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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도시 공간끼리도 경쟁이 있을까. 그렇다면 신촌은 분명 패배자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말이 알려지기도 전에 먼저 그 철퇴를 맞았다. 인근 홍대와 연남동에 모든 매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앗긴 명성을 좀처럼 되찾아오지 못한 시간이 벌써 수십 년이다.

아득해 무엇도 가늠할 수 없다. 시간이 퇴화시킨 신체기능만큼이나 뒤바뀐 공간 변화가 그저 어리둥절하다. 신촌 로터리에 있었던 나이트클럽 '우산 속'을 찾아 더듬거리는 기분이다. 사라진 장소를 기억으로 소환해야 하는 당혹감이, 공간이 주는 충격에 버금간다.
 
대형 백화점과 높다란 건물이 로터리 주변에 숲을 이뤘다. 로터리는 결절점이자 신촌의 상징이다.
▲ 신촌 로터리 대형 백화점과 높다란 건물이 로터리 주변에 숲을 이뤘다. 로터리는 결절점이자 신촌의 상징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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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은 기득권으로 노회해진 86세대를 닮았다. 80년대 저항으로 만들어낸 '민중문화' 공간이다. 주점마다 민중가요가 떼창으로 울려 퍼졌고, 카페에선 격한 토론이 불붙었다. 대중문화와 공존했다. 하지만 그 산실은 이제 흔적마저 사라졌다.

공간은 잃어버린 매력을 되찾으려 몸부림 중이다. 화려하던 명성을 앗기고 저리 힘겨워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설상가상 2014년 지정하여 잘 운용되던 '대중교통전용지구' 해제를 두고 갈등이 표면화하고 있다.

공간 형성

미국 북장로회가 설립한 연희전문학교가 일제강점기인 1918년 지금 자리에 들어서고, 1920년 경의선 신촌역이 생긴다. 역시 미국 감리회가 설립한 이화여자전문학교가 1935년 이전해 온다.
 
신촌 골격을 이룬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 도면. 당시 고양군 연희면을 경성에 편입시켜 시행한 사업이다.
▲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 도면(1940) 신촌 골격을 이룬 '대현 토지구획정리사업' 도면. 당시 고양군 연희면을 경성에 편입시켜 시행한 사업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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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가지계획령(1934)에 따라 고양군 연희면 등 기존 도심의 3.5배에 달하는 면적이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된다. 연희면에 시행된 대현지구 토지정리구획사업으로 신촌이 형성된다.

기존 도심과 용산을 제외하고, 편입지역의 권역별 용도지역을 철도와 전차선 따라 정한다. 이 중 대현지구는 주거와 공업 혼용으로 개발한다는 구상이었다. 대현지구는 1937년 결정 고시를 거쳐 2년 후 착공, 1942년 완공한다.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의 골격이 그대로 보이는 항공사진. 복개한 봉원천을 따라 형성된 보행공간이 뚜렷하다.
▲ 신촌(1962)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의 골격이 그대로 보이는 항공사진. 복개한 봉원천을 따라 형성된 보행공간이 뚜렷하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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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이 대학촌으로 변모한 건 해방 후다. 홍익대가 1955년 상수동에 캠퍼스를 짓고 이전해 온다. 가톨릭 예수회가 1960년 캠퍼스를 마련하여 설립한 대학이 서강대다. 1957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승격한 연희대와 세브란스병원이 통합하여 연세대가 되고, 이듬해 병원 건립에 착공하여 1962년 의학부가 신촌으로 이전해 온다. 이로써 신촌 대학가가 본모습을 갖추게 된다.

문화와 공간

1970년대 '청년문화'가 탄생한다. 대중문화의 한 갈래로 일제 잔재에 신음하던 기성세대에 반발한 하위문화다. 대안문화로 성장하지 못한 통기타와 청바지, 장발과 생맥주로 표출된 대학생 문화였다. 낭만적 엘리트인 대학생의 서구 지향과 동경이라는 한계가 여실했다. 그 중심에 신촌이 있었다.
 
로터리는 일제가 만든 교통광장의 상징이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아현~동교동 방향 도로 색이 짙다.
▲ 신촌 로터리(1967) 로터리는 일제가 만든 교통광장의 상징이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아현~동교동 방향 도로 색이 짙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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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함에도 1960년대 미국 로큰롤 혁명에 비견하는, 우리나라 최초 세대 혁명으로 평가하곤 한다. 식민지 잔재가 전후 서구문화와 격렬한 갈등을 일으킨 시기로, 이는 곧 시대의 산물이었다.

물론 살벌한 군사독재에 격렬하게 저항한 학생운동도 있었다. 1970년대 말 대학가에서 '탈춤 부흥 운동'으로 민중문화 맹아가 마련된다. 그러나 이마저 낭만적 학생운동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독재자 죽음으로 낭만적 70년대가 저물고, 잠깐의 희망마저 다시 총칼에 짓밟힌다. 5.18은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격렬한 저항이 일어난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이 역사와 변혁의 주체라는 이념으로 무장하고 조직화한다.

이에 탄생한 민중문화가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대항문화로 자리매김한다. 영역은 다양했다. 판화와 만화, 걸개그림과 민중가요, 굿거리와 마당극, 탈춤과 사물놀이 등 전통까지 계승한 형태였다. 그 중심에 역시 신촌이 있었다.
 
지하철 공사를 하면서 만든 임시 고가가 로터리 중앙을 지난다. 아현동과 동교동 방향 나무 육교는 1980년대 초반 철거된다.
▲ 신촌 로터리(1980) 지하철 공사를 하면서 만든 임시 고가가 로터리 중앙을 지난다. 아현동과 동교동 방향 나무 육교는 1980년대 초반 철거된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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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신촌은 부풀 만큼 부풀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획일화한 1970년대와는 확연히 달랐다. 드나드는 곳만으로 그 사람 성향이 드러날 정도였다. 민중문화를 주류에 두고, 소집단으로 나뉘었을망정 다양한 대중문화를 품고 있었다.

대중가요 싹이 자라난다. 연극과 언더그라운드가 움트기 시작한다. 공연장이 곳곳에 자리한다. 1970년대 말 명동과 종로의 라이브 공간이 쇠퇴하자 인프라가 갖춰진 신촌으로 이전해 온다.

소극장과 카페, 클럽 등에서 라이브 공연이 열린다. 이때 신촌 블루스나 들국화 같은 밴드들이 크리스탈 소극장과 레드제플린에서 공연한다. 훼드라도 빠질 수 없는 곳 중 하나다.

민중문화가 저항문화였다면 신촌에서 싹 틔운 '대중문화'는 1990년대를 예비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산울림, 연우, 시민극장 등 소극장이 잇달아 생겨나며 다양한 예술인들의 교류로 연극 메카를 이뤄나간다.

민속주점이 시대를 풍미한다. 크고 작은 서점이 곳곳에 포진하고, 신촌시장에서 태어났음 직한 오래된 대폿집들도 성시를 이룬다. 나이트클럽에 몸을 맡기던 청년들이 로터리 주변 대형 백화점에서 눈요기하기 바빴다.

변천과 쇠락

1990년대 초반 이른바 X세대가 등장한다. 이들의 출현은 그야말로 갑작스러웠다. 맛집과 패션, 음악, 스포츠를 공유하고 힙합 바지에 햄버거와 피자를 즐기며 PC와 매우 친근했다. 인종과 국가, 종교와 이념에도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1930년대 기준으로 형성된 이대 앞 도로는 폭이 좁다. 1980년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상권이 쇠락해 지금은 한산하다.
▲ 이대 앞 1930년대 기준으로 형성된 이대 앞 도로는 폭이 좁다. 1980년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상권이 쇠락해 지금은 한산하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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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힙합이 기저에 깔려있다. 스스로 문화를 만들어내기보다 받아들여 즐기기에 여념 없다.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기 바쁘다. 비판과 대안 제시가 사라졌다. 이런 경향성이 아직도 우리 대중문화 저변을 지배하고 있다.

X세대 충격파가 가시기도 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N세대가 인터넷과 함께 출현한다. 디지털로 맺어진 네트워크 세상이 열린다. 컴퓨터로 온갖 정보를 섭렵하고 나와 연결된 모두와 공유한다. 생성된 정보가 가공되어 인터넷을 떠돈다. 세계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이원화한다.
 
노고산 자락 언덕을 이룬 곳에 개설된 신촌역 방향 도로. 주변은 업무 및 상업기능과 주거가 혼재해 있다.
▲ 신촌역 방향 노고산 자락 언덕을 이룬 곳에 개설된 신촌역 방향 도로. 주변은 업무 및 상업기능과 주거가 혼재해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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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화가 극명하게 표출된 곳이 신촌이다. 재미와 놀이, 만남을 추구하는 자유로움과 다양성으로 무장한 이들 세대가 공간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이들의 영역이 다양화할수록 공간은 획일화로 치닫는다. 카페가 들여다볼 수 있는 1층으로 내려온 게 대표적 현상이다. 인디 문화를 주도하는 밴드가 소규모 주점에서 태동한다. 곳곳에 게임과 PC방이 성황을 이룬다.

유흥 공간 록카페가 탄생하지만, 기성세대 시선엔 퇴폐공간으로 지목된다. 1991년부터 구청과 경찰서가 식품위생법을 근거로 규제를 시작하고 연세대는 추방 운동을 벌인다. 1992년 신촌 5개 대학 총장 모임에서 신촌 문화의 퇴폐성이 논의되고, 대대적인 단속에 상당수 록카페가 문 닫는다. 설상가상 1996년 사회적 이슈로 부각한 '롤링스톤즈' 화재로 상권마저 큰 타격을 입는다.
 
로터리에서 연세대 방향 도로.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진 오른 편 홍익문고가 오히려 반갑다.
▲ 연세로 로터리에서 연세대 방향 도로.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진 오른 편 홍익문고가 오히려 반갑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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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까지 문화·경제적 전성기를 누리던 신촌이 2000년 이후 활기를 잃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높은 임대료에 소규모 가게가 이탈한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점령한 유흥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열악한 보행환경과 차량 정체, 상권 획일화 등으로 공실률이 늘어난다. 신촌 쇠락의 시작이다.
 
여느 유흥가와 차별을 느낄 수 없는, 그저 그런 거리로 변모한 연세로 이면이다.
▲ 연세로 이면 여느 유흥가와 차별을 느낄 수 없는, 그저 그런 거리로 변모한 연세로 이면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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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의 침체가 일순간에 다가온 건 아니다. 결정타는 신촌에 있던 이색적인 가게, 예술가와 인디 밴드가 홍대로 옮겨가면서부터다. 여기에 신촌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분위기가 사라져 획일화하고, 견디기 힘든 높은 임대료가 악순환 기저에 작용한 탓이다.

공간 재창출은

신촌의 주인공은 결국 젊은이다. 이들은 지금 극심한 경쟁에 내몰려 스펙 쌓기에 여념 없다. 공간은 이들에게 매력적이어야 한다. 술집 일색에서 다양성을 품은 공간으로 변신해야 한다.

공간 매력은 '가보고 싶은'의 충족이다. 가서 보고 느끼고 배우며 즐기는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 차량에 지배당하기보다 보행이 자유로워야 하고, 문화와 친밀해야 한다. 그 첩경은 공원 등 휴게 기능에 문학이나 음악, 미술 등 예술 활동이 활발해야 한다.
 
모 백화점 뒤 조그마한 공원. 신촌에서 활동하다 고인이 된 가수 김현식이 노래하는 모습의 작은 동상이 서 있다.
▲ 창천문화공원 모 백화점 뒤 조그마한 공원. 신촌에서 활동하다 고인이 된 가수 김현식이 노래하는 모습의 작은 동상이 서 있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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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서 예술 활동이 자유로워지려면 임대료 부담이 낮아야 한다. 적정 임대료가 있을까만, 임대료는 결국 공간 매력과 반비례 관계다. 따라서 예술 활동을 담보하는 몫은 공공부문이 떠맡아야 한다. 젊은이가 이 공간을 소비하기에 거리낌 없어야 한다.

청년이 도전정신을 펼칠 공간으로의 재탄생도 한 방향이다. 스타트업과 벤처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꿈꾸는 젊은이들 발길이 잦아져야 한다. 그래야 젊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산학 협력 기반은 훌륭하다. 구로와 가산디지털단지가 타산지석이다.

시간 흐름에 세대가 변하듯, 꿈꾸는 젊은이의 대안문화가 창출되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아득해진 신촌에서 응원한다.

주요 지리정보

태그:#신촌_대학가, #1970년대_청년문화, #1980년대_민중문화, #X세대_N세대_MZ세대,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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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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