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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쉴 권리’는 유엔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 및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에 관한 협약’의 권고사항이며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OECD국가가 보장하는 최소한의 보편적 권리입니다. 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은 아프면 쉬기보단, 생계와 고용 걱정부터 해야 합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상병수당 시범사업은 시작부터 실효성을 의심받고 있을뿐 아니라, 정부가 제시하는 노동 및 보건의료정책들은 노동자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프면 쉴 권리' 연속기고를 통해 네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다룹니다.[기자말]
ⓒ 성서이주노동자무료진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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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2025년 상병급여 도입'을 목표로 지난해 7월부터 시범사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1단계 시범사업은 전국에서 6개 지역을 선정해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세 가지 모형을 적용해 진행 중이다. 보장범위와 급여기준은 다르지만 지원 대상은 시범사업 지역에 거주하는 취업자 중 건강보험 직장가입자, 고용보험 가입자 또는 사업자등록이 있는 자영업자이다.

그런데 또 다른 조건이 있다. 바로 국적이다. 상병급여 시범사업 지원 대상자를 대한민국 국적자로 제한한 것이다. 다만 예외적으로 외국인 중 대한민국 국적자와 동일 가구 구성원 또는 난민 인정자는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 하지만 올 7월부터 4개 지역을 추가해 소득하위 50%만 지원하기로 한 2단계 시범사업의 지원 대상에는 아예 외국인이 빠졌다. 물론 아직 시범사업 기간이기는 하지만 지원 대상에 국적 조항이 있다는 사실은 향후 본격적으로 상병급여 제도가 실시될 때 외국 국적 이주민 다수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취업자가 아프면 쉬게 하고 그 기간 중 소득을 보전받게 하도록 마련된 상병급여 제도는 이미 160개 이상의 국가에서 사회보험 또는 조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취업자가 해당 사회보험에 가입해 있거나 납세의 의무를 지고 있는 한 국적과 무관하게 지원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으로 상병급여를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건강보험가입 여부가 아닌 국적 보유 여부를 따지고 있으니 꼬박꼬박 건강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는 이주민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노릇이다.

사실 정부가 뒤늦게나마 상병급여를 도입하기로 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 시범사업 실시를 발표하면서 상병수당 제도 안착이 주기적인 감염병 상황에서 직장을 통한 감염병 확산을 차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 것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주민을 제외하는 것이 불합리하다. 감염병이 국적을 따져 가며 전파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상병급여 전면 도입 시 국적 제한이 없어지더라도 현재와 같은 조건이 유지된다면 다수의 이주민 취업자가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우선 현재는 건강보험 가입자 중 직장가입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내국인 건강보험 가입자의 70% 이상이 직장가입자인 것과는 달리 이주민 가입자는 50% 남짓만이 직장가입자이다.

일용직이나 임시직 노동자, 가사·간병 노동자, 직장가입이 되지 않는 농업이나 어업 사업장 종사자의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건강보험 지역가입자인 노동자가 지원 대상이 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절반 가량의 이주민은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일용직이나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을 포함하기 위해 건강보험 직장가입자가 아니더라도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면 상병급여 지원 대상이 된다고는 하고 있다. 하지만 취업 체류자격을 소지한 이주민 대부분이 고용보험 당연적용 대상이 아니거나 고용보험은 당연적용되더라도 실업급여나 육아휴직급여 적용에서는 빠져있다. 고용보험 가입자 포함이 이주민 취업자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조건들 또한 조정되어 이주민이 상병급여 대상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아플 때 휴가를 받아 쉬는 것은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영세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주노동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감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명목 때문에라도 아플 때 쉬는 것이 용인되었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달랐다. 호흡기 증상이 있어 진단검사를 받고 싶다고 해도 이주노동자에게는 병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업장도 있었고, 심지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이주노동자들만 따로 모아 야간근무를 시켰다는 사업장도 있었다. 그러니 아파서 쉬고, 아파서 병원에 가야 나오는 상병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이주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2020년 외국 국적 이주민 1000여 명을 대상으로 건강상태 및 의료기관 이용실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비슷한 시기 실시된 내국인 대상 조사와 차이가 컸다. 예를 들어 최근 1년 간 건강 문제로 의료기관에서 진단, 검사, 치료가 필요했으나 받지 못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내국인은 11.5%였지만 이주민은 28.2%로 높게 나타났다. 이는 의료기관 이용 양상의 차이로 이어졌다. 최근 1년간 외래진료를 위해 의료기관을 찾은 이주민은 32.4%로 내국인의 84.9%에 비해 두 배 이상 적었던 반면, 입원과 응급실 이용은 이주민이 각각 10.7%, 8.5%로 내국인의 10.5%, 8.3%에 비해 높게 나타난 것이다.

이는 아픈 이주민들이 제때 의료기관을 찾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상태가 악화되거나 위급한 지경이 되어서야 의료기관을 이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다. 그리고 외래진료로 치료가 가능했던 이주민들이 입원이나 응급 치료를 요하는 중증 환자가 된다면 개인의 건강 뿐 아니라 의료서비스 전반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상병급여는 개인의 건강권 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건강 수준을 지키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도 이미 1단계 상병급여 시범사업의 효과가 드러나고 있다는 정부의 발표는 고무적이다. 부디 상병급여가 국적이나 건강보험 가입 유형과 무관하게, 아파도 직장을 잃을까 소득이 끊길까 쉬지 못하는 모든 이들의 든든한 사회안전망으로 출발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태그:#상병수당, #이주민, #건강 노동 사회 시민포럼, #상병수당 시범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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