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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만 명, 한국 전쟁 이후 해외로 입양된 한국 입양인들의 숫자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외로 입양됐던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찾는다. 우연한 계기로 입양인의 가족 찾기를 도왔던 평범한 한국의 여성들은 마음을 모아, 미국의 여성 입양인들과 함께 입양인을 돕는 모임 '배냇'을 만들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입양인들을 미국과 한국의 회원들에게 소개해 준다.

그들을 돕다 보면 본의 아니게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생생히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해외입양인들의 슬픔, 기쁨, 아픔 그리고 부끄러운 역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 기자 말

 
▲ 조슈아 입양당시 사진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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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신가요? 부모님이 저를 찾고 계신다고요? 저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버리신 분들입니다. 자식을 버리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이미 제게 돌아가신 분들입니다."

그가 보낸 답장은 날이 잔뜩 선 칼날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한국을 떠난 지 38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에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평생 가슴 속 응어리가 되어 그를 부단히도 아프게 했을 단어, '부모'.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란 말인가. 그들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

조슈아 찾기, 하나 된 해외 입양인들

지난해 10월, 대구에 사는 한 노부부가 38년 전 잃어버린 자식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오래 전 미국으로 입양됐으나, 입양 당시 양부모가 남긴 주소가 더는 존재하지 않아 아이 찾는 일이 답보 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국에 사는 해외 입양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은 우리보다 나은 해법을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같은 입양인으로서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조직적으로 '조슈아 찾기'에 나섰다. 먼저 그의 사진과 인적사항을 해외 입양인들의 커뮤니티에 올렸다. 그의 소식은 네트워크를 타고 삽시간에 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전파의 속도와 파급력은 비행기 속도보다 빠르고 훨씬 위대했다.

소식을 올린 지 10분이 지났을 무렵, 한 입양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찾은 것 같다!" 38년 동안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조슈아를 입양인들이 찾아낸 것이다. 그를 돕고 싶다는 입양인들의 간절한 마음이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부모가 그토록 찾아 헤맨 조슈아는 콜로라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다.

"부모님이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부모가 찾고 있다'는 소식을 조슈아에게 처음 전달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가 '얼마나 기뻐할까?' 상상을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온 그의 답장은 예상을 빗나갔다. 부모를 찾았다는 기쁨보다는 원망과 당혹, 분노 등 아픈 감정들이 채워져 있었다. 친부모를 찾고 싶어 평생을 애태우며 살아가는 보통의 입양인들과 그는 분명 달랐다. 무엇 때문일까.

그때, 친부모 대신 나타난 파란 눈의 양부모
 

조슈아는 1982년 미국으로 입양된 해외 입양인이다. 당시 그의 나이 세 살,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나이였다. 1981년 12월 20일, 세 살배기 아이는 대구 모처에서 길을 잃은 아이로 발견돼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파출소에 맡겨졌다. 파출소에서 몇 시간을 보낸 그는 당시 부모를 잃은 아동들이 머무는 실종아동보호 시설로 바로 인계되었고,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르다 가까운 고아원으로 이송되었다.

지금은 보육원으로 불리지만 고아원으로 통칭하던 시절, 조슈아는 고아원에 보내지자마자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는 아이' '고아일 가능성이 큰 아이'로 분류되었다. 이후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 앞으로 닥칠 운명의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 달 정도 지냈을 무렵, 파란 눈동자를 가진 낯선 부부가 조슈아를 만나러 왔다.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 대신 처음 본 낯선 이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조슈아는 그때만 해도 이 낯선 어른과 자신이,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질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들이 누구인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어린 나이였다. 조슈아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의 손을 잡고 고아원을 나섰다. 그렇게 자신의 고향인 대구를 영원히 떠났다. 길을 잃은 지 딱 한 달 만에 모든 일이 진행됐다.

당시 미군으로 복무하던 양부모는 조슈아를 부산으로 데리고 가 두 달을 함께 지낸 뒤 같은 해 4월 비행기를 타고 한국 땅을 영원히 떠났다. "우리 엄마를 찾아 주세요!"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세 살배기 조슈아의 해외입양은 속전속결로 결정됐다.

조슈아가 친부모에 대한 궁금증을 처음 갖게 된 것은 세월이 한참 흐른 16세 무렵이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던 앳된 십대 소년은 다른 입양인들의 도움으로 한국의 입양기관에 부모 찾기를 신청했다. 하지만 대다수 입양인이 그렇듯 입양기관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절망에 빠뜨렸다. 고아원과 입양기관으로부터 받은 서류에는, 일체의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음'(Unknown)이 적혀 있었다.
 
입양 역사를 살펴보면 1960~1970년대 출생한 대다수 입양인의 입양기록 카드에는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다. 부모에 대한 인적사항 기재를 법적으로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종 아동이건, 버려진 아동이건, 입양 서류에는 똑같이 'Unknown'이라고 표기됐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Unknown'이라고 해서 다 같은 'Unknown'이 아니다. 입양을 보낸 부모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미혼모들은 자신의 정보 제공을 거부했기에 'Unknown'으로 기록된다. 이와 달리 실종아동의 부모는 실제로 정보가 없어서 'Unknown'으로 기록된다.

문제는 입양인들이 자신이 실종아동인지, 버려진 아동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입양인은 엄마가 미혼모인 경우가 다수이니 자신도 버려졌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산다. 조슈아도 그랬다. '부모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부모가 버렸다'고 인지했다.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지자 조슈아는 친부모에 대한 기억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조슈아로부터 두 번째 답장이 날아오기까지는 약 한 달이란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가 지난 한 달 동안 겪었을 혼돈을 생각하니 부모 소식을 전달한 것이 괜스레 미안해졌다. 16세에 친부모 찾기를 단념한 뒤, 오늘날까지 성실히 살아왔을 그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사건이었을 테니 말이다.

"친부모를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조슈아의 마음이 조금은 열린 것일까.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게 갔다. 처음 그에게 연락을 취하고 두 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가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1월 말, 조슈아는 바다를 건너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자, 부모가 기다리고 있는 대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1월 30일 오전 10시 30분, 동대구역에 도착한 조슈아는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 대구지방경찰청으로 이동했다. 38년 전 부모의 손을 놓친 그가 맨 처음 갔을 그곳. 부모님이 계신 2층 사무실로 올라가기 전 조슈아는 "잠깐만요"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뚜벅뚜벅 사무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취재진의 플래시 소리 사이로 "왔네, 왔어, 수야(조슈아의 아이 때 이름)가 왔어!"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아들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어머니는 조슈아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굳어 있던 조슈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미움, 원망, 그리움... 조슈아가 무엇을 품고 이곳에 왔건 간에 엄마의 뜨거운 눈물과 따뜻한 포옹은 지난 38년의 모든 것을 무력화시켰다. 이것이 천륜인 것인가.

조슈아를 품에 안은 아버지는 "한 달만, 딱 한 달만 고아원에서 우리 수야가 우리를 기다려 주었더라면... 부모는 자식을 잃어버린 것 자체로도 죄인입니다, 왜 그때 우리가 그 고아원을 바로 찾아가지 못했던 것일까요"라는 말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때, 엄마 아빠는

조슈아에게 악몽 같은 사건이 일어난 때는 지난 1981년 12월 20일이다. 당시 조슈아는 부모님의 경제적 사정으로 잠시 지인의 집에 맡겨졌고, 그 어른을 따라 예식장을 나섰다가 손을 놓치고 말았다. 문제는 아이를 잃어버린 지인이 몇 주 동안 그 사실을 부모에게 숨겼다는 것이다. "잘 지낸다"라는 말만 믿고 지내던 중 부모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지인의 집을 찾았지만, 이미 아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잃어버린 사람을 원망하면 무엇을 합니까. 아이를 찾으러 우리 둘이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어요. 실종아동보호 시설을 매일 찾아가 아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죠. 실종신고도 하고 전단도 만들어 대구 전역에 뿌리고 공원이며 산이며 안 다녀본 곳 없는데 결국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알고 보니 아이가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 수야는 이미 입양이 결정되어 양부모와 부산으로 옮겨졌을 때더군요." 

이미 바다 건너 낯선 이의 품에 안긴 아이를 찾아 부부는 30여 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과 간절한 그리움에 38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부부는 미안한 마음에 더 이상의 아이도 갖지 않았다.

"잃어버린 아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아이를 가질 수 없었어요. 언젠가 '엄마' 하고 아이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요. 38년 동안 조수야는 우리 곁에 없었지만, 가족 모두 지금까지 저를 '수야 엄마'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찾게 될 줄 알았으면 동생을 갖는 것인데. 우리 수야에게 형제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엄마의 입가에는 비로소 편안한 미소가 흘러나왔다.

다시 만난 이들은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조슈아는 부모님이 그동안 얼마나 자신을 찾기 위해 애를 썼는지, 얼마나 애타게 보고 싶어 했는지를 전해 듣자 굳게 닫았던 마음을 풀고 뜨거운 포옹을 했다. 해피엔딩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38년
  
▲ 38년만에 엄마 손잡고 집으로 
ⓒ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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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슈아처럼 부모를 만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세상에 조슈아처럼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입양인은 많지 않다. 결말을 내지 못한 채 새드엔딩으로 달려가는 입양인의 수가 훨씬 많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 입양된 20여만 명 중 단 3%만이 부모를 찾았다. 이 중에는 조슈아처럼 길을 잃은 뒤 억울하게 해외로 보내진 아이도 상당수일 것으로 파악된다.

만일을 가정해본다. 그때 그 어른들이 아이들 편에서 생각해주었더라면, 업무처리 하듯 아이를 다루지 않았더라면, 부모를 찾아주려고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어땠을까?

1960~1980년대 당시 어른들의 무책임한 태도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국 땅을 떠나야만 했던 입양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아담 크랩서는 약 40년 전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양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한 후 16세 어린 나이에 파양을 경험했다. 그는 합법적으로 미국에 입양된 것임에도 시민권이 없어 불법체류자가 됐고 이후 강제 추방을 선고받았다. 최근 크랩서는 한국 정부와 입양기관인 '홀트 아동복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크랩서의 사례는 조슈아와 매우 유사하다. 부모를 잃은 실종아동이지만, 별다른 조치 없이 조슈아처럼 곧장 입양이 결정됐다. 마트에서 아이를 잃어버려도 공황에 빠지는 것이 부모다. 어린 나이에 세상 전부와도 같은 엄마를 잃은 아이의 충격은 말해 뭐할까. 

조슈아 어머니가 잃어버린 아이를 다시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무려 3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해피엔딩 말고, 그들이 살아내야만 했던, 견뎌내야만 했던 38년이라는 시간에 더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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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입양, #해외입양, #실종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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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70~80년대 해외로 입양된 친구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 알게 된 친구가 생모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면서다. 그녀를 돕는 과정에서 나는 입양인의 아픔에 공감하게 됐다. 현재까지 수 많은 입양인들과 인연이 되어 돕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세상 어느 드라마보다 감동적이다.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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