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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요시로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
 모리 요시로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
ⓒ 연합뉴스=교도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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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직 총리이자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를 이끄는 모리 요시로 회장이 공개 석상에서 '여성 비하' 망언을 했다가 궁지에 몰렸다. 비판과 사퇴 요구가 들끓고 있지만, 올림픽 개막을 불과 넉 달 앞둔 일본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모리 회장은 지난 3일 일본올림픽위원회(JOC) 평의원회에서 현재 20%(5명) 정도인 JOC 여성 이사 비율을 40%까지 증원하는 목표에 대해 "여성이 많은 이사회는 회의 진행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라면서 비하했다.

그는 "여성은 경쟁의식이 강해서 누군가 손을 들고 말하면, 자신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며 "그래서 모두가 발언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명예회장을 맡았던 일본럭비협회를 사례로 들어 "여성 이사를 늘렸더니 종전보다 회의 시간이 배(倍)로 길어졌다"라며 "만약 여성 이사를 늘리겠다면, 발언 시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모리 위원장의 발언을 웃어넘기면서 농담으로 여기는 분위기였으나, 언론에 보도되자 여성을 멸시하고 비하했다는 거센 비판이 쏟아졌다. 

"여성은 말 많아"... 성 차별 발언 해놓고 '적반하장'

논란이 커지자 모리 회장은 이튿날 기자회견을 열어 "올림픽·패럴림픽 정신에 반하는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라며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발언을 철회하고 사과한다"라고 잘못을 인정했다.

이어 "올림픽은 남녀평등을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으며, 나 역시 여성의 활약에 매우 감사하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진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기자 : "사퇴할 의향이 있나?"
모리 회장 : "그럴 생각 없다."

기자 : "스스로 조직위원회 회장은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모리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기자 :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리 : "그럼 그렇게 알아두겠다."


모리 회장은 기자들을 시종일관 고압적으로 대했고, 사퇴 요구에 대해 "지난 7년간 올림픽을 위해 헌신해왔는데 내가 대형 쓰레기인가? 그러면 쓸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라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일본 언론은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사퇴를 촉구했고, 도쿄올림픽 조직위에는 항의 전화와 메일이 쇄도하고 있다. 그만두겠다는 올림픽 자원봉사자도 속출했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모리 회장의 사임을 요구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내고 "이렇게 뒤틀린 생각을 가진 사람 아래서 열리는 올림픽이란 무엇인가"라며 "거금을 들여 전 세계에 일본의 수치를 알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여성에 대한 억압, 성폭력 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스포츠계에서 여성 지도자 및 행정가의 등용은 매우 중요한 과제"라며 "그런데 올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이라는 사람이 여성들을 모욕한 것은 책임이 매우 무겁다"라고 강조했다.

다급해진 조직위원회는 자원봉사자 전원에게 메일을 보내 "모리 회장의 발언으로 불쾌감을 느낀 것에 거듭 사과한다"라며 "다양성과 조화가 실현되는 사회를 목표로 올림픽을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일본 언론에 "(모리 회장의 기자회견은)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라며 "그동안 엠블럼 표절 논란, 대회 연기 등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번 사태가 최대 위기"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정말 무식하다"... 모리 회장에게 쏟아진 분노 
 
모리 요시로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의 여성 비하 발언에 항의하는 주일 독일대사관 트윗 갈무리.
 모리 요시로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회장의 여성 비하 발언에 항의하는 주일 독일대사관 트윗 갈무리.
ⓒ 주일 독일대사관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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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회장의 망언은 국내를 넘어 일본의 국가 망신으로 이어졌다. 주일 독일대사관은 트위터에 여성 직원들의 사진을 올리며 #dontbesilent(침묵하지 말자), #GenderEquality(성 평등), #남녀평등(男女平等)이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이 트윗은 주일 유럽연합(EU) 대표부, 핀란드대사관, 스웨덴대사관, 스위스대사관의 트위터 계정으로 퍼져나갔다. 또한 국제 온라인 청원사이트 'Change.org'에 올라온 모리 회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에도 참여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주요 외신도 앞다퉈 모리 회장의 망언을 다뤘다. <뉴욕타임스>는 "대회 연기에 따른 비용 상승과 코로나19 사태로 반대 여론에 부딪힌 도쿄올림픽이 새로운 분노에 직면했다"라며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메이저대회 우승을 차지한 일본의 테니스 스타이자, 여성과 소수자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오사카 나오미는 지난 6일 그립스랜드 트로피 대회 기자회견에서 모리 회장에게 이렇게 일침을 날렸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이란 것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말로 무식하고, 지식이 좀 부족한 사람 같습니다.

일본 내 여론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교도통신>이 7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모리 회장이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를 이끌 적임자로 보느냐는 질문에 59.9%가 '적임자가 아니라고 본다'라고 답했으며, '적임자라고 본다'는 응답은 고작 6.9%에 그쳤다. 

스가 총리도 어쩌지 못하는 '망언 제조기' 

일본 우익 성향 일간지 <산케이신문> 기자 출신인 모리 회장은 자민당 중의원, 문부과학상, 경제산업상, 국토교통상 등 요직을 거쳐 지난 2000년 일본 총리가 됐다.

하지만 그의 정치 생활은 망언의 연속이었다. 총리직에 오르자 "일본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의 나라라는 것을 모든 국민이 깨닫게 하겠다"라고 말했다가 일본 야권은 물론이고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샀다.

또한 중의원 선거 유세에 나섰다가 "젊은 무당파 유권자들은 투표소에 가지 말고 집에서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라고 발언했다가 실제로 젊은 무당파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소로 향하는 역풍이 불었고, 자민당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1년짜리 '단명 총리'에 그친 모리 회장은 퇴임 후 중의원 신분으로 참여한 한 토론에서 "자녀를 한 명도 낳지 않는 여성에게 국가 세금을 쓰는 것은 의아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뿌리깊은 여성 차별 의식을 드러낸 발언이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때도 김연아의 라이벌이자 일본 피겨스케이팅 대표인 아사다 마오를 향해 "그 아이는 꼭 중요할 때 넘어진다"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국회에 출석해 최근 모리 회장의 발언에 대해 "있어서는 안 될 발언"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사퇴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의 스포츠 행정을 총괄하는 문부과학상을 역임했으며, 2009년에는 일본의 럭비월드컵 유치를 이끄는 등 국제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스포츠 전문가인 그의 영향력을 무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논란이 가라앉지 않을 경우 스가 총리가 결국 모리 회장의 사퇴 카드를 꺼내 들 가능성도 있다는 보도가 나오지만, 코로나19 여파로 개막 여부조차 불확실한 데다가 일본 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도쿄올림픽의 수장을 선뜻 맡겠다고 나설 인물을 찾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태그:#도쿄올림픽, #모리 요시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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