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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덥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경산의 8월, 그 더위조차도 막을 수 없는 냉기가 경북 경산시 평산동의 폐코발트광산에서 흘러나왔다. 억울하게 학살당한 채 70년 가까이 그 유해조차 다 발굴되지 못한 '경산코발트광산사건' 피학살자들의 한과 유가족들의 서러움이 담겼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 분단의 비극과 극단적 대립 속에 죽임 당한 3500여구의 유골은 그 차가운 냉기로나마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분단의 광기를 폭로하고 있다.

8월 3일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민간인 최대 학살 사건 중 하나인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겪은 경산코발트광산 유족회를 만났다. 무더운 날씨에 방문했음에도 기꺼이 만남에 응해준 유가족들과 〈경산신문〉 기자들의 도움으로 사건의 전말과 유족들의 아픔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학살 현장으로 들어가는 광산 입구
 학살 현장으로 들어가는 광산 입구
ⓒ 안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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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코발트광산 사건의 진실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이라는 명칭으로 이 사건을 조사했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에서 사건을 정리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7월부터 8월 사이, 경산∙청도경찰서,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가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들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중 상당수를 적법한 절차 없이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경산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살해한 사건"

국민보도연맹이란 무엇인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좌익 활동가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여기에 가입하면 과거 좌익활동을 일절 묻지 않고 사회활동을 보장한다는 약속으로 1949년 4월에 만든 조직이 바로 국민보도연맹이다. 즉 남북이 단독정부를 세울 만큼 좌우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1940년대 말, 남한에는 크든 작든 좌익활동과 관계됐던 이들이 많았고 그들을 보호하고 계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직접 나서서 관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관련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실제 좌익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가입된 경우, 단지 빨치산에 식량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가입된 경우, 오히려 빨치산에 피해를 받았는데도 가입된 경우, 친척의 권유와 마을 구장 및 읍장 등의 권유로 가입하게 된 경우 등이 있었다. 다음은 아버지를 보도연맹사건으로 잃은 경산유족회의 한 유가족의 이야기다.
 
인민위원회, 10월혁명 등을 했던 사람들을 잡으려고 보도연맹을 만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다 피해 버리고 신고를 안 하니까 통, 반장, 이장, 군수 이런 사람들에게 할당량을 줬다. 그냥 진짜 순수한 논매고 밭 매고 하는 사람들한테 보리쌀 주고 보도연맹 가입하라, 그랬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은 보도연맹원들을 잠재적 적군으로 보고 연맹원들을 예비 검속한 후 학살을 자행했다. 국민보도연맹 조직결성을 주도했던 검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전국 맹원 수는 30만~33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사건의 희생자는 전국적으로 최소 수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에 이른다고 알려졌다. 

경산과 청도 지역에서도 군경이 경찰서나 학교 등지에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한 후 코발트 광산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여기에 대구 형무소의 수감자들 또한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와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당했다. 보도연맹원 약 1000명, 대구형무소 수감자 약 2500명, 총 3500명이 코발트광산에서 죽임 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신은 코발트 광산 내부로 쏟아 넣어졌다.

앞서 말했듯, 경산코발트광산 사건은 사상과 관련 없는 이들까지 포함하여 아무런 적법한 절차 없이 총을 들지 않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점에서 법률의 측면이나 인권의 측면에서 비난받아야 할 국가폭력 사건이다. 그러나 희생자들이 누구인가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사건은 민주주의의 후퇴였으며 일제 잔재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정통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 또한 드러나게 된다.

당시의 대구경북 지역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일제 시대의 친일 관료와 경찰들이 대거 복직하게 되었고 이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많은 시민들은 미군정의 잘못된 분배정책과 시민사회 탄압까지 더해져 분노가 극에 달했다. 자연스레 좌익 세력들이 주도했던 평등한 세상과 토지분배를 내세운 활동에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결국 대구 경찰의 민간인 발포를 기점으로 1946년 대구경북 지역에서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이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과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좌익 세력가들 대부분을 구속하거나 사형시키는 등 극단적으로 탄압했다. 대구경북 지역의 뜻있는 시민들은 친일 관료와 경찰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미군정의 통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씨가 말라갔다.

경산코발트사건의 학살 피해자들 중 많은 이들은 이러한 항쟁의 흐름에 앞장서지 않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되거나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이들이 잠재적 적군으로 여겨져 학살당한 것은 대구경북 일대의 평등하고 정의로운 민주사회를 열망하는 싹을 뿌리부터 뽑아버린 일이었다.

당시 학살 명령은 '정부 최고위층'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증언이 있다. 이는 이승만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대부분의 학살이 일어난 1950년 7월 이후는 이미 미군이 군사작전통수권을 가진 후이므로, 이처럼 군경이 체계적으로 움직인 데는 미군의 명령 혹은 최소한 승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내를 받으며 수평2굴 내부를 돌러보았다
 안내를 받으며 수평2굴 내부를 돌러보았다
ⓒ 안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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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유해발굴 중인 수평2굴 내부 모습
 지금도 유해발굴 중인 수평2굴 내부 모습
ⓒ 안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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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학살 흔적들

우리는 유족들의 안내로 지금도 유해가 묻혀 있는 코발트 광산 수평 2굴 내부로 들어가볼 수 있었다. 경산 코발트광산은 원래 금은 광산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코발트 광맥이 발견되어 군사용 코발트 수탈지로 사용되었다. 일제 패망 후 방치되어 있다가 한국전쟁 직후 학살사건의 현장이 된 것이다. 이후 한국 현대사의 질곡 속에 광산은 유해조차 발굴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다가 50여년이 지나서야 유족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내부로 들어가볼 수 있게 되었다. 

무더운 날씨였음에도 수평 2굴은 입구에서부터 냉기가 감돌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협소한 광산 내부는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던 사람들과 코발트광산 학살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의 한이 서려 있는 듯했다. 여기저기 유해 발굴을 위해 흙더미를 담아놓은 포대와 도구들이 널려 있었고 바닥에는 흙과 유해를 나르기 위한 선로가 깔려 있었다. 광산 내부를 함께 돌며 안내해 준 〈경산신문〉 최승호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직갱도가 있고 수평갱도가 있는데 우리는 수평갱도를 따라 수직갱도로 연결된 곳까지 들어갔다. 학살은 수직갱도 바깥에서 일어났고 학살한 후 시체를 수직갱도 안으로 던져 넣어 처리했다. 발굴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여 유기하느라 수직갱도가 꽉 차자 수직갱도를 폭파했던 것 같다는 점이다. 유골들에 인화물질을 붓고 불을 지른, 혹은 폭파시킨 흔적에 의해 검게 그을린 자국도 나타나고, 유해들이 수직갱도 아래쪽에서 매우 압축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직갱도를 폭파시켰기 때문에 발굴에도 어려움이 많다. 큰 비용이 들고 안전도 많이 고려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수평 2굴 내부를 돌며 설명을 들은 후 굴 밖으로 나오니 다시금 여름의 무더위를 느낄 수 있었다. 곧 수평 2굴 입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유족회가 세운 위령탑으로 이동했다. 위령탑에는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직 유해조차 발굴되지 않아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희생자들은 이름이 없었다. 

학살당한 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위로받고 유가족들의 서러웠을 세월이 치유받을 수 있기를 위령탑 앞에서 기도했다.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러한 학살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갈등과 대립, 전쟁의 역사가 끝나기를 간절한 마음 담아 염원했다.

남겨진 유족들의 삶과 한

이후 자리를 옮겨 경산 시내에 위치한 유족회 사무실에서 희생자들의 이야기와 유족들이 연좌제로 인해 힘들게 살아온 세월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이 좌익 활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든, 혹은 과거 이력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든 국가권력이 정당한 재판의 과정 없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라 했다. 

희생자들은 미처 자신을 변론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살해당했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서 학살을 당해야 할 만큼의 행동이 있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해 한 유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이라고 해서 모인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죄인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죄 없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모아놓고 어떤 경찰이 보니까 자기 친구가 있어. 그래서 가라고는 못하고 살려주려고 담배를 사 오라고 시켰는데 담배를 사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가라고 한 건데. 그만큼, 내가 무슨 죄인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죄 있는데 모이라고 하면 안 모이지. 보도연맹 교육 있다고 해서, 그전에도 교육으로 모인 적도 있고, 내가 가입을 해놨으니 교육 있다고 하니까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래 가면 그래 끝이라. 잡으러 댕긴 게 아니고 불러모았다니까.

학살사건은 희생자들의 목숨만 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멍에까지 씌워져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아야 했다. 유족들이 처음 유족회를 결성하고 보니 서로가 비슷한 삶을 살아왔기에 큰 유대감을 느꼈다고 했다. 지금은 유족회가 하나의 가족이라고도 말했다. 유족회원들은 다음과 같이 본인이 살아온 삶을 증언했다.
 
아버지가 스물셋, 어머니가 스물하나. 나는 백일 되었을 때 아버지가 변을 당하셨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빨갱이 소리를 들었다. 애들하고 놀고 있으면 부모가 나와서 빨갱이랑 놀지 말라, 아버지 없는 애와 놀지 말라 했었다. 어머니는 그중에도 공부를 열심히 시키려고 하셨다. 중학교 즈음에는 이장이 네 뒤에는 경찰들이 항상 감시하고 있으니까 행동거지 항상 조심하라 하더라. 또 조금 후에는 네가 암만 공부 열심히 해봤자 네 아버지가 빨갱이기 때문에 취직 못한다 하더라. 그래도 설마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피부로 느낀 것은 졸업 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가서 취업 면접을 보았는데 마지막에 신원조회 하니까 그게 딱 나와서 안 된다 하더라. 그때 딱 느꼈다. 이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진짜 나한테 닥치는구나. 그때 한창 사춘기에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구나 싶더라. (중략) 제일 원통한 것이 제사도 한 번 제때 드리지 못한 것이다. 진상규명 안 될 때는 이산가족 때도 눈 빠지게 봤었다. 한 가족의 모든 것이 완전히 싹 바뀐 것이다. 지금도 안타까운 것은 진상규명되고 보상해줬다고 하지만, 주변에서 대다수는 아직도 빨갱이니 죽었지 하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진다. 다른 사람들 앞에 가면 항상 죄책감이 있으니까 움츠러들고……
나는 아버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재가하여 고아처럼 살았다. 쪼만한 것이 친척집에서 눈칫밥 먹으면서 초등학교나 겨우 나오고 고되게 일해가면서……  그리고 나도 제삿날을 몰라가지고 9월 9일날로 지냈거든.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신 날짜가 기록이 남았다고 하더라. 6월로…… 그래서 그날로 바꿔서 제사지내고 있다. (중략) 돈 없고 가난한 것보다 외로운 것이 더 힘들다. 싸워서 남한테 맞아도 집에 가서 부모한테 말할 수 있는데 누구 말할 데가 있나 누가 거두어줄 사람이 있나……

사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1960년 4∙19 혁명 이후 전국적으로 실태조사가 일어나는 중에 1960년 7월 한 차례 경산유족회가 창립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16군사정변에 의해 모든 진상규명 활동이 중단되고 만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은 애써 유가족들이 수집한 유해들을 다시 회수해 경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보도연맹 학살터였던 대구 가창댐에 버렸다고 한다. 1950년 이후 10년간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한마디 못하고 울분을 삼켰던 유가족들은 더욱 길어진 40여 년의 세월을 또다시 눈물로 보내야 했던 것이다.
 
신원이 확인된 자들의 이름이 적힌 위령탑
 신원이 확인된 자들의 이름이 적힌 위령탑
ⓒ 안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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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는 2000년대 초 민간인 학살에 대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진상규명 위원회가 구성되는 분위기 속에서 2000년 3월에 결성되었다. 결성과 동시에 유족회는 각 정부 부서와 청와대 등에 사건의 진상규명과 유해발굴을 촉구했다. 하지만 관련법이 없기에 국가의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을 뿐이었다. 

이때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유해 발굴을 제안해왔다. 그 과정에서 새마을운동 당시 농업용수를 위해 콘크리트로 막아놓았던 수평 2굴을 개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민간 차원의 발굴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민간 차원의 발굴에 힘입어 2007년에는 진실∙화해위원회 주관으로 드디어 국가 차원의 유해발굴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후 위원회의 활동 종료로 인해 2009년까지 총 500여 구의 유해만 발굴되었고 광산 주변의 골프장과 요양병원 아래에 있는 유해는 미처 다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이가 많아지고 몸이 약해졌지만, 유족들은 지금까지도 국가와 시민 사회에 이 억울한 학살 사건을 알리고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유족들이 바라는 것은 우선 국가가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한을 푸는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을 사회가 기억하고 교육의 장으로 삼도록 국가적인 기념일 또는 희생자들을 국가유공자로 선정하는 것과 코발트광산사건 관련 평화공원을 조성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직 유해가 절반도 채 발굴되지 못한 상황이므로, 국가가 나서서 발굴하고 적절하게 안치할 것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 겪어야 했던 오랜 세월 속에 유족들이 가지게 된 트라우마 치유와 실질적인 복지지원이 있어야 하며, 여러 이유로 아직도 자신의 가족이 코발트광산 사건으로 희생된 것을 신고하지 않은 미신고자들이 마음 놓고 신고하기 위해 힘써 달라 이야기했다.

생명평화 고운울림 기도순례를 하며 한반도 곳곳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마주하게 된다. 이 땅의 역사는 그야말로 무고한 이들의 피 위에 쓰여진 역사였다. 희생자들의 영혼은 아직도 그 어두운 동굴을 나오지 못하고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이 사회가 그들의 학살사건에 무관심하거나 눈감고, 빨갱이라는 시선으로 이미 죽은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사회라면 말이다. 

진정으로 사과하고 한을 풀어 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를 국가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사건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잊혀져서는 안 될 사건이다. 이 땅에 진실한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유족들은 애써 찾은 유해들을 5.16군사정변 이후 가창댐에 버려야 했다
 유족들은 애써 찾은 유해들을 5.16군사정변 이후 가창댐에 버려야 했다
ⓒ 안용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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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생명평화고운울림기도순례, #국민보도연맹, #경산코발트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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