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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루가 다르게 터져 나오는 학폭 관련 기사들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다. 이렇게 학폭 관련 뉴스에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아마도 누구나 겪어온 학창 시절과 그 시절 어디에선가 겪었거나 보았을 폭력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도 폭력에 대한 기억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 기억은 우리 둘째와 관련되어 있는데, 둘째가 다섯 살 때 그러니까 유치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유난히 또래보다 작고 자주 아팠던 탓에 어린이집도 한 번 못 가본 둘째의 유치원 등원은 우리에게 로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5년 만에 어렵게 보낸 유치원인데
 
유치원에 등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달이 나고 말았다.
 유치원에 등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달이 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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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만 지나면 어린이집에 간다는 시절이었는데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늘 집안에서 품고만 있었으니 유치원에 등원할 날을 손꼽는 나의 마음은, 기다림을 넘어 간절함에 가까웠다. 게다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동네 사립 유치원이 아닌가. 원장 선생님의 남다른 교육철학이 마음에 들었기에 나의 기대감은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그런데, 유치원에 등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아얏!"

유치원에서 하원한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팔을 잡았을 때 느닷없이 아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얼른 팔뚝을 살펴보니 동전만 한 상처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등원할 때도 보지 못했던 자국이었고, 하원시에도 선생님께 별다른 고지를 듣지 못했었다. 이게 뭐냐고 묻는 내게 아이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OO이가 깨물었어."
"뭐?"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물렸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정도로 행동이 과한 친구였다면 선생님께서 더 주의 깊게 보았을 텐데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 듣지 못한 것이 의아했다.

유치원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다시 전화를 기다렸다. 이제 겨우 5살 아이들이니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 나갈 수 있다고 이해를 하자, 하는 마음도 있었고 무엇보다 원생들 간에 다툼이나 사건이 생겼을 경우에 당사자의 부모님끼리 해결하지 말고 선생님한테 먼저 이야기를 해달라는 원장 선생님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줍음이 많은 아이라 아픈 티도 못 냈을 테니 선생님이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고, 아이가 어이없는 상처를 입긴 했지만 진심 어린 사과와 앞으로 주의를 주겠다는 당부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전해준 상대 부모님의 반응과 선생님의 대응은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어머니~ OO이가 (우리 둘째 아이를) 좋아해서 그런 거래요~. OO이가 아직 표현이 서툴러서 좋아한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대요. 그리고 OO이가 5대 독자라고 하시네요. 귀하게만 커서 좋아하는 걸 과하게 표현한대요. 제가 앞으로 신경 써서 잘 지도할게요."

나는 다시 한번 내 귀를 의심했다. 이 말이 사과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뭐라는 거지? 귀한 5대 독자가 한 행동이니 귀엽게 보아달라는 건가? 아니면 좋아서 한 행동이니 이해를 해줘야 한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5대 독자가 아니라 50대 독자였어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고, 이유가 아무리 '좋아서'였다고 해도, 또 그것이 아무리 어린아이들 사이의 일이라고 해도 때리거나 무는 것은 잘못된 행동일 뿐이었다. 그 어떤 이유를 가져와도 덩치 차이가 두 배나 되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작은 여자아이에게 행한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5세 아이의 폭력이니 귀여움으로 퉁치자는 이야기인가. 

요즘 스포츠계와 연예계에 터지고 있는 학폭 사태를 살펴보면, 한결같이 '철없던 시절의 신중하지 못했던 행동에 대해 사과' 하는 일관된 패턴이 보인다. 그런데 철없던 시절의 철없는 행동이 용인되어야 한다면, 철없던 시절 철이 없어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폭력을 당해야 했던 피해자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제 피해자는 가해자를 포용하는 너그러움까지 강요당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사과는 2차 가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폭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변명의 여지없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철없던 시절의 서툰 폭력 또한 엄연한 범죄라는 사실이 철저히 각인되는 분위기를 가진 사회라야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좋다고 때리면 안 돼요!" 취학 전부터 가르쳐야
 
폭력에 대한 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폭력에 대한 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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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학교폭력을 다룬 영화 <살아남은 아이>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들이 학폭 피해자로 죽고, 그 부모가 자식처럼 보살핀 아들의 친구가 알고 보니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그야말로 '불가능한 용서'를 다루고 있었다.

죄책감을 느낀 가해자가 자살을 결심하고 물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가 먹먹했던 것은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그 아이를 구하러 뛰어드는 피해자의 부모를 보면서, 피해자에게 '용서'란 최소한 가해자의 진정 어린 자책과 죄책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딸아이가 좋아서 그런다는 그 남자아이의 달라지지 않는 괴롭힘은 아쉽게도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발이 느린 딸아이를 뒤에서 쫓아와 순식간에 깔고 뭉개는 모습이 내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오고야 말았고, 그 뒤로 나는 더 이상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지 않았다. 아이와 내가 고대하던 유치원 등원은 그렇게 일장춘몽처럼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그 석연치 않은 씁쓸한 기억은 꽤나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쯤 되면 폭력에 대한 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좀 더 확고한 경각심을 갖기 위해, 아예 유치원에 표어처럼 써 붙여 놓는 것은 어떨까? 유치원만 졸업하면 다 안다는 그 유명한 3대 명구, '친구와는 사이좋게 지내요! 낯선 사람 따라가면 안 돼요! 주위를 살피고 길을 건너요!'와 더불어 '좋다고 때리면 안 돼요!'라고 콕 짚어서 말이다.

태그:#학폭, #철없는행동, #살아남은아이, #학폭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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