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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동복지, 그 중에서도 특히 입양을 주로 연구하는 연구자입니다. 그래서 지인이 직접 또는 둘러서 입양에 대해 물어볼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지인이 고등학생이 된 입양아동에게 입양사실을 알려줘야 할지 여부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습니다(그분의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 이야기를 각색하겠습니다).

목사 부부가 출생 직후 입양한 아이인데, 그 아이에게만 입양 사실을 비밀로 해왔고, 주변 친지들은 대부분 입양한 것을 안다고 합니다.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싶지만, 이제 고등학생이 됐고, 수년 뒤면 대학에 입학하면서 독립을 할 수도 있으니 입양 사실을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흔한 이야기였고, 10년 전에도 종종 들을 수 있는 사연이었으며, 지금도 드라마에서 여전히 써먹고 있는 소재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가정이 있었거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제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부모-자녀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지금 당장 입양 사실 공개를 준비하십시오. 입양가족 자조모임에 한동안은 부모님이, 나중에는 그 아이도 참석하도록 하면서 입양이라는 현상에 노출시키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입양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사실 이것은 좀 무책임한 답변입니다. 입양가족과 입양아동의 개인 특성, 그들의 관계, 가정 분위기, 상황에 따라 입양아동의 반응이 다르기 마련이고, 그 결과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나 성인기 초기에 입양 사실을 알게 된 성인 입양인들의 진술을 들어봐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입양되었다는 말을 듣기 전에 어린 시절부터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거나 거의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사실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고, 슬프거나 화난 감정이 들기는 했어도 이미 부모,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극복할 수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입양인은 큰 충격을 받았고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입양아동이나 입양인에게 입양사실을 공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고 진실이며, 이 현상에서 입양인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기에 수치심을 느끼거나 숨길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로 여긴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을 낳은 부모로부터 어릴 때부터 길러지거나 보호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지만, 바로 그 부모가 자신을 위해 더 나은 길을 선택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점 그리고 최소한 그들만큼이나 자녀를 원했고, 준비했고, 사랑해 준 입양부모가 있다는 점은 그 불행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축복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물론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은 입양부모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어떤 이들은 입양제도가 없었다면 친생부모들이 스스로 아이를 기르기로 선택할 거라고 주장하지만, 자녀를 지인이나 아동보호서비스에 맡겨두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부모들과 낳은 자녀를 가혹하게 학대하는 부모들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성인 입양인인 주인공이 친생모를 찾아 나서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입양 이슈들을 던져 줍니다. 백인이면서 흑인 아기를 낳은 친생모는 그 아기를 입양 보내고, 미혼모로 다시 낳은 딸과 갈등을 빚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비밀과 거짓말이 채워져 있습니다. 주인공의 존재도 그들에게는 비밀이었습니다. 연출자가 의도한 메시지는 아마도 '진실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설령 그 진실이 고통스러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밝은 데로 가지고 와서 진심으로 대화하고 같이 풀어나갈 때 갈등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입양부모 교육을 할 때 꺼내보게 되는 영화입니다. 입양가족이 아니어도 가족 안에 갈등이 얽혀있을 때 진실과 진심으로 풀어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영화니까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대부분의 입양은 비밀로 진행되었고, 그 뒤에도 입양부모와 주변인들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입양특례법을 통해 합법적인 입양제도가 시행된 이후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을 전후로 일부 입양부모들이 공개입양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언론 인터뷰와 생활다큐를 통해 자신들이 입양아동을 양육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들은 거의 10년 정도 그런 노력들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입양 현장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다음 세대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기도 했습니다. 유명 연예인들의 입양을 통해 긍정적인 메시지가 확산되기도 했고, 그와 반면에 입양에 대한 인식을 해치는 막장 드라마들은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여러 조사연구의 결과를 통해, 그리고 저와 입양부모들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바를 통해, 지금은 공개입양이 대세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다수의 시민들은 공개입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도 여전히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양된 아이가 학교나 직장, 관계망 내에서 놀림을 받거나 차별을 당하면 어떻게 해요?"

여러 연구를 통해 입증된, 그에 대한 저의 답은 이렇습니다. "우선 입양되었다는 것은 놀림거리가 될 일도 차별을 받을 일도 아닙니다. 놀리거나 차별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 아이와 부모가 충분히 교양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가르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그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다면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고, 어리면 어린 대로, 청소년기에 늦으면 늦은 대로 예상보다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상황이 끝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밀입양을 하고 있는 많은 입양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비밀을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거짓말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입과 눈과 몸짓, 그리고 마음까지 계속 단속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을 끝내 완수하고 세상을 떠난 입양부모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돌아가신 뒤 한 세대를 더 살아가는 입양인들도 끝내 모른 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설령 그 입양인도 입양된 사실을 모른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면, 비밀과 거짓말로 만들어졌던 그의 인생은 '진짜'였을까요?

영화 <트루먼 쇼>는 자신만 모르는 가상의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이 어느 날 진실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의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Truman입니다. 가짜 세상에서 살아가는 진짜 사람.

우리 인생에는 비밀로 지켜져야 할 것이 있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혼자만의, 그리고 둘만의 사생활도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불법이나 편법, 비리, 부정행위, 부도덕, 비윤리가 아니라면 말이죠. 그러나 대부분의 일상생활에서는 비밀도 거짓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정과 직장, 사회집단에서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비밀스런 행동을 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를 믿지 못할 것입니다. 다수가 그렇게 된다면 그 공동체에는 소통이 단절될 것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는 '열린 사회'이며, 그 적들은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공공의 영역과 공동생활에서는 공개와 진실이 원칙이며, 바람직할 것입니다. 공공 영역에 비밀로 남아 있는 것이 있고, 그것을 거짓말로 덮고자 한다면, 그 안에는 나쁜 것들이 채워져 있을 가능성이 높죠. 그와 반면에, 국가 안보와 관련된 기밀은 숨기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것을 공개하는 자가 처벌을 받아야 하죠. 국익을 해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부에서는 유난히 비밀과 거짓말이 자주 드러나고 있습니다. 공개되어야 할 정보들이 비밀로 숨겨지고, 잘못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하다가 그것이 거짓말로 드러나자 그 거짓을 덮기 위해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감추어야 마땅한 국가 기밀들은 오히려 관련자들의 부주의로 공개되기도 합니다.

비밀과 거짓말이 많은 개인과 집단, 지역사회와 국가에는 부조리와 병폐가 잦아지기 마련입니다. 거짓말은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국 밝혀지기 마련이고, 비참한 결말을 맺기 마련입니다. 당사자들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열린 사회의 적은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열린 사회의 적은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 권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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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공개입양, #비밀과 거짓말, #열린 사회와 그 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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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현상의 은밀한 맥락과 패턴을 탐구하는 질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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