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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은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마침 이 사건을 다룬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이 8월 출간 이후 베스트셀러 탑 순위를 달리고 있다. 안중근에 관한 자료나 서적은 늘 있어 왔는데 또다시 김훈의 <하얼빈>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강대국들의 충돌 속에서 위태로웠던 안중근의 시대와 행적이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가 분명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자생활을 한 작가 김훈(1948~ )은 <칼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역사소설로 유명하다. 그 밖에도 <언니의 폐경>, <화장> 같은 단편소설은 물론 <자전거 여행>, <연필로 쓰기> 등 다수의 수필도 집필하였다.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화하는 것이 그의 오랜 소망이었는데 74세의 나이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함으로 <하얼빈>을 써냈다고 한다. 

영웅보다 인간 안중근 담아낸 소설 
 
    장편소설 <하얼빈> 책 표지
장편소설 <하얼빈> 책 표지 ⓒ 문학동네
 
소설은 1907년 안중근이 상해에서 돌아온 27세 무렵부터 1909년 사형선고가 집행된 31세까지의 시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하얼빈을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서사와 안중근의 서사가 대구로 이어지며 과거와 현재의 일화들이 오간다. 

작가는 다양한 일화를 들어 안중근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어린 시절 사냥이나 동학군과의 싸움을 통해 유능한 무관의 면모를 부각하고, 세례를 받은 후 종교적 믿음과 국가의 존망 앞에 갈등하는 종교인의 모습을 그린다. 그중 안중근이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 뮈텔 신부에게 대학설립을 청했다 퇴짜 맞은 일화가 인상 깊다. 

뮈텔은 '조선에 대학교는 가당치 않다... 조선인이 학문을 배우면 신심을 해치게 된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일화로 안중근이 국가의 이익 앞에서는 종교도 별 수 없음을 깨닫고 항일 무장투쟁을 나서게 되었음을 작가는 선명히 밝히고 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는 의거 전후의 여러 일화로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법정에서 당당히 이토 저격의 정당성을 밝힌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38쪽) 

한편, 소설 <하얼빈>의 미덕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가족과 종교와 조국의 처지를 괴로워하는 안중근의 내면을 생생히 구현해 낸 점이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서 봉기하는 의병들의 죽음 속에서도 피어나는 새 생명의 생명력에 슬픔이 어리는 장면, 조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어 이토의 세상이 되어버린 조국을 한탄하는 장면에 안중근의 깊은 고뇌가 잘 나타나고 있다.
 
"아이의 젖니에 삼남 들판의 시체가 겹쳐서 보이는 환각을 안중근은 식구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언젠가 빌렘 신부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신부님은 알려나? 신부님도 모르려나?...." (62쪽)
 
"이 세상에서 이토를 지우고 이토의 작동을 멈춰서 세상을 이토로부터 풀어놓으려면 이토를 살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안중근은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생각은 어둠의 벽에 부딪혀서 주저앉았다." (89~90쪽)
 
고매한 '영웅'이라고 피상적으로 여겼던 안중근이 조국의 위태로움에 번민하는 우리네 같은 한 인간으로 되살려지는 부분이다. 

소설은 안중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서사도 같은 비중으로 할애하고 있다. 시 짓기와 풍류를 즐기는 격조 높은 인품인 양 행세했으나, 사실은 총칼로 극동 전체를 탐했던 침략군인으로서의 이중적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역사적 사건보다 중요한 사건의 '해석' 

다만, 이토 본인이 문명개화의 전령임을 스스로 굳게 믿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서울 도성 안 거리의 똥 일화를 보탠 것은 뜻밖이었다. 물론 작가는 이토의 입장에서 서술했겠으나 소설 전개에 꼭 필요한 장면이었는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소설에서 아쉬운 점은 안중근이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협조받았거나 연대했던 의병들과의 관계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점이다. 게다가 단지까지 하면서 조선독립을 맹세했던 항일투사들과의 일화는 아예 빠진 점도 걸린다. 책의 후기로 안중근 사형집행 후 부인과 자녀들, 형제들의 이야기를 인물별로 간략히 보충 서술한 점은 독자들에게 좋은 정보가 된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최근 여당 대표의 말이다. 이 말에 식민사관 논란이 일자 그는 왜곡이라며 '제발 역사공부 좀 하시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허나, 역사에서 중요한 점은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해석이다.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다음 역사의 향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2022년 다시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국내외 정세 속에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의 이야기를 통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의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고, 그 해석이 과연 시대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는지를.

하얼빈

김훈 (지은이), 문학동네(2022)


#소설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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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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