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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일요일 오후 9시 40분. 스포츠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2>가 끝나는 시간(3월부터 최근까지는 <뭉쳐야 쏜다>였다). 아이는 TV 전원을 끄고 거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골라 남편과 안방으로 들어왔다. 나도 보고 있던 노트북을 덮고 책을 꺼내놓은 뒤 휴대폰 타이머로 15분을 맞추어 놓았다. 올해 3월부터 우리 가족은 매주 일요일 밤마다 한 공간에 모여 책을 읽는다.

아이와 남편은 침대 위에 나란히 엎드려 책을 펼쳤다. 아이는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왕도둑 호첸플로츠>를 읽었다. 책은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는 아홉 살 아이는 오늘도 자기 입맛에 맞는 책을 골라 깔깔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일주일에 한번 15분 책읽기
 
'온가족 책읽기' 시간에 읽은 책입니다.
 "온가족 책읽기" 시간에 읽은 책입니다.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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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항상 그렇듯 나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여 그것을 읽는다. 오늘 내가 건넨 책은 <별것 아닌 선의>였다. 남편은 책날개에 써진 작가 소개부터 천천히 읽어나갔다. 나는 두 남자로 꽉 찬 침대를 뒤로하고, 내 책상 앞에 앉아 오래전 읽었던 <달과 6펜스>를 다시 읽었다. 읽다가 좋은 부분이 나오면 밑줄을 쭉쭉 긋고 책 귀퉁이를 접었다.

'삐 비비빅-' 알람이 울렸다. 온가족 책읽기 시간은 단 15분이다. 물론 이 짧은 시간 동안 책 한 권을 다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10장 내외 정도는 읽는다. 신기하게도 딱 15분만 읽자고 정해놓으면 그 어느 때보다 책이 잘 읽힌다. 아예 읽지 않는 것과 조금이라도 읽는 것, 혼자 읽는 것과 온가족이 함께 모여 읽는 것, 이것은 작지 않은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는다.

알람이 울렸지만 모두 책에서 선뜻 눈을 떼지 않았다. 5분쯤 더 지나서야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부터 얘기할까요?"

우리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다. 책을 읽고 난 뒤 대뜸 생각과 느낌을 말해보라고 하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그보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나 문장을 말하자고 하면 훨씬 쉬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책 이야기를 풀어간다.

"호첸플로츠가 훔친 물건 중에 제가 감탄했던 게 있어요. 노래가 나오는 커피 기계에요. 내가 그걸 가지면 어떨까 상상해봤어요."
"우와. 커피에 음악도 담아주는 거네. 멋지다!"
"그거 생기면 아빠도 한 잔 타주라."


우리의 책 이야기는 이런 식이었다. 책을 읽고 그럴듯한 독서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책에 나온 내용을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수다를 떤다.

"엄마가 읽은 책은 실제 작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소설이야. 고갱이라고. 가만, 그러고 보니 너 아기 때 처음 갔던 전시가 고갱 전시였다. 여보 기억나요? 얘 힙시트에 안아서 서울시립미술관에 갔었잖아요."
"응. 맞다. 너 고갱 그림 봤었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 작품도 봤어."
"진짜요?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마 즐겁게 봤을 거예요."


이렇게 책을 매개로 얘기하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풍성해져 우리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기도 했다. 월요일을 코앞에 둔 심란한 일요일 밤이었지만 우리는 추억을 말하며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우리의 수다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아빠 차례에요."
"아빠는 책에서 이 문장이 좋았어. 성냥팔이 소녀가 켠 성냥처럼 지속 가능하지 못한 찰나적 온기에 불과할지언정 별것 아닌 순간들의 온기가 우리의 매일에 '하나 더' 주어지면 좋겠다."
"여보. 나도 그 문장이 좋아서 밑줄 그었잖아요. 이 작가 글 너무 좋지 않아요? 이 책 읽으면 작은 거라도 착한 행동을 하면서 살고 싶어진다니까요."
"아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공기요? 공기가 생긴다고요?"(아이는 '온기'라는 단어를 '공기'라고 들었다)


아이의 질문에 우리는 '온기'가 무엇인지, 우리 각자 따뜻함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어주는 시간

'온가족 책읽기'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아이가 좀 더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한 주 두 주 하다 보니 온가족 책읽기는 어느새 우리 가족만의 단단한 약속이 되었다.

우리는 싸우거나 혼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도 변함없이 일요일 밤이면 함께 책을 읽었다. 누구 한 사람 오늘은 못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온가족 책읽기를 하고 나면 속상하고 서운했던 마음이 저절로 누그러졌다. 이제는 어떤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가족이 함께하는 이 시간 자체가 좋아서 하고 있다.

얼마 전 나는 사샤 세이건이 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라는 책을 읽고, 우리가 매주 하는 '온가족 책읽기'가 우리 가족만의 의식(ritual)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작가는 한 주의 의식을 통해 삶의 패턴이 생기고 공동체와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했다. 토요일 아침마다 가족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작가는 이런 의식이 가족 간의 헌신과 기쁨을 정기적으로 재확인하는 절차가 되어 준다고 말했다.
 
아이가 그린 우리 가족 생활 모습입니다.
 아이가 그린 우리 가족 생활 모습입니다.
ⓒ 진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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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아이가 '우리 가족생활 모습 그리기' 숙제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렸을까 궁금해 들여다보니 아이는 우리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책 읽는 장면을 그렸다. 아기자기하게 정다운 모습으로 그려 놓은 것을 보며 온가족 책읽기가 아이에게 즐거움과 든든함을 주고 있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졌다.

매일도 아니고 일주일에 한 번이다. 1시간도 아니고 15분이다. 가족이 함께 모여 책을 읽고 가벼운 수다를 떠는 것. 나는 감히 이 작은 의식이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어주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이는 문득문득 책을 보다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면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다가와 종알종알 이야기해준다. 남편은 '<코스모스>를 한번 읽어 볼까'라는 내 말 한 마디에 그 책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신이 나서 말한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일상 속 작은 의식으로 조금 더 나아지고 있었다.

태그:#가족, #책읽기, #리추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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