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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사지 석등
 진구사지 석등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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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소만에서 망종으로 신록의 고갯길을 올라간다. 예전에는 6월 초순 망종 무렵이 모내기와 보리 베기가 한창인 계절이었는데, 요즘 보리 베기는 거의 볼 수가 없고 모내기도 이앙기들이 5월 하순으로 앞당기고 있다.

임실군 신평면의 섬진강변 진구사지 석등은 이십여 년 전까지는 용암리사지 석등으로 불렸다. 최근의 발굴조사에 의해 "珍丘寺(진구사)"란 글씨가 새겨진 명문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고구려 승려 보덕의 제자인 적멸과 의융이 진구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용암리사지 석등은 임실 진구사지 석등으로 이름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 폐사지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 석등이 다른 장소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진구사의 원래 위치가 어디였는지도 알 수 없다. 한 나라가 멸망한 후에 지명으로 전해지는 역사적인 장소가 현재 어디인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례는 많다.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이 백제가 멸망하기 10년쯤 전에 고구려에서 백제로 망명하여 전북 완주 고덕산 기슭에 경복사를 창건했다.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 등 여러 문헌에 비래방장(飛來方丈)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보덕이 신통력으로 자신의 거처하는 방장을 허공에 날려서 하룻밤 사이에 고구려에서 천 리나 떨어진 백제의 전주 고달산 아래로 날아왔다. 이 이야기는 한 나라의 고승이 이웃 나라로 망명하여 세상을 흔든 국제적인 사건이었음을 반영한다.

백제로 망명한 보덕의 제자들이 이곳저곳에 사찰을 건립했는데, 적멸과 의융은 진구사를 창건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백제의 옛 땅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며 현재의 전북 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보덕국(674~684)을 세운다. 신라는 이 보덕국을 인정하고 활용하여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이 보덕국에서 진구사는 고구려 유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보덕국은 10년간 존속하다가 왕족들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고, 일부 귀족들과 유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신라에 의해 진압되며 멸망한다. 보덕국의 유민들은 토사구팽의 신세가 되어 신라 5소경 중의 한 곳인 남원경으로 이주한다.

고구려 승려들에 의해서 백제 땅에 진구사가 건립되고, 약 250년 후 남북국시대 신라 말기인 880~900년 무렵에 이 진구사에 고복형 양식으로 높이 600cm가 넘었을 대형 석등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에는 출가한 왕자가 이 진구사의 주지를 역임하기도 했고, 권문세족의 세력가가 이 사찰을 권력의 배경으로 삼기도 했다. 고려시대에 전성기였던 진구사는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말기부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임실 진구사지 석등은 이야기해주고 있다.

아기자기한 대형 석등의 형태를 보다
 
진구사지 석등 옥개석 귀꽃
 진구사지 석등 옥개석 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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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의 상륜부에 있었을 일부 부재가 없어진 상태의 임실 진구사지 석등은 현재 높이가 506.7cm로 대형 석등이다. 원통형 간주석을 제외하고는 각 부재 형식이 8각 형태다. 석등의 부재는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며 지대석, 기단석, 하대석, 간주석,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 그리고 상륜부 하부인 노반과 앙화로 조성되었다. 이들 석재가 각각의 부재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여 형태와 기능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노반과 앙화는 상륜부의 일부로서 지붕 위의 장식.
옥개석은 지붕.
화사석(火舍石)은 불을 피우는 초롱.
하대석 간주석과 상대석, 이 세 부재가 합쳐져서 좌대(座臺)로서 받침돌.
기단석은 주춧돌.
지대석은 대지(垈地).
 
진구사지 석등 화사석 화창
 진구사지 석등 화사석 화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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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사지 석등 상대석 앙련
 진구사지 석등 상대석 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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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석등을 구성하는 부재를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자세히 살펴보니 석등의 형태가 무심한 석재가 아니라 아기자기한 부분들이 서로 협동하여 함께 서 있는 모양으로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의 옥개석 위에 놓인 노반과 앙화가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의 상륜부 양식과 유사한 형태로 보인다. 진구사 석등이 조성될 때 이 석등의 원형은 현재 임실 진구사지 석등에 남아 있는 상륜부 노반과 앙화의 위에 보륜 보개 보주 등이 더 조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석등은 연등 공양을 위한 불집인 화사를 구성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석등에서 형식과 내용의 구심점은 화사석이 마땅하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의 화사석은 높이 약 1m로서 전체 8면에 화창이 있는데 각 화창은 폭이 25cm 높이 68cm쯤 된다.

지대석 상면에서 약 250cm 높이의 상대석 앙련 무늬 윗부분에 구멍이 하나 있다. 화사석 등잔에 기름을 채울 때 활용했던 사다리 걸개 구멍으로 보인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화사석의 창문 하나를 여닫으며 석등 안의 등잔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등잔에 기름 채우기에 정성을 다했을 것이다.

이 석등에 불을 밝혔을 때는 8면의 직사각형 화창에 나무 창문틀이 설치되고 비단을 종이처럼 곱게 바른 창문으로 장식하였을 터이니 그 화려했을 장면을 상상하면 즐겁다.

이 지역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 석등에 등불이 밝혀지고 약 550년 동안 밤낮으로 등불이 타올랐다고 한다. 이 석등의 불빛이 서울까지 비추었다는 과장된 표현의 이야기도 전한다. 서울이라면 신라의 경주, 고려의 개성, 조선의 한양 중에서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가늠하기 어렵지만, 진구사의 전성기에 이 사찰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로 생각된다.

아름다운 문양에서 장엄한 의미를 찾다
 
진구사지 석등 간주석 일월 원주
 진구사지 석등 간주석 일월 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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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구사지 석등 하대석 복련 귀꽃
 진구사지 석등 하대석 복련 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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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장엄(莊嚴)'은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 엄숙하다는 의미다. 그러나 불교 용어로는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국토를 장식하거나, 공덕을 훌륭하게 쌓거나, 향이나 꽃을 부처에게 공양하거나, 악한 것으로부터 심신을 삼가 보호하는 것 등 넓은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사찰에 있는 탑, 부도, 석등 등의 석재 표면에 문양을 아름답고 정성껏 장식하는 것도 장엄의 범주에 속하는 것 같다. 임실 진구사지 석등도 기단석, 대석, 옥개석 등 부재에 여러 가지 문양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정성을 다하여 새겨서 장엄하다.

지대석은 순수한 땅의 역할이니 문양이 없는 것이 당연하겠다. 기단석의 8면에는 코끼리를 상징하는 안상(眼象)이 각각 조각되었다. 하대석에는 복련이 8면에 새겨졌고, 나선형과 연꽃 문양을 갖춘 삼산형 귀꽃이 8곳에 솟았다. 하대석 상부에는 운문(雲紋)이 있어 구름무늬 뭉게뭉게 피어올라 하늘의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간주석은 원통형 고복형으로 이 지역과 가까운 구례 화엄사, 담양 개선사지, 남원 실상사의 석등에서 공통되는 양식이다. 간주석을 중심으로 상대석 하부에도 운문이 피어오르고 있어, 원통형 간주석이 해와 달이 공전하는 하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간주석의 중앙 부분을 자세히 보면, 중앙 하부에는 앙련이 중앙 상부에는 복련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등의 주제이며 목적이라고 할 화사석에는 문양이 안 보인다. 이곳은 등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공간이므로 순수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최상의 장엄일 수 있어서가 아닐까? 화사석 위의 옥개석 추녀에는 하대석의 귀꽃보다 더 선명하고 우뚝하게 삼산형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옥개석의 상부에도 복련이 겹으로 조각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 남원 실상사 석등과 임실 진구사지 석등과 같이 균형미 있고 아름다운 대형 석등들이 남북국시대의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시대에 조성된 것이 역설적이다. 토지제도는 문란해졌고 사회의 기강은 해이해졌다. 내우외환과 거듭된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든 시대에 이러한 석등이 조성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하다.

석등은 등불이면서 공양으로 실용성과 상징성을 갖고 있다. 백성들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고, 세상의 그늘진 곳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석등의 불빛은 신라 말기에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질서를 염원하는 백성들의 희망과 호족 세력의 포부에 호응했을 것이다.

호족 세력들은 풍수지리설과 선종 불교의 교리를 자양분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해와 달의 공전을 상징하는 원형 테두리를 장엄하게 휘두른 고복형 석등 양식이 출현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농촌의 여느 기와집 지붕보다 높은 대형 석등을 보면서 빈녀일등(貧女一燈)의 진솔한 정성을 떠올린다. 불이 밝혀진 석등을 향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마음의 등불을 밝혔을까? 이 석등의 섬세하고 아름답고 정성스러운 문양은 결국 수많은 사람의 정성 어린 염원이고 간절함의 표현일 것이다. 빈녀일등의 정성스러운 점등(點燈)은 언제나 마음속에서 환하게 가능하다.

신록이 여울처럼 물결치는 5월 하순의 텅 빈 절터에 석등이 연꽃같이 진실하고 장엄하다. 잔디밭에는 토끼풀이 함께 자리 잡았고, 수없이 피어난 하얀 꽃봉오리들이 더없이 평화롭다.

태그:#임실 진구사지 석등, #고복형 석등, #석등 장엄, #석등 간주석 원형 테두리, #고복형 대형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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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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