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굴에 앉아 잠시 상상해 본다. 여기 있던 남자는 종일 깜깜한 굴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간혹 토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가족일지, 강제노역에 끌고 가려고 온 일본군일지 몰라 긴장했으리라. 문이 열릴 때마다 계단 위에서 들어오는 빛 뒤로 보이는 두 다리가 누구의 다리일지 남자는 조마조마했으리라.
이곳은 나주시 향교길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에 있는 일제시대 토굴이다.
사위는 어둡고 땅에 있는 등이 나무를 밝히고 있다. 나무 뒤로 불 밝힌 집이 보인다. 멀리 떠나 온 사람이라면 향수에 젖을지도 모른다.
죽은 이를 버리거나 나무에 매어놓는 풍장(風葬)을 하던 황량한 이곳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와 집을 지었다. 이곳은 호랑가시나무 군락지이기도 했다. 서양에서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기에 선교사들은 호랑가시나무에 애정을 쏟았다.
1904년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을 초대해 첫 예배를 드렸다. 선교사들은 주변에 병원과 학교를 세웠고 강연회와 가극대회를 열었다. 이후 김현승·정율성·정추 등 많은 예술인이 이 일대에서 나왔다.
이곳
은 호랑가시나무 군락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문화예술마을이다.
담장은 쌓았으되 담장 밑으로 물이 흐른다. 담장 밑으로 담장 안 정자가 보인다. 위태로워 보이지만 지금껏 무너진 적이 없다고 한다. 찾아보니 이 담장이 왜 안정적인지 물리학을 통해 설명한 논문도 있다. 선조들의 슬기와 지혜 덕분이라는 정도로만 알고는 그저 몇 번이고 담장만 본다. 보면 볼수록 기묘한 담장이다.
이곳은 전남 담양군 소쇄원이다.
국내 여행을 한다는 것
'한국 영화 보러 극장에 가다니 돈이 아깝다'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한국산보다 외제가 좋다는 게 '상식'이던 때도 있었다. 다 지난 일이다. 그런데 지금도 변함없는 것이 하나 있다. 제주도 갈 돈으로 동남아 여행 간다는 여행의 '정석' 말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해외로 못 나가서 제주도로 몰리지만 이 사태가 끝나면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밖으로 나가는 행렬이 다시 이어질지 모른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자부심이 넘쳐나지만 여행만은 여전히 한국산이 대접 못 받는다. 주목 받는다 해도 기승전 맛집으로 끝나거나 예쁜 카페가 있다더라에서 그친다.
코로나 4차 대유행이 비수도권으로 확산하기 전이던 지난 11~13일 여행의 변화를 물색하는 고재열씨가 이끄는 남도인물기행에 다녀왔다. 고재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맞다. <시사IN>의 그 고재열이다. 기자 그만두고 '여행 감독'이 됐다.
나는 이 여행에서 여러 낯선 공간 속에 머물렀다. 일제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에서 잠을 자고, 저 끝에 무엇인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하는 길을 걸었다. 사공의 뱃노래에 이별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목포 원도심을 거닐기도 했고 동학 농민군의 꿈이 좌절된 나주에서 그들의 흔적을 둘러보기도 했다.
사람을 만나다
낯선 사람도 만났다. 소쇄원에서 몇 달간 살며 마당을 쓸었다는 전고필은 소쇄원을 말 그대로 속속들이 안다. 향토사 전문책방 '이목구심서'를 운영하는 그는 쇠락하는 광주 대인시장에 예술가와 상인이 공존하는 모델을 도입해 대인예술시장으로 거듭나게 한 기획자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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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부서지는 소쇄원에서(http://bit.ly/4Bw4aS)
광주 남구 양림동에서 지은 지 70여 년이 된 선교사 사택들을 호남신학대학으로부터 임대해 예술가를 위한 창작소로 운영하는 정헌기(호랑가시나무 창작소 대표)도 만났다.
그의 계획에 따라 원요한(미국명 언더우드) 선교사 사택은 창작소가, 사택 옆에 딸린 차고는 전시실이, 유수만(미국명 뉴스마) 선교사 사택은 게스트하우스가 되었다. 정헌기는 광주의 근대를 주도한 선교사와 학생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넘쳐나는 양림동만의 콘텐츠를 개발해 확산시키는 데 관심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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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포터' 지팡이 나무와 광주 양림동의 인연(http://omn.kr/1gi2g)
'1939년 나주 근대 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는 문구를 내건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의 남우진(농업회사법인 목서원 대표)과의 만남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전주에서 기업컨설팅 일을 하던 남우진은 어느 날 친구 따라 나주에 왔다가 고택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30년 가까이 방치된 집들을 매입해 외형은 살리고 내부는 고쳐 지금의 '마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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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이 택한 나무가 마당에... 안팎으로 빛나는 정원(http://omn.kr/1raec)
목포 원도심을 안내한 홍동우(기획사 공장공장 공장장)의 사연도 재미있다. 그는 서울살이에 지쳐 지방 소도시에서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함께 살 계획으로 목포에 내려왔다. 어느 날 목포에서 유명한 '오거리식당'에 밥 먹으러 왔다가 식당 주인의 딸을 보고 반해 지금은 이 집의 사위가 됐다.
홍동우가 만든 프로그램 '괜찮아 마을'은 일시적(6주 혹은 1주)으로 목포 살이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107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 중 33명이 창업을 하거나 취업하거나 크리에이터로 일하며 목포에 정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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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서울'을 꿈꾼다? 지역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http://omn.kr/1mk1q)
목포 원도심 여행 중 팥빙수를 먹으려고 들어간 한마을떡집도 잊을 수 없다. 올해 87세 된 강정숙 할머니가 직접 떡도 만들고 커피도 내리고 팥빙수도 판다. 82세에 바리스타 자격을 땄다고 한다. '오지게' 푸짐한 눈꽃빙수가 5천 원이다.
이화여대에 합격했으나 입학금 6만8400원(잊을 수가 없다고)이 없어 등록을 못 한 일, 배달 일을 하던 신문사 지국장이 이 말을 듣고 목포 시민에게 호소해 입학금을 모아준 일, 그 입학금을 들고 서울까지 갔는데 등록 기간이 지나 불합격 처리된 일, '그래 잘 됐다, 집도 어려운데 내가 무슨 대학'하는 생각으로 목포로 되돌아온 일이 할머니 입에서 줄줄 흘러나온다.
사람들을 만나고 보니 이번 여행 명이 왜 남도인물기행인지 알겠다. 고재열은 "인문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그려낸 무늬의 다양한 결을 읽어낼수록 삶이 풍요해진다"라고 말했다.
고속도로 타고 바로 숙소로 가서 하룻밤 먹고 잔 뒤 다음 날 주변 맛집에서 식사하고 올라오는 길에 괜찮은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좋지만(코로나 확산으로 이마저도 어렵지만)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인간이 그려낸 무늬의 다양한 결을 읽어보는 사람 여행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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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감독 고재열의 길 위의 살롱 & 어른의 모험
https://poisontongue.tistory.com/2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