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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을 했던 사람이 '인쇄인들을 위하고 시민들에게 인쇄문화를 알리기 위한' 서울인쇄센터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용역으로 공공 기관을 운영하면서 공간을 꾸리는 일, 시민들을 대하는 순간들을 소소하게 일지 형식으로 담아내고자 합니다.[기자말]
서울 중구 방산시장 안에는 김치찌개로 유명한 장OO이란 식당이 있다. 점심시간이면 방산시장 내 인쇄 관련 소상공인들로 북적이는 맛집이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면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달력이다.

가게 사방 벽에 달력 예닐곱 개가 걸려 있었다. 그림도 없고 숫자로 지면을 꽉 채운 것이 모두 비슷한 포맷인데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달력 밑에는 적힌 단체의 이름이다. 모두 방산시장 내에서 조성된 상공인들의 모임명이 제각각 적혀 있었다. 단골에 따르면 달력들 모두 단체별로 각각 자리가 정해져 있고, 해가 바뀌면 단체별로 만들어진 달력이 같은 자리에 놓인다고 했다.

방산시장의 단면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였다. 방산시장에는 20여 개의 단체가 있고 모두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이곳 공동체의 맥과 정체성을 이루고 있었다. 역사와 전통은 장단점이 있다. 지속성이란 관성의 힘을 만들지만, 변화를 더디게 하기도 한다. 오늘은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방산시장에서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인쇄인을 만나보았다. (사)한국 포장 패키지 인쇄산업협회 김효영 감사가 그이다.
 
인터뷰는 방산시장 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하였다. 그의 사무실은 그간 방산시장 홍보를 위해 기획한 사업의 홍보물로 가득했다.
▲ (사)한국 포장 패키지 인쇄산업협회 김효영 감사 인터뷰는 방산시장 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진행하였다. 그의 사무실은 그간 방산시장 홍보를 위해 기획한 사업의 홍보물로 가득했다.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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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해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보여준 것은 그가 방산시장 브랜드로 상표등록을 한 '포포남녀(포장하는 남녀) 박람회' 관련 자료들이었다. 그가 방산시장 상인연합회(당시 회장 김교선) 임원이던 2018년 가장 공을 들인 사업이라고 했다.

"우리가 우리를 알리는 거에는 너무나도 소홀한 거예요. 적어도 50세 이상 되는 미대 출신들은 방산 시장을 다 알아요. 왜냐하면 자기들이 특수 종이 이런 것들을 사러 오거든. 근데 지금은 하다못해 40대한테 '방산시장이 뭐 하는 데인지 아세요'라고 하면 몰라요."

그는 방산시장이 대중에게서 잊히고 있다고 했다. 방산시장이 하청 위주로 움직이는 탓이 크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일정한 거래처가 있기에 굳이 홍보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시 '포포남녀 박람회'는 산업단지로서 '방산시장'의 새로운 가능성과 가치를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했다. 단순한 하청이 아니라 창의적인 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생산기지임을 선언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방산시장이 시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홍보 행사로 기획한 첫번째 사업이었다. 방산시장의 다채로운 제품들과 제작 역량을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은 방산시장 상인연합회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 제1회 포포남녀 박람회(2018년) 모습 방산시장이 시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홍보 행사로 기획한 첫번째 사업이었다. 방산시장의 다채로운 제품들과 제작 역량을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은 방산시장 상인연합회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 방산시장 상인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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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방산시장이 '시장'으로 불리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현재 방산시장을 관리하는 중구청의 주무과는 '전통시장과'라고 한다. 그러나 생산시설을 갖춘 도심제조업의 일원인 만큼 방산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산업적 관점과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여기를) '방산 포장 패키지 특수인쇄 기술 집적단지'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는 게 맞아요. 여기는 시장이 아니에요. 중구청의 주무과도 '전통시장과'가 아니라 '도심산업과'가 담당해야 하고요."

그의 뿌리는 사실 인쇄와는 거리가 있었다. ICT를 전공하고 같은 분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화장품 유통 회사를 경영하다가 봉제 제품 유통을 디지털화하는 일을 거쳐 방산시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도심제조업 중 가장 규모가 큰 봉제와 인쇄를 두루 경험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인 셈이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봉제와 인쇄를 거치면서도 줄곧 몰두한 일은 도심제조업의 디지털 전환이었다. 방산시장에서 처음 시도한 것도 패키지에 IT를 접목하는 일이다. 패키지는 평면(2D)인 인쇄물을 입체(3D)로 만드는 작업이다.

김효영 감사는 IT기술을 통해 평면 전개도를 입체로 시각화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팩키지 디자인 단계에서 시행착오를 줄여주는 서비스를 시장에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 새로운 기술은 이식하는 일이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구체적인 언급은 꺼렸지만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기존의 생산 시스템에 익숙한 이들에게 새 기술은 불편하거나 때로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기술을 현장에 빨리 적용하기 위해 김효영 감사는 생산자 협동조합 방식을 추진했지만 그마저도 난관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조합원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협동조합의 특성도 기술 개발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더구나 친목 활동에 익숙했던 구성원들은 개발 프로젝트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김효영 대표는 애면글면하다 2018년 뇌출혈까지 겪게 되었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포포남녀 박람회'도 그가 병중에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패키지 제품 인쇄 시 서로 다른 제품을 한꺼번에 인쇄하는 ‘터잡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 김효영 감사 패키지 제품 인쇄 시 서로 다른 제품을 한꺼번에 인쇄하는 ‘터잡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 최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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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업의 디지털 전환을 위한 그의 구상은 계속 이어졌다. 인쇄소마다 공정이 분리되어, 하나의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공장을 거쳐야 하는 중구 인쇄업의 특성상 물류를 디지털화한다면 훨씬 생산성을 높일 수 있고, 원자재의 재고 관리에도 디지털 전환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의견이다.

이러한 과제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이 필요할까? 서울인쇄센터와 같은 중간 지원조직은 또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 그는 우선 방산시장도 인쇄의 한 분야임을 인지해야 한다고 했다.

"방산시장이 인쇄하고 상당히 많이 겹쳐 있잖아요. 특수 인쇄죠. 서울인쇄센터도 사실은 방산 시장을 위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봉제와 인쇄는 비슷한 점이 많아요. 공정이 잘게 나뉘어 있죠. 그걸 엮어내는 걸 공공이 해줘야 해요."

대다수의 인쇄소가 자신의 제품을 개발하기보다 주문에 의한 일부 공정만을 소화하는 상황에서 공공이 이런 인쇄소들을 엮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김효영 대표는 일종의 편집숍과 같은 기능을 예로 들었다. 서울인쇄센터와 같은 공간에서 참신한 인쇄 제품을 소개하고 이 제품을 만드는데 참여한 인쇄소들을 인수분해 해서 홍보해주는 방식이다. 

그렇게 되면 전시된 제품과 같은 제품을 제작하려는 개발자나 창작자들이 필요한 공정에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인쇄소로서도 기존 거래처를 더욱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소품종 대량 생산에서 주문에 의한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나아가는 지금의 추세로 봤을 때 많은 인쇄소가 상당한 경쟁력을 갖추는 동인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 제조산업과 IT의 접목은 많은 인쇄인이 갈증을 느껴온 대목이기도 하다. 이미 몇몇 대형 인쇄 포털이 주문형생산 시장의 상당 부분을 선점하면서 기존 인쇄인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수십 년간 지속된 업태를 바꾸기도 어렵고, IT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선뜻 도전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김효영 감사와 같이 IT와 인쇄를 비롯한 도심제조업에 대한 융합형 인물이 귀한 이유다.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그는 인쇄업의 디지털 전환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최근 주목 받는 대형 물류 업체를 일컫는 풀필먼트(fulfillment) 시스템도 방산시장과 인쇄업계에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부터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의 구상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상당한 자원과 시간이 필요할 듯해 보인다. 여기에 서울인쇄센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무엇인지 차근차근 숙제를 풀어가야겠다.

덧붙이는 글 | 같은 제목의 글을 개인 브런치에 올리고 있습니다.


태그:#서울인쇄센터, #방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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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네트워크(사) 대표. 문화 기획을 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 지역 현장에 들어가 지역 이름을 걸고 시민대학을 만드는 'OO(땡땡)은대학' 프로그램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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