소위 '문해교육' 지도자로서의 변신은 또다시 맞는 봄, 생명의 약동처럼 에너지원이 되었다. 겨우내 차갑던 땅 밑 물자리를 딛고 일어나는 나무뿌리의 숨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몸이 근질거리질 않겠는가. 말랭이 글방오픈을 앞두고 타 지역의 문해교육사례를 찾았다. 바로 제주 '할망해방일지'로 매스컴을 탄 선흘리 할머니들의 그림 전시회장이었다.
 
가장 늦게 그림에 참여한 고 할머니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려  가장 돋보이는 재능을 보여준다고 했다
▲ 37년생 고순자할머니의 헛간, 올레미술관 가장 늦게 그림에 참여한 고 할머니는 매일매일 그림을 그려 가장 돋보이는 재능을 보여준다고 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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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던 강할머니가 화가가 되고 소가 살던 외양간이 미술관이 되니 진정 살아있는 문화예술현장이다
▲ 39년생 강희선 할머니의 외양간, 소막미술관 소치던 강할머니가 화가가 되고 소가 살던 외양간이 미술관이 되니 진정 살아있는 문화예술현장이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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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16일, 2박 3일 제주도 문화탐방에 나선 말랭이 어른들은 남실바람 맞는 봄 처녀들 같았다. 지난 코로나 3년 동안 각종 단체에서도 관광여행 한 번 간 적이 없다고, 이제야 진짜로 코로나에서 해방되는 첫봄을 시작한다고 즐거워했다. 특히나 올해 마을에서 진행하려는 글방수업 전에 다른 지역 노인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큰 공부라고 입을 모았다.

제주 '할망 해방 일지'는 제주시 선흘리 할머니들의 그림 전시공간을 말한다. 선흘볍씨마을협동조합과 사단법인 소셜뮤지엄이 마련한 이 전시회는 2022년 11월, 약 한 달 동안 그림 그리는 선흘 할망들의 자택 속 공간인 마당, 창고, 소막 등을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특별한 사례였다. 일명 '할머니의 예술창고' 사업차 마을로 이주한 미술작가 최소연씨 지도로 선흘리 할머니 아홉 명이 당신들의 삶을 표현한 그림 160여 점을 전시했다.

말랭이마을 어른들보다 평균 10여살 이상 많은 80대, 90대 그림 그리는 제주 할머니들과의 만남은 어땠을까. 그림을 배우는 것이 '해방'이라고 입을 모으는 분들을 통해 우리 마을 어른들도 당신들 인생에서 진정한 해방과 자유에의 도전과 기대를 느낄 수 있을까 자못 궁금했다.

제주할머니들은 모두가 제주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토속인으로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굴레와 여성으로서, 생계부양자로서의 삶을 사느라 글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고 했다. 말랭이 어른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 방편지로 항구도시 군산을 선택해서 이주한 타향인들이다. 이들도 역시 무학자부터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사람들이다. 작년 인터뷰 에세이의 주인공으로 만났을 때 다시 젊어진다면 하고 싶은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글을 배우고 싶다'라고 말했었다.
 
당신이 지닌 속옷까지도 예술작품. 그림설명을 하시다가 어머니를 그리는 눈물에 모두가 눈물 또 한방울.
▲ 40년생 오가자할머니 창고미술관 당신이 지닌 속옷까지도 예술작품. 그림설명을 하시다가 어머니를 그리는 눈물에 모두가 눈물 또 한방울.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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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자할머니거실에 전시된 그림을 서로 마음을 나누다(가장 오른쪽, 지도해준 최소연작가)
 고순자할머니거실에 전시된 그림을 서로 마음을 나누다(가장 오른쪽, 지도해준 최소연작가)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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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해방일지' 전시장으로 첫 번째 찾은 집은 소막미술관. 최소연 작가가 처음 만난 홍태옥 할머니와 두 번째 만난 강희선 할머니가 있는 이곳에서 최 작가는 맛깔나는 제주방언과 매력적인 할머니들과의 대화법으로 그림을 설명했다. 제주에서는 지인들을 모두 '삼촌'이라고 불러서 처음에 우리 마을 분들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최 작가를 보면서 리더 한 사람이 이끌어낸 이 곳은 도대체 어떤 세상인가 싶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제주할머니들을 그림작가로의 변신으로 이끌어준 그녀를 보면서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했다. 할머니 그림작가들을 대하는 그녀의 말과 몸짓, 손짓과 미소 하나하나가 '사랑' 그 자체였다.

소막전시관, 말 그대로 소를 길렀던 외양간에 전시된 강 할머니의 그림들을 보는 말랭이 마을 어른들의 웅성거림은 단순한 부러움과 칭찬이 아니었다. 다른 지역일지라도 동시대를 살아온 언니이자 친구들이 그림을 통해 인생의 강물 위를 함께 흘러가는 신묘한 소통의 장이었다. '생전처음으로 펜을 잡고 선생님이 지도하는 대로만 따라 그려서 별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제주 할머니들의 말씀에 '그럴 리가 없다, 하늘에서 내려준 재능이 있는거다, 정말 대단하다'라고 화답하며 서로를 껴앉아 주고 칭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할머니들의 집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기시했던 제주의 관습을 깨고 당신들이 살고 있는 삶터가 미술관이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도전이 있었다고 했다. 9명의 제주 할머니 그림작가 중 소막전시관(강희선할머니, 홍태옥할머니), 창고미술관(오가자할머니집), 마당미술관(조수용할머니집), 올래미술관(고순자할머니)을 만나고 돌아오는 어른들의 표정이 하도 밝아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문화가 뭔지 알았겄어. 근디 오늘 여기 와봉게 문화라는 것이 이런거구나 싶네. 고생만 해서 생각도 하기 싫은 별거 아닌 얘기도 글이 되고 그림이 되는 것이 문화고만. 우리동네도 얘깃거리가 많어. 나이가 다릉게 제주 할머니들만큼은 아니어도 할 얘기도 많고, 그리고 싶은 그림도 많고만. 작가 선생님이 잘 이끌어주면 우리도 할 수 있고만."

올해 말랭이 마을에서 3월 6일부터 시도할 '문해글방 프로젝트(매주 월요일 2시간 진행)'는 10명의 어른들이 참여한 가운데 문해를 위한 기초학습으로 글과 그림을 배우고 최종적으로 개인 시화전을 올리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주 1회의 만남이 양적으로는 매우 부족한 시간이지만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른들에게 글자 하나 가르치면 그들의 마음에서 쏟아져 나올 수많은 얘깃거리가 벌써부터 나를 흥분시킨다.

작년에는 당신들의 마음소리를 내가 글로 담았다면 올해는 당신들의 저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아픔과 기쁨의 소리까지도 당신들의 글로 그림으로 말랭이 마을 곳곳에 꽃이 피어날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을 꿈꿀수 있게 허락한 마을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태그:#제주할망해방일지, #말랭이마을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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