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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영화 <언노운 걸>의 한 장면 ⓒ 오드
 
진료시간이 끝난 늦은 저녁, 누군가에게 쫓기던 여성이 몸을 피하기 위해 병원 벨을 눌렀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몰랐던 의사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불행히도 이 여성은 다음 날 인근 강가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그럼 문을 열어주지 않은 의사는 여성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는 걸까? 있다면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할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 <언노운걸>은 이 단정적인 답을 내놓기 힘든 질문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제니 다벵은 자신이 문만 열어줬으면 여성이 죽지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건 특별하지 않지만, 제니의 죄책감이 흔한 죄책감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실천'의 동력으로 쓰인다는 점이다.

제니는 자신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 죽은 소녀가 신원 확인이 어려워, 이름도 없이 매장되는 것이 마음 아파, 그를 기다릴지도 모르는 가족들을 위해 소녀의 이름을 찾아 나선다. 영화에서 제니가 죽은 소녀의 이름을 찾는 과정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험난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작위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제니가 여러 고난을 견디며 소녀의 이름을 알아내는 결말로 나아간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름 모를 사람에게 생긴 나쁜 일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집요하게 물은 적이 있는가?" 제니는 "늦은 시간에 병원 문 안 열어 준 게 죄는 아니지"라고 맘 편히 생각하지 못하고, 타인의 불행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행동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정치인이 필요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국회 법사위를 거쳐 본회의 통과했지만, 제니와 같은 태도를 가진 정치인들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매일 7명, 매년 2400명씩 일하다 죽는 사회에서 이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 집요하게 목소리를 내는 주류 정치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국회에서 여야 의원들은 격렬한 논쟁 없이 순조롭게, 중대재해처벌법을 5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하지 않고, 50인 미만 사업장에 3년간 적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는 작은 사업장에 집중되는 산재 사망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인 동시에, 그곳에서 죽는 사람들 즉 '이름 모를 누군가'에 대한 일말의 윤리적 책임감이 결여된 결정이었다.

한편 이 문제를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정치인들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대상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을 제외하고, 50인 미만 사업장을 3년 유예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산재사망자의 33%가 5인 미만 기업에서 나오고, 77%는 50인 미만 기만에서 나온다는 사실보다 소상공인은 힘들다는 사실을 더 중시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둘 중 하나가 사실이 아닌 건 아니다. 다만 정치인들은 소상공인의 이익을 더 대변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변되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백혜련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위원장이 2020년 12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회의장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피켓팅 중인 정의당 류호정 의원(왼쪽부터), 강은미 원내대표, 배진교 의원.
백혜련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위원장이 2020년 12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은 회의장 앞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피켓팅 중인 정의당 류호정 의원(왼쪽부터), 강은미 원내대표, 배진교 의원. ⓒ 공동취재사진
 
물론 한국 노동자들은 산재로 죽을 가능성이 다른 나라 노동자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게 사실이다. 한국은 통계자료가 제공되는 1999년부터 2016년까지 23번 중 21번 OECD 산재 사망률 1위였다. 2015년에는 인구 10만 명당 산재사망자가 영국(0.4명)보다 25배나 많은 10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한국 노동자들이 산재로 죽을 위험에 크게 노출되어 있는 건 아니다. 

최근 3년간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들은 51%가 건설업, 26%가 제조업에 종사했다. 산재사망의 위험은 이 두 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매우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즉, 정치인들이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모든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아서라기보다, 특정 업종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잘 반응하지 않아서 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대변하지 않을까?

근대 복지국가의 함정

아이버슨(Iversen), 소스키스(Soskice)(2015)[1]는 이들이 왜 대변 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주목할 만한 답변을 제공한다. 두 사람은 근대 복지국가가 '시장을 위한 정치(politics for market)'의 결과라고 지적하며, 민주 정부와 지식경제는 공생관계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들에 따르면 좌파정부는 시장의 이익을 약화하는 정책을 펴고, 우파정부는 시장이익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는 게 아니다. 

당파성과 상관없이 민주 정부는 시장, 좀 더 정확히는 지식경제사회의 핵심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경제지표는 재집권을 원하는 모든 정부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경제사회에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수출 지향적인 핵심부문 기업들에서 나온다. 그래서 민주 정부는 주요 산업 기업들에게 필요한 여러 제도들을 발전시키게 되며, 바로 그 결과 복지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왜 지식경제사회의 주요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 복지국가가 필요했을까. 저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지식경제사회의 핵심기업들은 매우 특화된 기술(specific skill)을 가진 노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기술은 일반 기술(general skill)에 비해 직업 이동성이 낮아서, 개인이 해당 기술을 배우기 위해 금전적, 시간적 투자를 할 동기가 적다. 

개인은 해당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나 기업의 상황이 나쁠 경우 장기간 실업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음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의 복지정책은 바로 이 지점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이다. 정부는 공적으로 지원되는 직업훈련시스템, 이 분야에서 일하는 숙련 노동자들을 위한 높은 수준의 고용 보호, 관대한 실업보험 제도 등을 운영함으로써, 사람들이 특화된 기술을 배우도록 유도해왔다. 이 과정에서 숙련노동자들을 위한 복지는 자연스럽게 향상됐다.

문제는 지식경제에서 주변적인 위상을 차지하는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이다. 숙련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와 달리, 비숙련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가령 재분배정책, 적극적 노동시장정책)는 경제적인 동기로 시행되지 않는다. 주변부 사업 종자사들의 노동은 경제발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 탓이다. 그래서 이들을 위한 정책들이 충분히 시행되기 위해선, 민주적 통치에 저임금, 비숙련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정기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논문 저자들은 이 가능성이 선거제도와 정당체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비례대표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단순다수 선거제도를 채택한 국가에 비해 취약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잘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같은 비례대표제 국가라도, 정당체계가 지식경제 핵심부문에서 일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게 더 선거 상 이익을 주도록 형성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많은 차이가 난다.

윤리적 책임감

한국은 선거제도도 단수다수제이고, 정당체계도 거대 양당 중심이라 진보정당의 힘이 약하다. 이들의 핵심 주장이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정당이 민주적 통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회에선, 비숙련, 저임금 노동자들의 이익이 반영된 정책이 시행되기 어렵다는 거라면, 대부분의 산재 사망자가 지식경제사회의 비핵심 산업에서 나오는 오늘날 정치인들이 중대재해처벌법 처리 과정에서 보인 일련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산재사망률이 너무 높은 나라의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논의하며, 어떻게 하면 산재사망을 줄이는 데 효과적인 법을 만들 수 있을까보다, 이 때문에 기업이 힘들 걱정에 몰두했던 이유. 그건 정치인들이 한국의 제도 조건에선, 일하다 죽을 위험에 크게 노출된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않고도 선거에서 이길 수 있어서다.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제도가 정치인들로 하여금 산재로 죽을 위험에 크게 노출된 사람들을 대변하게 강제하지 않을 때, 우리가 정치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하나다. 그건 정치인들이 제도적 강제와 별개로, 일하다 죽는 노동자들에 대해 '입법자'로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길 바라는 거다. 하루에도 몇 명씩 산재로 죽는 사회의 정치인으로서, 스스로에게 "만약 내가 더 온전한 중대재해처벌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았을까?"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거기서 비롯된 죄책감을 의정활동의 동력으로 삼는 정치인 말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몇 주 동안 많은 주류 정치인들이 보여준 안일한 태도는 악몽과도 같았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제도도 없고, 윤리적인 정치인도 별로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도대체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 건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스스로 일하다 죽는 노동자들에게 윤리적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 뿐 아닐까. 

타인의 죽음이나 불행에 반응하고 책임감을 느껴, 집요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선 딱히 윤리적 목적을 가지지 않는 정치인들도 다르게 행동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타인의 고통에 힘껏 반응하는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 근데, 이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하다 매년 죽는 게 기본 값인 사회에서 바라보긴 너무 더딘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참고자료
[1] Torben Iversen and David Soskice. 2015. "Politics for markets." Journal of European Social Policy, Vol.25(1), 76-93

#중대재해처벌법#산재사망#언노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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