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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나서는 길이었다. 아파트 출입구 근처에서 개 두 마리와 산책 나온 중년 남자가 허리를 굽혀 개 배변을 치우고 있었다. 동선이 겹치지 않게 약간 돌아서 개들 옆을 거의 지나치던 중, 갑자기 뒤에서 한 마리가 거세게 짖으며 달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황급히 뒤로 돌아보니 주인이 잡고 있어야 할 줄이 바닥에 끌려오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사이 다른 개까지 왕왕거리며 내 쪽으로 돌진해 왔다. 
 
  개들이 갑자기 쫓아와 당황스러웠다.
  개들이 갑자기 쫓아와 당황스러웠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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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어머, 얘네들 왜 이래요?" 

기겁을 하며 말을 겨우 뱉었는데, 개 주인은 아랑곳없이 무심히 다가와 놓친 개의 줄을 잡아 올리며 한 마디 하고 만다. 

"얘네들이 원래 안 그러는데, 오늘은 왜 이러지?" 

사과도 아닌, 개들을 타이르는 말도 아닌, 혼잣말 같은 말이었다. 주인이 줄을 손에 쥐자 개들이 조용해졌다. 개 주인의 말이 내심 마뜩잖으면서도 큰 탈 없이 상황이 종료되어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가던 길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섯 발자국 즈음 걷고 나자, '아니,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하고는 어떻게 사과 한 마디 없지?' 싶은 마음에 개 주인이 원망스러워졌다. 조금 더 생각하니, "아유, 깜짝 놀라서 십년감수했어요!" 같은 말도 못 하고 자리를 뜬 스스로가 못났다고 느껴져 괴로웠다. 왜 사과를 요구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 바로 안 나왔을까? 불편한 상황에서 적절한 말을 제때 하지 못해 괴로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지인들에게 괴로움을 토로하니 그들도 비슷한 적이 있다고 공감한다. 직장 동료나 상사의 무례한 태도가 불쾌하면서도 바로 지적을 못하고, 나중에야 '이렇게 말할 걸' 하며 자책할 때가 있다고 한다. 친구들을 만났다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아졌을 때, 친구가 은근히 나를 떠봤거나 조롱했음을 뒤늦게 인지하고는 그때서야 안 좋았던 감정의 실체가 서운함과 실망감인 줄 깨달았던 적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왜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제때에 알아차리고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 어려울까? 얼마 전 TV 프로그램 <대화의 희열>에서 우연히 듣게 된, 전 국민의 육아 멘토 오은영 박사의 설명이 마침 참고가 된다.

어려서 부정적 감정을 잘 수용받지 못하고 억압당하면 감정 발달이 미숙해진다고 한다. 감정 발달이 미숙하면 자라서도 부정적 감정을 세분화해 정확히 인지하기가 어렵고,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애매하니 제때에 그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충분히 공감 가는 설명이었다. 
 
   충동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키기
  충동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키기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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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한 감정 발달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잘못된 방법으로 감정을 다루다 결국 건강을 상하거나, 관계와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점이다. 부정적 감정을 무조건 억압하려고만 하면 '화병'같은 신체적 질병을 얻을 수 있고, 충동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 밖에 모르면 관계의 극심한 갈등과 단절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운전 중 끼어드는 차를 참지 못해 벌컥 화를 낸다거나 아이의 작은 실수에도 곧잘 분개해 버리고 마는, 흔히 겪는 다혈질이라는 성품이 사실은 감정 발달의 미숙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다. 

제때에 적절하게 잘 말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일상에서 부정적 감정표현의 좋은 사례를 많이 보고 접하며 배울 수 있다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불편한 내용이지만 조곤조곤 차분하게 대화로 풀어가는 법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대화를 일상에서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TV로 자주 보고 접하다 보면 머릿속에 기억되어 필요한 때에 잘 나올 것도 같은데 말이다. 

갈등 상황이나 불편한 상황에서 대화하는 프로그램은 재미가 없어 방송으로 만들 수 없다 하겠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우리는 진즉부터 골프며, 바둑, 요리, 각종 외국어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는 데 TV를 이용해 왔고, 요즘은 짧은 영상으로도 드로잉, 낚시, 서핑, 집안 청소 등 뭐든 보고 배울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별별 내용들 속에, 부정적 감정을 잘 다루는 대화법을 시연해 주는 프로그램이나 채널 하나쯤 있는 게 안 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산책하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내가 늘 해야 할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뜸 대차게 할 말을 하는 경우도 분명 있었다. 주민을 우습게 아는 관리소장에게 조목조목  따질 때도 그랬고, 가끔 과도한 며느리 도리를 요구하시는 시어머니에게 솔직한 말로 대답할 때도 그랬다. 담담한 어조와 적절한 말로 바로 대응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 바로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들에 대해서 미리 할 말을 연습했던 것이다. 

일단 하고 싶은 말들을 글로 썼다. 쓴 문장들을 고치고 생각날 때마다 수시로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마침 상황이 닥쳤을 때 연습하여 입력된 문장들을 담담히 읊었다. 그렇게 조곤조곤 말하는 성공이 몇 차례 있었다. 가슴이 너무 후련했다.
  
  <대화의 희열> 방송화면 캡쳐
  <대화의 희열> 방송화면 캡쳐
ⓒ KB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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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 박사도 비슷한 조언을 한다. 부정적 감정표현이 어려울 때는, 미리 거울을 보고 혼자 몇 번이고 할 말을 차분하게 연습하는 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이다. 그러다 보면 정확한 감정 인식과 적절한 감정표현이 점점 가능해진다고 한다. 게다가 노력한 만큼 감정도 평생을 거쳐 성장할 수 있다고 하니 희망이 생긴다. 연습하기 늦은 때란 없는 것이다.

연습 덕에 두어번 성공했다고 늘 할 말을 좋게 잘하게 되는 건 아니다. 개 주인에게 바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처럼 또 말을 못 꺼내는 상황으로 언제든 되돌아 갈 수 있다. 그럴 때는 조금만 실망하고, 다시 얼른 의지를 다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불편한 걸 제때에 좋게 말하기에 성공하는 날이 점차 늘어나리라 믿는다. 

어느 날 오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손을 씻기 위해 옆에 있는 수통의 버튼을 눌렀는데 물이 안 나온다. 마침 옆에 있던 경비분께 조작법을 존댓말로 물었는데, 돌아오는 말이 반말이다. 사적인 사이도 아니고, 그저 입주민과 경비원의 관계일 뿐인데 왜 내가 반말을 들어야 하나 싶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고 웃으면서 "알려주셔서 고마운데, 반말로 하시니 좀 기분이 안 좋네요" 하고 얼른 말했다. 그분은 멋쩍게 허허 웃으며 바로 존댓말로 바꿔 말했다. 이번엔 성공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불편한 걸 적절하게 표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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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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