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 사는 20대 청년 현서(가명)씨는 어린시절부터 가정폭력을 당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스무살이 된 현서씨는 전문대에 진학했지만 얼마 안 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1년 뒤인 2019년 10월, 아버지의 폭력을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한 그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집을 나왔다.
가출 직후 현서씨는 직업소개소를 전전했다. 충북 옥천에 위치한 물류센터에서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출퇴근 차량이 있고 식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당시 현서씨는 찜질방에서 생활했다. 작은 가방에 든 옷가지 몇 개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는 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간관계가 어려워 길게 일하지 못하곤 했다.
얼마 후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현서씨는 고시원 입주와 동시에 신용카드를 발급받았다. 카드사 측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카드 발급을 승인했다.
그러나 현서씨는 지난해(2020년) 코로나19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간간이 들어오는 일을 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월 50만 원도 벌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현서씨에게는 버팀목이 없었다. 몇 명뿐인 친구들은 형편이 좋지 못했고, 도움을 줄 든든한 어른도 없었다.
탄탄한 복지제도나 부모님의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그런 현서씨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은 카드회사뿐이었다. 어느날 카드사에서 평소보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주겠다는 이벤트 문자를 보내왔다. '카드론'이었다. 현서씨는 전화로 카드 비밀번호를 이야기하고, 본인확인을 받은 후 200만 원을 대출받았다. 카드론이란 신용카드 이용 실적을 통해 대출 받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대출금 연체가 시작되었다. 현서씨는 당시 대부분의 식사를 라면으로 때우고 있었다. 그럴수록 몸과 마음은 점점 더 나빠졌다. 문득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두 사람 앞으로 생계급여가 나왔었다. 본인도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현서씨는 가까운 주민센터를 찾아갔다.
'4인 가구'를 중심으로 설계된 복지제도
주민센터를 방문한 현서씨는 본인을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기초생활수급자"라고 설명한 후 생계급여를 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다. 그러나 주민센터 측 담당자는 "생계급여 지급을 위해서는 부모님과 단절된 기록이 확인되어야 한다"라고 답했다. 현서씨는 그 확인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담당자는 건강보험, 소득공제, 통장내역 등을 확인하며, 부모님과 단절된 기록이 10년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현서씨는 헛웃음이 나왔다. 담당자는 주소지를 옮기거나 세대를 분리해 주민등록을 신고해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시행령에 따르면 '30세 미만' 청년은 부모와 한 가구로 묶인다. 그래서 집을 나오거나, 독립 생계를 꾸려도 생계급여는 가장에게만 지급된다. 이 때문에 가정폭력 피해를 입고 가출한 기초생활수급자 청년들은 "서른 전까지 참을 걸 그랬다"는 슬픈 농담을 던지곤 한다. 본인 몫의 생계급여까지 세대주가 사용하기 때문이다.
주민센터 측은 현서씨에게 "지속적인 가정폭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될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라는 생각에 단 한 번도 경찰을 부르지 않았던 현서씨는 생계급여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눈물이 났다. 그날 현서씨는 몇 안되는 친구를 만나 하소연을 했다. 카드론으로 빌린 200만 원이 연체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현서씨에게 "돈과 빚이 궁금한 광주 청년들에게 무료로 부채상담을 제공한다"는 광주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를 소개시켜 주었다.
광주에는 지역 청년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단체 '광주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아래 광주 청지트)'가 있다. 현서씨는 광주 청지트에서 1:1 내지갑상담을 받았다. 내지갑상담은 청지트가 고안한 청년 맞춤형 재무상담이다. 청지트 상담사는 내담자를 1시간 30분씩 두 번 만난다.
1차는 현재 상황을 종합적으로 확인하는 인터뷰 상담이다. 돈 문제뿐만 아니라 근로환경, 주거환경, 사회적 관계, 취미, 앞으로의 계획 등을 파악한다. 이를 바탕으로 2차 상담에서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다. 현재 본인의 수입과 지출, 자산과 부채 현황을 살펴보고 생애설계를 통해 재무계획을 세워준다. 과중한 부채가 확인되면 채무조정제도와 연계하며, 그 밖에 본인에게 필요한 주거정책, 청년정책, 복지정책 등을 안내한다.
청지트 상담사는 우선 연체중인 카드론 대출을 채무조정제도와 연계했다. 신용회복위원회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통해 매월 3만 원씩 8년간 대출금을 상환하기로 했다. 개인워크아웃은 과중한 채무를 지닌 개인에게 이자율 조정, 상환기간 연장 등을 지원하는 제도다.
현서씨는 '복지 제도'도 안내받았다. 우선 비주택거주자 주거상향 지원사업을 신청해보기로 했다. 해당 사업은 주택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주거 환경을 지원하는 제도다. 당시 현서씨가 생활하고 있던 고시원은 해당 제도가 규정한 '비주택'에 해당했다.
이후 현서씨는 국민임대아파트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보증금 없이 매월 10만 원이 조금 안되는 돈을 월세로 납부하면 됐다. 청지트 상담사는 현서씨에게 2021년 1월부터 주거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안내했다. 주거급여를 관할하는 국토교통부가 생계급여와 마찬가지로 '세대주 지급'이 이루어지던 주거급여를 청년 개인에게 따로 지급하도록 제도를 변경했기 때문이다. 주거급여는 2021년 기준 월 82만2524원보다 소득이 낮은 1인 가구에게 매월 최대 17만 원을 지급하는 제도다.
2021년 현서씨는 자활사업에 선정되었다. 자활급여를 받으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애견미용사가 되고 싶다는 현서씨는 자활을 통해 생활이 안정을 찾으면 자격증 학원에 등록할 계획을 세웠다. 현서씨는 조금씩 꿈을 향해 노력해 보기로 했다.
광주 청지트 주세연 센터장은 "이번 사례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설계된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뼈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며 "현서씨에게 생계급여가 지원되었다면 현서씨는 가출 이후에도 빚을 지지 않고 조금 더 안정적인 생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권위 "생계급여 지급시 30세 미만 자녀 별도가구로 인정해야"
지난 5일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가 "20대 청년의 빈곤 완화 및 사회보장권 증진을 위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부모와 주거를 달리하는 30세 미만의 미혼 자녀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부모와 별도가구로 인정할 수 있도록 관련 법·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보건복지부장관에게 권고했다.
인권위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단순히 시혜적인 제도가 아닌 헌법상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구체화시킨 권리보장 제도"라며 "공적 지원이라는 국가 책임을 축소시킬 목적으로 가족주의 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세연 센터장은 "우리 사회는 안정적인 가정 환경의 존재 유무가 한 청년의 삶을 결정하는 사회"라며 "뒷바라지가 가능한 가정에서 태어나면 대학 입시, 대학 생활, 취업 준비, 취업 후 결혼까지 큰 걱정 없이 나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 청년들은 삶의 첫 단계를 마이너스로 시작하고 있다. 부모의 소득과 자산 격차가 자녀 세대로 세습되다보니 청년들이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면서 "청년 빈곤 현황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