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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씨(반도체 공장 난소암 산재노동자)는 어렵사리 산재인정을 받고도 큰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지난 2년간 암 요양병원에 적용된 건강보험료 1400만 원을 반환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산재 지정병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요양급여를 적용 받지도 못했는데, 건강보험공단에서는 산재노동자이므로 건강보험 적용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올림은 산재 노동자에 대한 건강보험 요양급여 부당환수 결정 철회 및 제도개선 촉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기자말]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체처럼 누워 있자 같은 병원 암환우들이 방문했습니다.

"진희야, 토하더라도 먹어야 산다."
"너는 우리보다 한참 어리니까 관리 잘해야 한다. 재발하면 난소암은 끝이야."


너무나 처절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지? 어떻게 이 항암의 고통을 견딜 수 있지? 잠 못 자고 못 먹고 통증에 정신도 놓았습니다. '그냥 이대로 고통 없이 잠들었으면' 하다가도 '그래도 살고 싶다' 하는 마음으로 버텼습니다.
  
그런 저에게 지난 3월, 1400만 원 건강보험료 부당 이득 환수통보서와 지로용지가 배달되었습니다. '부당 이익금'이라는 부당한 돈으로 나는 과연 무엇을 하였나.

암환자, 산재노동자에서 범법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3월, 1400만 원 건강보험료 부당 이득 환수통보서와 지로용지가 배달되었습니다. 진희씨는 "국가가 당연히 국민의 치료를 위해 지급해야 하는 공단 부담금을 다시 국민에게 환수하겠다는, 그것도 저에게만 적용하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 산재노동자 진희씨  지난 3월, 1400만 원 건강보험료 부당 이득 환수통보서와 지로용지가 배달되었습니다. 진희씨는 "국가가 당연히 국민의 치료를 위해 지급해야 하는 공단 부담금을 다시 국민에게 환수하겠다는, 그것도 저에게만 적용하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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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암환자에서 산재 노동자로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습니다. 건강보험공단의 의료보험료를 축낸 암적인 존재. 이로써 저의 암투병은 부당한 치료였으며, 국가로부터 사회보장제도 밖의 이방인 신세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보장받는 건강보험 의료혜택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공단 돈을 쓰셨잖아요. 일반 국민은 되지만, 산재 노동자는 건강보험 적용대상이 아니에요. 부모님께 전화할까요? 해결하셔야죠."

건강보험공단 김포지사 담당자와의 통화에서 알았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법을 모르는 것이 저의 죄였습니다. 공단에서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면 안 됐습니다. 산재 노동자는 건강보험 혜택에서 제외되며, 비지정 의료병원에서 치료받는 순간 몇 년간 치료받았던 건강보험료가 한 번에 청구돼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는 저의 병원치료행위와 암요양병원 치료행위를 모독했습니다. 한순간에 대한민국 국민에서 공단의 돈을 축낸 빚쟁이로 취급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박탈했으며 수치심을 안겨주었습니다. 5년 산정특례기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국민의 치료비 부담을 경감시키려는 국가 제도의 취지에 반하는 행위를 공권력으로 행사했습니다.

부담 없이 치료받고 살라고 만들어 놓은 '산정특례기간'은 국민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혜택입니다. 본인이 앓고 있는 중병을 치료할 최고의 명의를 찾아 자유롭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산재 노동자들은 정해진 의료기관에서 공단의 승인 하에 '제한'적 치료를 받아야만 합니다. '산재 노동자도 국민'입니다. 특권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권리를 똑같이 대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저의 이름은 국민이 아닙니다. 국민에서 제외된 산재 노동자일 뿐입니다. 이제야 겨우 살아나온 국민을 다시 사지로 모는 일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난소암으로 양쪽 난소와 자궁을 절제하고, 8시간이 넘는 대수술과 반년 동안 독한 항암제를 이겨내며 목숨을 건 투병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국가는 저의 암투병을 부당한 이익금 환수라고 처분했지만, 어찌 그때의 살기 위한 몸부림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기에 벌금 용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국민으로 불릴 그날을 기다리다

저는 국민이라는 가장 평범하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권인 '국민의 사회보장 기본권'을 국가로부터 환수받고자 합니다.

부당 이득 환수처분은 LH 사태 당시 내부정보를 활용해 부동산 투기를 한 죄인들에게나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법을 잘 아는 공무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법의 공정성을 악용한 이들에게나 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법을 알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어찌 저에게 이런 폭력적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까?

저는 1400만 원을 보지도 듣지도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국가가 당연히 국민의 치료를 위해 지급해야 하는 공단 부담금을 다시 국민에게 환수하겠다는, 그것도 저에게만 적용하겠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단지 살기 위해 몸부림친 치료행위를 불법행위로 간주하는 건강보험료 부당 이득금 환수 조치, 이 부끄러운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제2의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건강보험 공단 본래의 목적인 '병원비 걱정 없는 든든한 나라'라는 슬로건을 지킬 수 있기 바랍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뼛속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산재승인으로 벗어나고자 했던 아픔과 고통이 지금도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옛날 LG반도체 클린룸 생산 공장에서 청춘을 바쳐가며 10시간 넘게 밤낮없이 일했고, 이유도 모른 채 쏟아 내리는 코피와 멈추지 않았던 하혈로 고통당했던 그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저는 산재 노동자입니다. 국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름이자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이름을, 국가로부터 얻었습니다. 그러나 산재 노동자이기 전에 저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건강보험 의료혜택에서 제외될 수 없는 국민입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건강보험공단의 부당한 이익 환수금을 산재 노동자인 제가 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국민이 아닙니까? 언젠가는 국민으로 불릴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기획 / 산재노동자 진희씨에게 일어난 일]
① "1400만 원 토해 내"... 어느 날 찾아온 비극의 서막 http://omn.kr/1sv1n
② 저는 산재 노동자입니다, 산재은폐의 공범이 아닙니다 http://omn.kr/1sw8i

태그:#산재노동자, #국민건강보험공단, #반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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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황상기 씨의 제보로 반도체 직업병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전자산업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민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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