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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블럭 위에서 사람들 여럿이 줄로 묶인다. 곧 어디론가 끌려간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이 바라보며 어루만지던 '비닐'들도 함께 이동한다. 바람을 채운 커다란 비닐은 돼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관객참여형·이동형 오브제극 <고기, 돼지>의 일부분이다.

<고기, 돼지>는 '돼지'가 '고기'가 되기까지의 가려진 과정을 드러내고, 생명을 먹는다는 것,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이 극의 관객인 동시에 극을 완성하는 배우로서 참여한다. 공기를 채워 묶은 비닐은 돼지의 생명이 얼마만큼의 가치와 무게를 갖는지 표현하는 오브제이다.  
 
참여관객과 관계를 맺고 함께 투어를 떠나는 반려돼지 오브제 ‘작은 돼지’.
▲ <고기, 돼지>의 오브제 중 하나 참여관객과 관계를 맺고 함께 투어를 떠나는 반려돼지 오브제 ‘작은 돼지’.
ⓒ 바람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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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어릴 적 머릿속에서 '고기'로 설정한 '돼지'는 정말 돼지에 대한 인식이었을까? 인간에게 동물을 식용과 반려용으로 구분할 권리가 있을까? 동물을 어떤 '수단'으로 정의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이 극을 창작, 상연하는 '바람컴퍼니'는 일상 속에서 생겨나는 의문을 관객과 나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공연 창작자 한윤미씨, 김혜진씨(현재 육아휴직 중), 이리씨가 주축이 되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공연을 만든다. 바람컴퍼니의 공연은 주로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관객과의 접촉을 통해 개인적 경험 속에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고기, 돼지> 역시 주로 실외에서, 장소의 특성을 극에 활용하며 진행한다. 관객은 억지로 살찌워진 돼지의 크기를 보고, 반려돼지 오브제를 쓰다듬고, 축사의 비좁은 감각을 느끼며 오감으로 극을 경험한다.

생소하게도 흥미롭게도 느낄 수 있는 공연에 참여한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환경 관련 모임에서 만나 이들의 작업 이야기를 들은 뒤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지난 4월 20일 줌으로 한윤미씨를 처음 만난 후 온라인으로 꾸준히 소통을 이어왔다. 아래는 그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고기, 돼지'의 출발은 2010년 발생한 구제역 사태
 
관객들은 돼지에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돼지고기 부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돼지고기 함유 식품 전시를 관람하고, 돼지의 지능과 특징·야생 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돼지가 되었다고 가정하여 농장에서 도축장까지 가는 과정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구제역 발생 상황을 겪으며, 살처분 현장(공연 상황)을 함께 목격한다.
▲ 공연 모습 관객들은 돼지에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돼지고기 부위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돼지고기 함유 식품 전시를 관람하고, 돼지의 지능과 특징·야생 돼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돼지가 되었다고 가정하여 농장에서 도축장까지 가는 과정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구제역 발생 상황을 겪으며, 살처분 현장(공연 상황)을 함께 목격한다.
ⓒ 바람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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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초반에 작은 돼지 오브제에 이름을 붙이고, 산책하고 사진 찍기 미션들을 하면서 관계를 맺어요. 그러다 (공연 상황의 하나로) 구제역이 터지면 감정과 무관하게 두고 떠나야 되거든요. 끝나고 피드백을 받을 때 '내 돼지 이름은 뭐고…' 하는 얘기가 정말 많이 나왔어요.

관객들이 참여하는 중간 과정을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었고, 한 아이는 중간에 돼지가 불쌍하다고 슬퍼해서 부모님이 데리고 나가기도 했어요. 그래서 공연은 전체관람가인데 참여 연령을 높여야 하나 하는 논의도 내부에서 있었어요.

내용은 세지만 공연에서 그걸 교조적으로 가르치려고 들거나 비난하는 것은 아니고, 실상을 전달하도록 만들었어요. 자신들을 좀 더 거칠게 대해도 되지 않느냐는 반응도 있었어요. 묶거나 밀어서 이동할 때 실제로 돼지들은 정말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지니까요."
 

한씨는 공연을 구상하게 된 최초의 계기가 2010년 발생한 구제역 사태였다고 말했다. 

"TV에서 돼지들을 산 채로, 포클레인으로 땅에 묻는 장면이 여과 없이 나왔고, 그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전까지 전 '돼지를 좋아한다'고 말해 왔는데 그건 '돼지의 살'을 좋아한다는 의미였어요. '살과 고기, 그 사이'에 뭐가 있는 건지 의문이 생겼죠."

공연 준비 과정에서 폭염에 농장을 답사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도축 과정이 담긴 영상을 보는 일 등 존재하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감정적 소모가 커서 그만큼 준비 기간이 오래 걸렸다.

실제 공연을 올리게 된 것은 지난 2017년 10월.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싹브리핑 제1취수장에서 쇼케이스를 열었다. 이후 2018년 10월 서울거리예술축제, 2019년 5월 수원연극축제 등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바람컴퍼니’의 대표작. 2018년 서울거리예술축제에 공식 참가했고 2019년 수원연극제의 공식 초청을 받으며 예술성과 동시대성을 인정받았다.
▲ 관객참여형·이동형 오브제극 <고기, 돼지> ‘바람컴퍼니’의 대표작. 2018년 서울거리예술축제에 공식 참가했고 2019년 수원연극제의 공식 초청을 받으며 예술성과 동시대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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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채식이라도 시작해야 해요"

한윤미씨는 관련 책과 영상을 보고 목장 답사, 인터뷰 등을 진행하면서, 공장식 축산업이 환경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 전 세계 곡식 생산량의 85%와 지구상 토지 면적 중 1/4 이상이 가축 사료 생산에 소비된다.

축산업으로 발생하는 온실가스는 모든 교통수단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를 합친 것보다 많고, 소고기 한 근을 만드는 데 1만L 이상, 햄버거 하나에 2500L의 물이 쓰인다. 이외에도 생물 종 다양성 위협, 계속되는 바이러스의 출현 등 수많은 문제가 동물의 고통과 착취에 맞닿아 있다.

'알고 먹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작업은 한윤미씨의 생활을 바꾸었다. 식생활과 소비생활에서 비건(Vegan, 동물로 만든 제품과 동물을 착취해 얻은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사람이자 소비자운동)을 지향하게 되었고, SNS에서 '풀뜯는_바람컴퍼니' 계정을 통해 가볼 만한 비건 식당과 카페를 소개하고 있다.
 
비건 음식은 맛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바꾸기 위해 SNS 사용자들은 ‘비건도맛있다’ ‘비건도맛있어요’와 같은 태그를 단 게시물들을 올리기도 한다.
▲ 바람컴퍼니가 소개하는 비건 맛집들. 비건 음식은 맛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을 바꾸기 위해 SNS 사용자들은 ‘비건도맛있다’ ‘비건도맛있어요’와 같은 태그를 단 게시물들을 올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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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속 지구에서 살려면 채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연도 마찬가지예요. 최근에 미세먼지 때문에, 또 11월에 태풍이 와서 축제가 취소되는 일들이 계속 있거든요.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을 뿐이지 실제로는 기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직업에도 엄청나게 영향을 미치는 거죠. 연결점을 찾게 되면 스쳐 지나가던 정보가 와 닿을 것이고, 생각에도 전환점이 생길 것 같아요. 비건까지는 아니더라도 불완전한 채식이라도 시작해야 해요."

이야기를 들으며 해양학자 실비아 얼의 말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모든 걸 할 순 없어요. 하지만 누구나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루 한 끼 혹은 일주일에 하루라도 고기 없는 식사를 하는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고 그 속에서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바탕을 만드는 것이다.

바람컴퍼니의 고민 중 하나는 '환경을 생각하며 지속가능한 작업을 어떻게 꾸려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우선은 작업에 쓰이는 재료를 크루얼티 프리(Cruelty-Free, 동물실험을 거치지 않고 동물성 재료가 사용되지 않은 제품이나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의미)로 교체했다. 비슷한 관심사가 있는 작업자들과 만나 환경 관련 스터디모임도 하고 있다.

긴 고민이 필요한 문제도 있다. 한 예로 <고기, 돼지> 공연의 주요 오브제를 만드는 비닐의 대체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정해진 예산에서 부피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재료가 비닐이었고, 작품의 의미와도 잘 맞았다. 예술적 표현과 지속가능성을 모두 충족하도록 계속해서 해결책을 찾고 있는 부분이다.

인간과 동물, 기후위기, 계속되는 이야기
 
사회에는 바꾸기 어려운 것들이 많지만, 바꾸려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것들이 여전히 더 많다. 삶과 사회에 대한 '바람'을 담고 있다는 '바람컴퍼니'라는 이름이 인상 깊은 이유다. 새로운 시도로 공연예술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작자 한윤미씨가 앞으로 만들 극은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기후변화와 관련된 극을 만들어보고 싶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기후 우울로 빠지거나 무력감에 젖지 않고 작업과 기후위기 사이에서 예술적 균형을 잘 만들고 싶어요. 그래야 지속 가능한 창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올해 <고기, 돼지> 공연 계획은 없지만, 바람컴퍼니는 10월 초 수원연극축제에서 상연할 새 공연을 기획 중이다. 공연 장소인 탑동 시민농장 내 '실험목장 AGIT'는, 과거 서울대 농과대학의 실험목장(동물실험에 쓰이는 동물들을 기르던 목장)으로 쓰인 공간을 리모델링한 문화공간이다.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져, 의미 있는 장소에서 풀어놓는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고기, 돼지> 공연 후 아동 관객 사이에는 "이제 고기 안 먹을래!"와 "우리 고기 먹으러 가자"라는 반응이 공존했다고 한다. 그러나 육식에 치우친 식문화는 맛과 건강 문제를 넘어, 사람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미래에도 선택권을 누릴 수 있을지'가 결정되는 셈이다.

'비건의 핵심은 거부가 아니라 연결에 있다'.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 활동가이자 책 <아무튼, 비건>의 저자인 김한민 작가의 말이다. 어린 시절 동물을 '물건이나 고기'로 타자화하기 이전에 가졌던 마음, 자연과 지구상의 존재들에 대해 타고난 '연결감'을 회복하자는 뜻이다. <고기, 돼지> 공연을 보다가 마음이 아파 차마 돼지들(오브제)을 따라가지 못한 어린 관객들은 바로 우리가 잊고 살아온 자신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바람컴퍼니'의 페이스북 계정: facebook.com/baramcompany
'바람컴퍼니'의 인스타그램 계정: instagram.com/baramcompany7


태그:#공연, #바람컴퍼니, #채식, #비건,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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