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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의 부속섬인 식도에서 바라본 본섬 위도의 전경
▲ 부안군 위도면 위도본섬 위도의 부속섬인 식도에서 바라본 본섬 위도의 전경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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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물결 춤추고 갈매기 떼 넘나들던 곳, 내 고향집 오막살이가 황혼빛에 물들어 간다. 어머님은 된장국 끓여 밥상 위에 올려놓고, 고기 잡는 아버지를 밤새워 기다리신다.'

가수 박양숙(이형탁 작사)씨 노래로 잘 알려진 이 곡의 가사는 정말 나를 위해 만들어진 줄 알았다. 노래가 나온 1980년대는 아버지는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가셨고, 어머니는 궂은 날씨 없이 만선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셨다.

 오늘도 나는 고향의 길로 가는 배 안에서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고향은 전북 부안군 위도면 식도리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여섯 살에 군산으로 와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지금도 살고 있으니 실제 고향은 군산일 것 같은데도, 고향을 물어보면 언제나 위도에 딸린 식도섬을 먼저 말한다.

위도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에 있고 전북에서 가장 큰 섬으로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가 있다. 격포항에서 여객선을 타면 50여 분 거리에 있다. 섬의 생김새가 고슴도치와 닮았다 하여 고슴도치 위(蝟) 자를 붙여서 위도(蝟島)라 한다. 정말 고슴도치의 형상을 닮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위도가 고려시대부터 등장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위도는 1896년(고종 33년) 전라도를 전라남북도로 개편할 때 고군산열도와 함께 전라남도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영광군에 편입되었고 196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라북도북 부안군에 속해서 현재까지 이른다. 그중 내가 태어난 식도는 밥 식(食)자가 붙어있는데 이는 식도의 위치가 고슴도치의 입 앞에 있는 지형적 특성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다른 부속 섬에 비해 어업이 발달해서 먹거리가 늘 풍요로웠고 지금도 여전하다. 사시사철 멸치배를 비롯한 각기 다른 어종의 배들과 맨손 어업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노년을 보내시는 어른들이 섬에 많이 산다.
 
'식食'자를 가진 식도는 예로부터 어장이 발달하여 먹거리가 풍부하다
▲ 식도 섬의 설명한 담벼락 "식食"자를 가진 식도는 예로부터 어장이 발달하여 먹거리가 풍부하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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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귀향지이기도 했는데 섬 어르신들의 말씀에 따르면 당신들은 과거에 유명한 정승의 자손이었다고, 기록은 없지만 뼈대 있던 가문의 후손들이라고 자랑한다.

특히 이 섬에 두 종류의 대표성씨(정씨와 송씨)가 있는데 나의 친정 엄마만 해도 엄마의 할아버지 시대부터의 얘기를 꼭 정씨 가문의 예법과 함께 말씀하시는 걸 보면 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

며칠 전 친정엄마는 섬에 있는 당신 집이 해풍에 페인트 칠이 다 벗겨졌다고 걱정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속은 몰라도 겉이 부실하면 흉본다고 하시면서 페인트 단장을 결정했다.

어촌의 물건들은 바닷바람이 짠 기운을 몰고 오기 때문에 육지에서 보다 부식이 빨리 진행된다. 청소와 페인트칠로 집을 단장하고, 바지락을 캐는 때가 되니, 자식들 먹을 거라도 챙겨야겠다고 섬에 들어가셨다. 아주 오랜만에 나도 역시 고향 섬의 바람을 맞고 싶었다.

결혼한 이후 섬으로의 출발은 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 옛날 사람들은, '바다가 육지라면'이란 노랫말처럼 얼마나 육지(뭍)를 그리워했는지. 예전엔 고기잡이배로 어업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한 친척들의 말도 수없이 들었다. 1993년 위도 훼리호 침몰 사건 이후 정기 여객선의 안전 규정은 매우 엄격했다. 사람과 차량탑승초과라는 상황은 이제 찾아볼 수 없어서 다행스러웠다.

격포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50분 후 위도의 첫 도착지 파장금을 거쳐 식도에 도착했다. 갈 때마다 변해가는 섬의 지형이 못내 서운한 나는 바다를 도려내어 콘크리트 땅 한 뼘 더 만들어서 무슨 이득을 보는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건축사적 업적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인간은 바라는 대로 만물의 영장 자리에 앉아있는데, 얼마나 더 만들어야 만족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배가 선착장에 정박해서 차를 운전하고 뭍으로 올라갔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보다 차량도로가 두 배는 넓어졌다. 비록 차로 가는 길은 편해졌어도 그만큼 바다 길이 무서운 사람의 발자욱에 묻힌 것이다. 넓어진 길만큼 사람이 유익을 취했으니 그 보답으로 자연에게도 그 유익을 나눠줘야 할 텐데, 방파제 밑자락에는 여전히 쓰레기(각종 플라스틱병과 스티로폼, 어구 재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마중 나온 엄마를 만나서 오는 도중 보았던 쓰레기 얘기를 했더니, 다행히도 새로운 어촌계장과 이장이 젊은 패기로 마을 안팎을 정기적 청소하고, 특히 플라스틱을 무단으로 버리지 않도록 자주 얘기를 한다고 했다.
 
'푸른꿈이 넘실대는 학교'라는 글자에 '꿈'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 식도분교장 본관  "푸른꿈이 넘실대는 학교"라는 글자에 "꿈"이란 글자가 보이지 않았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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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친정집은 현재 식도분교장(일명, 초등학교)이 있었던 곳이었다. 학교가 세워질 때 총 6가구가 땅을 제공했다고 했다. 해방 후 학교가 설립(1945년 11월)된 후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무려 8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이 3년 전부터 휴교 상태다. 정확히 말하면 폐교 수순을 밟고 있는 꼴이다.

섬에 젊은이들이 없고, 있다해도 1시간 거리의 육지 학교로 자식들의 공부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이렇게 작은 학교는 폐교시키기 전에 주변 학교들과 교육 프로그램을 연동시켜 학교의 존재를 유지하려도 노력한다. 그러나 고립된 섬문화에서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저녁노을이 다가와서 사위가 붉어지는 틈을 빌어 딸과 함꼐 학교로 향했다. 초등학교마다 있는 책 읽는 소녀의 독서상이 우거진 잡풀 속에서 꿋꿋이 냉정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얼마나 따뜻했던지, 마지막 한 명의 학생이 있을 때 만해도 학교 역시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학교 건물 안팎으로 부식되어 설사 학생이 다시 온다 해도 다시 개교할 것 같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전했다. 또 학교 마당이 온통 풀로 덮여있으니, 가까이 사는 주민들의 불편함도 능히 짐작되었다.
 
우거진 잡풀속에 사자상과 소녀독서상이 있었다
▲ 식도분교장 정문 우거진 잡풀속에 사자상과 소녀독서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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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이제 3분의 2 이상이 70세 이상의 노인들이여서 노인당, 복지회관 등을 나라에서 만들어주어도, 활용할 사람이 없어야. 신식 가전제품을 갖다 주어도 누가 와서 살림을 할 사람이 없다. 이런 것이 낭비 아니냐.

맨날 도로 넓히고 건물 짓고 그런 거 하지 말고, 있는 건물을 잘 닦아서 노인들이 배울만한 것이나 알려주면 좋겄다. 애들이 없으면 노인학교로 쓰면 될텐디야. 안그냐, 나는 국민학교라도 나와서 글자는 알지만 아직도 글자 모르는 노인이 많어야."


엄마의 말씀이 일리가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여기 와서 노인들에게 재밌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엄마랑 친척들이랑 어울렁더울렁 살수도 있겠구나. 엄마의 말씀에 폐교 같은 학교의 모습에 갑자기 푸른 물결이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내일은 교육청에 전화라도 해볼까 하는 오지랖이 발동했다. 본관 앞에 쓰여 있는 '푸른 꿈이 넘실대는 학교'의 글자에서 사라진 '꿈'이란 글자를 집어 넣어주고 싶었다. 혹시 아는가. '꿈'자 하나를 써서 다시 학교가 살아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그:#위도면식도리, #농어촌학교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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