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국여성노동조합(아래 여성노조)은 독립 노조다. 흔히 '양대 노총'이라 불리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해 왔다. 대공장 중심, 남성 중심의 노조에서는 여성 노동자 문제를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이 중소 영세 사업장이나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또한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대량 해고 여파 속에서 가장 먼저 해고되는 건 여성이었다. 그 배경엔 임신, 출산, 육아 등 성차별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지난 8일 인천에서 만난 나지현 여성노조 위원장은 여성 노동자를 '불안정 노동자'라고 지칭했다. 새로운 업종, 새로운 고용 형태, 간접고용, 비정규직 등 여성은 모든 노동 문제를 다 겪고 있었다. 불안정한 여성의 노동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노동 문제가 해결된다는 나 위원장의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큰 노조 말고, 여성 위한 노조가 필요하다
 
 2015년 연세대 송도캠퍼스 청소경비노동자 원직복직 집회에서 나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나지현 여성노조 위원장  2015년 연세대 송도캠퍼스 청소경비노동자 원직복직 집회에서 나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나지현

관련사진보기

    
IMF 때 여성은 남성의 주변 노동력으로 밀려나 있었다. 남성보다 먼저 해고됐다. 가장인 남성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가부장제 때문이었다. 이런 관습을 받아들인 기존 노조 안에서도 여성 노동자는 지켜지지 않았다. 나 위원장은 여성 수백 명이 해고되는 조건으로 노사 합의가 끝난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1998년에 현대차가 노동자를 정리해고할 때 노조가 해고 반대 투쟁을 했어요. 며칠을 파업하고 농성했는데 갑자기 새벽에 극적 합의가 됐다는 거예요. 제가 원래 일찍 자거든요. 그때 오전 2시까지 왜 깨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뉴스를 봤는데 합의가 됐대요. 몇백 명 자르는 조건으로 합의했는데 그 숫자가 정확하게 식당 여성 노동자 숫자였던 거예요. 그 여성들이 파업 농성 때 밥 지어가며 같이 싸운 사람들이거든요."

비슷한 일은 다음 해에 또 있었다.
  
"1999년에 농협에서 사내 부부 중 한 명은 나가라고 했어요. 구조조정하면서 부부 둘 다 근무하고 있으면, 그중 한 명은 강제로 명예퇴직을 시킨 거예요. 그런데 다 여성이 나갔어요. 구조조정이 된 752명 중 90%가 여성이었어요. 안 나가고 버틴 사람에게는 엄청 핍박을 가하고요. 노조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당시 부위원장이었던 여성 조합원이 남녀차별이라고 노조 사무실에 항의하러 갔더니, 남성 간부들이 부위원장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내면서 이렇게 말했대요. '대(大)를 위해 소(小)가 희생하는 거'라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큰 노조, 힘센 노조가 여성을 전혀 보호하지 않는구나. 기업과 업종을 넘고 가부장제의 한계를 넘어서 여성 노동자를 보호하는 노조가 꼭 필요하다. 여성은 '소(小)'가 아니니까요."
   
노조 창립 직후 찾아온 '불안정' 노동자들
   
노조 탄압으로 해고된 88CC 간부들이 10년 투쟁 끝에 복직하고 복직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고 있다.
▲ 88CC 경기보조원 분회 노조 탄압으로 해고된 88CC 간부들이 10년 투쟁 끝에 복직하고 복직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고 있다.
ⓒ 전국여성노동조합

관련사진보기


여성노조의 1호 분회는 88CC(컨트리클럽) 경기보조원(캐디) 분회다. 나 위원장은 노조를 찾아온 경기보조원 노동자를 보고 "이런 형태로 일하는 노동자도 있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1999년 8월에 노조 창립 후 2개월이 채 안 됐을 때 88CC 경기보조원 분회가 결성됐으니, 경기보조원 노동자는 노조가 창립되자마자 찾아온 것이었다.

이들은 특수고용노동자다. 특수고용노동자는 골프장 경기보조원, 학습지 교사, 택배 노동자처럼 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노동자를 말한다.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다. 그래서 일하다 다치거나 죽어도 노동자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최근 과로로 사망한 택배 노동자처럼 말이다. 여성노조는 창립 후 이런 특수고용노동자 문제를 가장 첫 번째로 내세웠다.

"당시 여성노조 찾아온 경기보조원 노동자들 말을 들어보니, 정년이 43세래요. 적어도 너무 적잖아요. 근데 다른 부서의 직원 정년은 55세예요. 전부 여성인 경기보조원만 43세예요. 회사가 그랬대요. '여성이 꽃같이 야들야들해야 골프장 오는 사람들이 좋아할 거 아니냐'고.

그리고 골프공이 진짜 위험해요.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뚫을 수 있는 정도래요. 사람이 맞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런데 경기보조원 노동자는 특수고용노동자라 산재보험, 고용보험 다 안 돼요. 휴가도 없고 퇴직금도 없어요. 그래서 당시에 '성차별에 따른 조기 정년 문제 해결해야 된다',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했어요."


여성노조는 2000년에 경기보조원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걸 증명하는 행정해석을 끌어냈다.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면서 노조 탄압이 심해져 노조 간부가 부당해고를 당하기도 했지만, 이들 또한 2018년에 복직됐다.

88CC 경기보조원 분회가 설립된 이후 간접고용으로 고통받는 청소 노동자, 연속 근로가 안 되는 학교 급식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여성노조를 찾았다. 전통적인 기업 정규직 노조가 아니라 법을 교묘히 피해가고 심지어 법 적용조차 되지 않는 새로운 고용 형태의 노동자가 여성노조의 문을 두드렸다.
  
플랫폼 노동에 돌봄 문제까지, 여성노조의 '다양한 목소리'
 
여성노조 디콘지회가 KT 광화문 사옥 앞에서 연재 중단된 작품의 전송권을 반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자노동자지회 여성노조 디콘지회가 KT 광화문 사옥 앞에서 연재 중단된 작품의 전송권을 반환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전국여성노조

관련사진보기

  
여성노조의 문을 두드린 노동자 중엔 '플랫폼 노동자'도 있다. 2018년에 결성된 '디지털 콘텐츠 창작 노동자 지회'다.
  
네이버웹툰, 카카오페이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노동 형태가 생겨난다. 그때마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또 생겨난다. 1999년의 88CC부터 2020년의 플랫폼 노동자까지. 여성 노동자는 제일 먼저 불안정한 노동의 벽에 부딪히고 제일 먼저 그 벽을 뚫어왔다.

"웹툰 작가는 프리랜서라서 노사 관계가 적용이 안 돼요. 그런데 네이버, 레진코믹스 같은 플랫폼은 분명 사용자성이 있거든요. 작가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업무 규칙을 규정하잖아요. 그런데 플랫폼 노동자는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일이 끊길 수가 있어요. 보호가 안 되는 거죠."

현재 여성노조는 돌봄 문제에도 주력하고 있다. 돌봄 문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시간제로 일할 수밖에 없는 돌봄전담사 문제와 일하는 여성이 일을 하면서 아이를 돌봐야 하는 문제다. 두 문제 모두 코로나19로 인해 어린이가 학교에 가지 않게 되면서 심각해졌다. 돌봄전담사는 무급 노동을 강요받았고, 일하는 여성은 아이 맡길 데가 없어서 발을 구른다. 코로나19로 커진 사회 문제의 하중을 여성 노동자가 견디고 있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오늘날의 여성 노동자를 본다면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은지 물었다. 나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여성노조가 탄생한 1999년부터 지금까지 약 20년간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치열하게 싸워왔던 것을 회고하면서.

"전태일 열사는 여성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본인이 (여성 노동자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했어요. 지금 살아있었다면 '여성 노동자가 나서서 자신들 문제를 해결하는 걸 보니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함께 할걸. 함께 했으면 더 잘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했을 거예요."

[전태일 50주기 기획 - 내 노동을 헛되이 말라] 
① "전태일 살아있었으면 손배가압류 소장 받았을 것" http://omn.kr/1q51p
② "최저 임금 올랐다고 1시간 일찍 출근하래요" http://omn.kr/1q9w7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 시리즈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운영하는 6월민주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태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태일, #여성노조, #나지현, #노동조합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와 산책을 좋아합니다. 준이, 그리, 도비와 삽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