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겨우내 잠든 동굴에서 빠져나오듯 떠난 곳은 서남해의 완도군에 소속된 당사도다. 굳이 당사도 행을 선택한 것은 임철우의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읽었던 것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이었는지 모르겠다. 이 소설은 1991년 출간되었으니 그 지난 세월만큼이나 아득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이 소설은 작가가 태어나 자랐던 섬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난 1993년에는 박광수 감독에 의해 안성기, 문성근 등이 출연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관광객의 심리가 그렇듯 영화 촬영지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다 코로나에 갇힌 답답한 일상을 떠나 무작정 떠나보고 싶은 마음도 반은 차지했다.
 
섬으로 가는 뱃길을 연결해주는 육지의 가장 끝 부분에 있는 포구다.
▲ 땅끝포구 섬으로 가는 뱃길을 연결해주는 육지의 가장 끝 부분에 있는 포구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땅끝포구에서 당사도 행을 위해 탄 배는 번잡하지 않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관광객 몇이 탄 배는 한가로움과 설렘이 반반씩 묻어 있는 듯하다.

당사도로 가기 위해서는 배를 갈아타야 한다. 그것은 그만큼 오지라는 뜻이다. 섬도 섬 나름이다. 큰 섬과 작은 섬, 그래도 큰 섬은 살만한 여건이 비교적 갖추어져 있지만 작은 섬은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여러 가지 불편을 겪으며 살아야 한다.

당사도로 가기 위해서는 노화도 동천항을 거쳐 다시 소안도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소안도에서 당사도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 그것이 일반 사람들이 당사도로 갈 수 있는 방법이다.

노화도 동편 끝에 있는 동천항은 완도 본섬과 보길도, 소안도 등지를 연결해 주는 중간 거점 항구다. 동천항에서 소안도 가는 배를 기다리다 보면 완도 화흥포에서 오는 배가 들어온다. 동천항에서 바로 코앞 소안도까지는 배로 약 10분 정도의 거리, 배를 타고 수많은 바다 양식의 부표 사이를 지나 얼마 후면 소안도에 도착한다.

인근의 바다 위를 지나다 보면 바다 위를 뒤덮을 정도의 미역, 전복, 다시마 등의 양식장을 볼 수 있다. 섬 사람들의 부를 가져다주는 양식업이다. 이러한 부를 배경으로 한 것인지 섬에는 도시의 집 못지않게 제법 잘 지어진 건물들이 많다. 부를 이룬다는 것은 섬에서 삶의 터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배로 고기를 잡거나 텃밭을 일구며 살던 지난날의 섬 사람들에 비하면 바다 양식업은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바다에 순응하며 살아가던 지난날의 모습에 비해 섬 사람들은 이제 바다를 주체적으로 경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가고 싶은 섬 소안도'와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사이
 
항일운동의 자긍심이 들어 있는 깃발이 방문자를 반긴다
▲ 가고싶은 섬 소안도  항일운동의 자긍심이 들어 있는 깃발이 방문자를 반긴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소안도항에 막 도착하면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는 큰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소안도의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소안항에서 마주하는 표지석이다. 소안도가 어떤 곳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문구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유독 많은 사람들이 이곳 소안도를 근거지로 하여 항일운동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소안도 사람들의 자부심 같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

소안항을 벗어나 얼마 가지 않으면 소안도의 상징이 된 태극기가 일렬횡대로 나부끼며 소안도행을 반긴다. 소안도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태극기는 소안도 사람들의 긍지 같은 것이다.

일렬횡대의 태극기 사이로 '가고 싶은 섬 소안도'가 커다란 글씨로 써 있다. 이 문구가 임철우의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와 겹쳐진다. 가고 싶은 섬 소안도는 다소 식상해 보이지만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문학적 뉘앙스 때문인지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저 방문자의 감성 때문일까? '가고 싶다'는 희망은 그래서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임철우는 소설에서 어린날을 추억하며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던 것 같다.

"모든 인간은 별이다. 새로운 생명 하나가 탄생할 때마다 저 하늘에선 별 하나가 자취를 감추고 지구라는 별을 찾았다가 골목에 조등(弔燈)이 걸릴 때마다 하늘엔 낯선 별 하나가 돋아난다. 별들은 서로 사랑만 할 뿐 미워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시작 부문에서 주는 느낌은 강렬하다. 그래서 그 순수하고 아득했던 어린날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몰려온다.

섬이란 모두에게 어떤 대상일까? 가고 싶은 섬일까? 벗어나고 싶은 섬일까? 유토피아적 섬, 아니면 절대 고독의 섬, 섬은 단절된 공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유배지로 많이 활용되었다. 고도(孤島), 낙도(落島)라는 표현에 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섬은 유토피아인 동시에 절대 고독 속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 디스토피아의 공간이기도 하다. 홍길동전의 율도국은 유토피아이겠지만 정치적으로 유배형에 처해져 섬에 갇혀 살아야 했던 이들에게는 디스토피아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소안도는 적어도 고립된 억압의 공간은 아니고 적절한 경제적 부와 외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해방의 공간 같다. 태풍이 아니라면 육지와 섬의 경계를 이어주는 배는 그렇게 하루에 한 시간 간격으로 그 간극을 쉼 없이 이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소안도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소안도 인근에서는 미역, 전목, 다시마들의 양식업을 하고 있다
▲ 바다위의 양식 부표들 소안도 인근에서는 미역, 전목, 다시마들의 양식업을 하고 있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소안도는 전복, 미역, 다시마와 같은 양식업을 많이 해서인지 섬의 모습은 궁핍함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 보인다. 여러 종류의 식당과 유난히 눈에 띄는 다방, 노래방, 편의점 등 도시의 일상적인 것들을 대부분 갖추고 살아가는 모습은 이곳이 섬이라는 느낌을 덜 갖게 한다. 바다로부터 스스로 개척한 양식업과 같은 터전이 이들의 생활을 궁핍하게 보이지 않게 했을 것이다.

소안도는 당사도로 가는 중간 기착지라 하루를 그곳에서 숙박해야 한다. 당사도 가는 배 시간을 민박집 주인에게 물었다. 민박집 주인은 아침 7시 40분과 오후 4시 40분 두 차례 다닌다고 일러 주었다. 어쩔지 모르니 못해도 20분 전에는 가서 기다려야 한다고 일러준다.

큰 섬을 연결하는 배는 대부분 농협에서 운영한다. 작은 섬들은 자신들이 운영하지 않기 때문에 당사도 같은 작은 섬으로 가는 배 시간도 잘 알지 못한다. 여기저기 알음알음 알아내야 한다. 작은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해 주는 배는 지자체에서 지원하여 운영하는 '섬사랑호'다. 아마 이 배마저 없다면 작은 섬들은 더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나무들의 흔들림이 작지 않다. 바닷가의 바람이 흔히 그러려니 하는 것은 나의 바람이었다. 민박집 주인이 알려준 당사도 이장님과의 통화는 불안을 현실로 확인 시켜 주었다.

"오메 어짜까요, 모처럼 우리 섬에 올란다고 그라는디 바람 때문에 못 오게 생겼으니, 아침에 선장님이 그라는디 바람 때문에 오늘은 배가 뜨지 못한다고 안 하요! "

전화기로 들려오는 40대 여자 이장의 목소리는 잔뜩 아쉬움이 베어 있다. 배가 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다. 섬 사랑호는 작은 섬들을 연결해 주기 위해 운항하는 배다. 그러나 배가 작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운항을 하지 않고 사람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엇갈린 시간에서 마주한 유토피아

바람은 섬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 이들이 섬에서 살아온 때부터 겪어야 했던 육지와 섬을 갈라놓은 경계였다. 아직도 바람은 섬 사람들이 일상을 쉽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벽이다.

당사도는 그렇게 바람 앞에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배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그 10분의 거리도 때론 극복할 수 없는 것이 바다고 섬이다. 바람을 원망해 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는.

때론 그 엇갈린 시간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얻을 때가 있다. 그것을 행운이라고 하는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당사도가 보이는 해안길을 따라갔다. 당사도는 바다 건너서 계속 따라왔다. 섬과 섬은 바다의 경계에서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갯돌해변이 바다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한다
▲ 소안도 진산해변 갯돌해변이 바다의 정취를 흠뻑 느끼게 한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소안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 보면 국립공원에 속하는 소안도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집들이 예전 섬 마을의 모습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섬의 옛 모습들을 만나는 것은 여행의 행운이다.

소안도 남쪽은 주로 갯돌로 이루어진 해안들이 많다. 이는 먼 바다로 나가는 곳에 위치한 소안도의 지리적 특성 같다. 소안도의 갯돌 해변은 미라리 해변이 유명하다. 수백 년의 상록수림과 함께 들어선 해변이 소안도의 명물이자 자연의 보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갯돌 해변으로 치면 미라리 해변보다 나아 보이는 곳이 진산해변이다. 미라리 해변보다 길 뿐만 아니라 해안을 따라 긴 곡선을 이루고 들어선 해변은 최고의 멋진 풍경이다. 파도에 휩쓸리며 자그락거리는 해변에 앉아 있으면 바다의 정취가 흠뻑 느껴져 온다.

소안도 해변은 이런 갯돌 해변이 발달해 있다. 해변을 따라가다 만난 부상마을은 외부와 약간 고립된 곳인지 옛 섬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마을앞 바닷가도 갯돌 해변이다.
 
유채꽃이 만발한 해변이 한적한 섬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소안도 부상마을 해변 유채꽃이 만발한 해변이 한적한 섬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정윤섭

관련사진보기

 
누군가 우연히 뿌려 놓은 것인지 유채꽃으로 흐드러진 해변이 낙원 같다. 이런 곳에서는 외부와 단절된 적절한 고립의 공간이 파라다이스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오랜 세월 속에서 해풍에 생을 마친 늙은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는 유채꽃 해변은 그렇게 일상을 떠나온 자를 위로하기에 충분하다.

바람으로 인해 가고 싶은 섬을 갈 수 없었으나 그 바람의 경계 앞에서 새로운 실낙원을 발견했다. 

태그:#소안도, #당사도, #그섬에 가고싶다, #임철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