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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군인과 소방관들이 지난 3월1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파괴된 건물을 수색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인과 소방관들이 지난 3월14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파괴된 건물을 수색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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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다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러시아가 곧 패퇴할 것이며, 자승자박이 되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의 서진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게 될 것이고, 러시아의 해외계좌를 동결하고 송유관을 막으며 무역거래를 중단하면 러시아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될 것이라는 등의 예측입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면, 이러한 예측은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잘못된 예측을 하게 된 것은 정부의 태도와 언론의 보도 탓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평범한 시민으로서 우리 자신은 지구 반대쪽에 있는 국가들의 동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어렵고, 그럴만한 여력도 없으며,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만한 전문성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외교부 등 정부 당국의 발표와 주요 언론의 보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우리 대신 잘 하라고 세금도 내고, 언론 보도도 지켜보며, 전문가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죠.

문제는 정부와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대통령이 스스로 자꾸만 강조하듯 '처음이라서'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온 언론은 어떨까요? 대부분의 언론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 언론의 보도를 베껴 쓰는 데 급급했습니다. 결국 미국의 관점과 EU의 관점을 반영한 기사와 보도를 내게 되고, 자신만의 관점과 해석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늘 그래왔다고 순순히 넘어갈 일은 아닙니다. 이러한 인식수준은 결국 유가급등과 물가상승, 자원위기와 곡물위기 등을 준비하고 대처할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고, 경제위기와 안보위기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정부든 언론이든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주체, 여기에서는 해외언론과 주요국 정부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버릇입니다. 이를 주체성과 주관성의 상실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제가 대학원에 입학했을 당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개념이 회자되었습니다. 서구 사회가 자신의 관점으로 동양을 재단할 뿐만 아니라 동양을 동질적인 집단으로 인식함으로써 현상을 왜곡하고 국가와 민족들 사이의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얼마 뒤에는 '탈식민성'이라는 개념도 유행했습니다. 식민성, 즉 피지배국가로서 지배국가가 심어놓은 사상체계와 제도를 추종하는 성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각성은 학문체계에 대한 반성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학문들이 대부분 서구 사회에서 이미 만들어놓은 지식체계를 비판 없이 받아들여 우리 학문체계에도 그대로 이식하고, 그 구조와 내용을 후대에 전수하며, 그 틀을 가지고 학술활동과 교육활동을 해왔다는 반성입니다.

모방 아닌 창조의 중요성 
 
수많은 말과 이야기들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내 관점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말과 이야기들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내 관점이 필요합니다.
ⓒ 권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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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2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우리 학문공동체들은 식민성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공부를 좀 하신 분들은 심리학이 프로이트와 융을 중심으로 한 정신역동이론, 반두라와 스키너 등의 행동주의이론, 그 뒤를 이은 인지이론과 절충주의, 로저스 등의 인본주의 등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사회학은 구조기능주의, 갈등주의, 교환주의, 상호작용주의, 사회구성주의의 변천을 거쳐 왔죠. 처음 등장한 거대(주요) 이론이 유행하고 나면 그것을 비판하는 이론군이 등장해서 다시 유행하고, 그 다음에는 앞의 두 이론군을 비판하며 절충하는 새로운 이론군이 나타나는 식입니다. 이런 순환 구조를 '변증법적'이라고 할 수 있죠. 어느 학문이나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리고 그 학문의 교과서들은 주요 이론들로 채워져 있으며, 어느 교과서나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이론의 시대가 종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즉 나올만한 주요 이론은 이미 다 나왔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이 나오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요 이론들을 뒤집을만한 새로운 작업을 수행할 용기가 없거나 능력이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복지학도 마찬가지인데요. 1970년대부터 사회복지 관련 학과들이 개설되고, 사회복지 교육이 시작되면서 교육과정과 교육교재는 모두 서구 사회에서 수입해 온 것들이었습니다. 급하게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1세대 교수들이 원서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교재로 사용하거나 대충 번역해서 쓰거나 강의노트를 만들어서 받아쓰게 하기도 했죠.

그 뒤로 20여년이 흘러 학과도 전국적으로 개설되고 많은 교수들이 유학을 다녀왔으며, 국내 대학에서도 박사들을 배출하면서 2세대 교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지만 번역 수준이 높아지고, 직접 쓴 교재가 늘어났을 뿐이지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수들이 수행하는 연구와 논문도 서구 사회에서 개발한 연구방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서구의 이론들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다른 학문들도 마찬가지이며, 그래서 탈식민성이 학문 공동체의 화두가 되었던 것이죠.

우리는 노벨상 후보자들과 수상자들이 발표될 때 획기적이고 인류의 삶을 바꿀만한 새로운 발견과 발명, 업적, 저작들이 계속 생산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출신의 연구자들이 후보가 되었을 때 관심이 더 커지죠.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론이나 연구결과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혹시 특정 학문에 속한 우리나라 학자가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작가가 세계 문화 사조를 바꿀만한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물리학자가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만들었거나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발견을 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 연구자나 작가의 명단이 매년 거론되고 있지만, 그다지 혁명적인 업적은 아닌 듯합니다. 물론 그 분들의 업적은 노벨상 후보로 거론될 만큼 대단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것이겠지만, 그리고 이는 노벨상을 이미 받은 대부분의 인물들에게도 그리 다를 것은 없겠지만, 각 연구자의 위치는 거인의 어깨 위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이 화두를 던졌을 때 떠오르는 두 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업 현장에서 나타나는 글로벌 기업들의 주도성입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국가 발전전략과 전체 산업의 개발, 그리고 기업들이 취해 온 전략은 '모방 학습'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즉 소위 선진국의 발전과정과 산업 추세, 서구 기업의 혁신을 뒤따라가면서 그들의 시행착오를 관찰하고 성공 모델만을 취하여 격차를 좁혀가는 전략입니다.

우리나라와 기업들은 이 모델을 성공적으로 적용하고 수행함으로써 최근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지요. 그러나 비판과 경계의 목소리도 컸습니다. 지금 수준에 이르는 데까지는 모방 모델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겠지만,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자체적인 기술혁신을 이루고 새로운 산업과 표준을 개발하여 선도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도 주장합니다.

그 예로 꼽히는 것이 애플과 삼성의 역동이죠. 삼성은 애플의 아이폰을 모방하는 전략을 통해 세계적인 지위를 지키고 시장점유율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성이 애플을 앞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이며, 시장점유율이 그 증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성이 애플과 다른 다국적 기업들을 제치고 앞서가기 위해서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거나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거나 국제표준을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를 좀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K-시리즈입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면서 K-방역이라고 불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역 정책을 시도한 국가로 알려졌으며, 이 점에서 선도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류에서 시작된 K-Culture가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면서 국제 인지도가 높아졌고 국가와 기업, 제품들에 대한 인식수준이 향상된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세계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알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고, 우리를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학문 공동체에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에 한국의 사회복지실천에서 서구 이론과 다른 현상으로 거론된 것은 '한(恨)' 정도입니다. 그나마 그것도 새로운 이론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의 정서 중 일부를 차지하는 것으로서 특정 개념 수준을 정의하고자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저는 10여 년 전부터 사회복지 현상을 탐구하기 위한 새로운 질적 연구방법론을 개발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몇 년 전에 제 생각을 정리한 단행본을 발간했고, 그 방법론을 적용한 논문들을 매년 여러 편씩 발표하면서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현상을 이해하는 접근방법 중 하나로서 질적 연구방법은 서구 사회에서 수십 년, 수백 년 간 발전시켜온 다양한 방법론들의 집합체인데요. 우리나라 연구자들은 지난 20-30년 동안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적용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연구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주체성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제가 개발한 연구접근은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지만, 저는 계속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패러다임이 바뀔 수도 있겠지요.

저는 학위논문과 학술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논문은 서론과 문헌검토, 연구방법, 연구결과, 결론, 참고문헌의 구조로 이루어지며, 학술논문은 학술지 지침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25쪽 정도의 분량으로 작성됩니다. 저자는 3인칭으로 자신을 숨기며, '논문답게' 글을 쓸 것을 강요받습니다. 문장은 평서체 '~이다'와 '~하다'로 끝맺습니다.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평상시에 대화할 때 '~입니다', '~합니다' 식의 존댓말을 사용하며,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토론할 때도 그렇게 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오히려 한국인들에게는 낯선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 기사를 평소 다른 사람들을 대하여 말하듯이 존댓말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100편이 넘는 학술논문을 발표했지만, 이렇게 존댓말로 작성한 것은 일반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한편 밖에 없습니다. 더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독자들께는 이렇게 교수들이 쓰는 논문들을 찾아 비판적으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논문을 끝까지 읽기 위해서는 참을성이 필요하지만, 계속 읽다보면 익숙해질 것입니다. 비판이나 논쟁의 대상이 된 논문들도 직접 찾아서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이 써놓은 글을 앵무새처럼 따라서 쓰거나 나름의 해석이나 비평 없이 편집만 해서 올려놓은 기사, '저명한 학자인 아무개가 이렇게 말했다더라' 식으로 권위에 의존하는 기사, 심지어 말한 사람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강조하는 보도에 대해서는 일단 흘려보내지 마시고, 원본을 찾아보시거나 다른 입장을 드러낸 기사를 더 찾아서 읽고 나름의 판단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바쁜 와중에 귀찮게 느껴질 수 있으나 하다보면 꽤 흥미롭고 유익한 작업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 글의 요점은 특정한 현상을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그 현상을 이해하고 대처하기 위한 우리 나름의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사고방식을 잠시 내려놓고,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쟁점들로부터 시작할 필요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어린이보호구역의 차량운행 제한속도를 시속 30km에서 50km로 상향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런 쟁점은 서로 말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실험연구를 해보면 됩니다. 속도를 달리 했을 때, 어린이에게 어느 정도의 충격을 주게 되는지 비교하면 알게 되겠죠. 30km로 제한한 뒤에 사고발생 건수가 얼마나 줄었고, 사망률이 얼마나 낮아졌는지도 조사해 보면 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생각해봐야 할 본질적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린이의 안전과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질문입니다.  

태그:#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학문, #연구논문,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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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현상의 은밀한 맥락과 패턴을 탐구하는 질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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