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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이 우리의 시장 풍경을 보고 "솜밭 같다"고 할 정도로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데요. '평화를 상징하는 민족이라서'라고 그 이유를 말하기도 합니다. 흰색은 서양에선 평화를 상징하는 색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민족이 정말 흰색이 좋아 그렇게 즐겨 입었던 걸까요?

흰색이 서양에선 평화를 상징하는 색이라지만 우리에게는 죽음, 즉 장례를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죠. 조선시대 사람들은 8촌의 장례는 물론 왕과 왕실 사람들 장례에도 예를 갖춰야 했습니다. 상복 입을 날이 많았던 거죠. 그런데 일반 백성들은 상복을 따로 갖춰둘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이고, 겸사겸사 입을 수 있는 흰옷을 즐겨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요.

흥미로운 사실은 백성들의 이와 같은 흰옷 착용을 국가에선 골칫거리로 여겼다는 겁니다. 상복과 일상복의 구분이 없으면 예법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였는데요. 급기야 세종대왕이 "노란 옷은 중국에서 흉복으로 간주하고, 빨간 옷은 여자 옷 같고, 남색 옷은 일본 옷 같으니 안된다"며 동방을 상징하는 푸른 옷 입기를 권장하는 등 일종의 캠페인까지 벌일 정도였다고 해요.
 
<조선 잡사> 책표지.
 <조선 잡사> 책표지.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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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잡사>(민음사 펴냄)에 의하면 조선시대 있었던 직업은 150~200가지. 그중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꼭 알아야 할 직업 60여 가지를 선정, 그 직업을 둘러싼 것들을 들려주는데요. 책에 의하면 세종대왕의 노력에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조선 후기에까지 즐겨 입는 옷이 된 것은 '염색 옷은 쉽게 입지 못하는 비싼 옷'이라서, 즉 비용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모든 염료는 지치(자주색), 홍화(잇꽃)나 오미자(붉은색), 회화나무 꽃이나 치자(노란색), 쪽풀과 이끼(푸른색) 등처럼 자연에서 얻었습니다. 염료를 구하는 것부터 많은 노동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은 좀 많이 필요한가요.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싼 옷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염색은 '염모'라고 하는 여성 기술자가 맡았다. 사실 염색은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그런데도 염색이 여성 업종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여성이 입을 옷을 남성이 손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인 듯하다. 남녀의 옷을 한데 보관하는 것조차 꺼리던 시절이다. 고종 때의 재정 백서 <탁지준철>에 따르면 염모에게는 '수공포'라고 하는 공임을 지급했다. 비단 한 필(20미터)을 염색하면 삼베 석 자 다섯 치(약 1미터)를 끊어준다. 비단 열 필을 염색해야 삼베 한 필 될까 말까다. 쌀 대여섯 말 가격이다. 중노동의 대가치고는 결코 많지 않다. 그래도 달리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는 여성에게는 감지덕지였다. - <조선 잡사> 22쪽.
 
염모편에서 읽은 일화 하나. 호조의 아전 김수팽이 선혜청 아전으로 근무하는 동생 집에 놀러 갔는데 마침 마당에 큰 항아리들이 줄지어 있어서 물어보니 "염색을 부업으로 하고 있어서". 이에 김수팽은 불같이 화를 내며 항아리를 모두 엎어버렸다고 합니다. "나라의 녹봉을 받는 우리 형제까지 염색업을 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가 이유였습니다.

위 인용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염색 대가는 염료 값은 고사하고 품값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야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몸을 깎아 먹고 사는, 즉 생계형 업종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일을 넉넉하진 않지만 굶지는 않는 자신들이 부업으로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고요.

물론 현대의 정서로는 공감받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기만 하나요? 묵묵한 감동으로 와 닿았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사회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과 공직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마음가짐이나 당연한 도리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어서입니다.

고전을 연구하는 선후배 4명의 의기투합으로 시작된 책입니다. 역사는 물론 관련 지식이 풍부한 것은 물론입니다. 게다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선시대 직업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뭔가 알아가는 재미가 남다른데요. 이처럼 관련 직업을 둘러싼 일화까지 들려주곤 해 훨씬 의미 있게 와 닿곤 했습니다.

연결 지어 읽으면 훨씬 이해가 쉽고 맛깔스럽게 읽히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 책도 그런 경우. 염모와 연결해 읽으면 좋을 직업은 '가체장' 편입니다. 머리를 치장하는 가체 역시 비싸다 보니 염색 옷과 함께 조선시대 여성들이 꼭 갖고 싶은, 즉 잇템이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조선시대 복장을 이해하는데 꼭 알아야 할 이야기들이고요.
  
1922년, 영친왕 부부가 장남을 데리고 고국을 방문, 당시 사진이다. <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전시 당시 영상 화면을 찍은 것이다.
 1922년, 영친왕 부부가 장남을 데리고 고국을 방문, 당시 사진이다. <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전시 당시 영상 화면을 찍은 것이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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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영친왕 부부가 고유혼례 차 고국을 방문, 순종을 알현할 때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한 영친왕비 대수머리 가체.  <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촬영으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소장이다.
 1922년 영친왕 부부가 고유혼례 차 고국을 방문, 순종을 알현할 때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한 영친왕비 대수머리 가체. <영친왕 일가 복식(2010.4.27~5.23)> 촬영으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소장이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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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922년에 영친왕이 영친왕비와 장남을 데리고 고유혼례 차 고국을 방문, 당시 영친왕비가 순종을 알현하며 적의와 함께 치장한 대수머리 가체를 옥(玉)장 김영희 선생이 재현한 것인데요. 당시 영친왕비가 착용한 가체는 '궁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격식 있는 머리 양식'이라고요. 치장도 치장이지만 예의를 다하려면 당연히 갖춰야 하는 그런 머리 장식이었던 거죠.

그런데 가체는 여염집 여성들에게는 부를 과시하는 사치품이 되었습니다. 신윤복의 <미인도>나 <단오풍정> 속 여인들의 가체는 그나마 소박한 편, 가체를 한 채 절을 하려다가 목뼈가 부러져 죽은 며느리까지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점점 커졌다고요. 이런 가체는 당시 얼마였을까? 700냥 정도(당시 어지간한 초가집 한 채는 100냥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가체를 팔던 곳은 체괄전이라는 가게, 그리고 혼례 때 신부의 단장을 돕던 '수모(오늘날 웨딩플래너)'나 중매쟁이인 '여쾌'가 가지고 다니며 팔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염모와 가체장, 수모를 연결해 읽으면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훨씬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소개할 직업을 고른 기준은 세 가지다. 첫째 조선사람의 삶을 이해하는데 요긴한 직업. 둘째, 현대 독자에게 덜 알려진 직업. 셋째, 하는 일이 흥미로운 직업이다. 농부나 관리처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직업은 제외했다. 영화와 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의원, 기녀, 의녀, 화원, 다모 역시 제외했다. (…)이색적인 직업만 소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조선사람들이 어떤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으며, 그러한 직업이 등장하게 된 사회, 문화적 배경이 무엇인지를 종합적으로 살피고자 했다. 이로써 시장, 뒷골목, 술집, 때로는 국경과 바닷속을 누비던 조선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독자 스스로 그려볼 수 있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일상을 책임진 나무꾼, 똥장수, 채소장수를 빼놓지 않고 살핀 까닭이다. - <조선 잡사>를 펴내며에서.
 
외에도 ▲원하는 곳 어디든 최대한 빨리 달려가 소식이나 물건을 전해주던 인간 메신저 보장사 ▲당시, 아마도 수익이 가장 좋았다는 '집주름(혹은 사쾌, 가쾌)라 불린 부동산 중개업자 ▲글씨를 대신 써주는 것으로 글씨 못 쓰는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던 서수 ▲과거시험을 대신 치러주던 거벽 등 조선시대 다양한 분야의 직업 그 면면들을 들려줍니다.

그동안 조선시대 직업에 대해선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으로 먹고살아야 하나? 즉 직업은 우리 삶의 가장 큰 이유이자 진실인만큼 당시 사람들의 삶이 가장 솔직하고 분명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을 것인데도요. 조선시대 사람들이 선망한 직업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어떤 극한직업들이 있었을까요? 직업을 통해 알아가는 조선사람들의 삶이 훨씬 생생하게 와닿아 읽는 재미도 남다른 책입니다. 

조선잡사 - ‘사농’ 말고 ‘공상’으로 보는 조선 시대 직업의 모든 것

강문종, 김동건, 장유승, 홍현성 (지은이), 민음사(2020)


태그:#조선 잡사, #조선시대 직업, #가체장, #염모(염색), #영친왕비 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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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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