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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깊은 밤. 이른 아침부터 하루종일 울려대던 요란스런 오토바이 경적소리마저도 저만치 잦아들어 간다. 하노이의 중심 유서깊은 '호안키엠' 호수 주변의 한 수상 인형극 전문극장의 인공 연못에서는 마치 수상가옥처럼 물위에 세워진 붉은 기와 누각을 배경으로 투박한 듯 보이는 목각 인형들이 나와 베트남의 신비한 신화와 전설 속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수상의 무대에 엷은 물안개가 피어오르자 찰랑거리던 연못 한가운데를 가르며 모습을 드러낸 인형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전해준다. 세계 유일의 전통 수상인형극 베트남의 '무아 로이 느억' (Múa rối nước). '무아 로이 느억'은 베트남어로 '물위에서 인형을 춤추게 하는 놀이'라는 뜻이다.

11세기 궁중에서까지 유행했을 정도로 베트남인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수상 인형극은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양식과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소박한 내용으로 현재까지 농촌공동체의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말탄 인형이 호위병사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한 행차를 연출하고 있다.
▲ 베트남 수상인형극 말탄 인형이 호위병사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한 행차를 연출하고 있다.
ⓒ 변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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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금거북이 물위로 내민 머리 위에 세 개의 산을 이고 찰랑거리는 호수를 가르며 유유히 헤엄친다. 천천히 흐르는 맑은 물 속으로 거북의 등딱지와 다리가 보인다. 거북은 호숫가의 둑 쪽을 바라보며 물을 뿜을 듯 입을 벌리고 왕을 우러르며 머리를 쳐든 뒤 다시 고개를 앞으로 숙여 물위에 비친 구름과 드높은 하늘을 살핀다. 궁중 음악이 연주되고 동굴의 문이 열리자 요정들은 '바람이 분다'를 춤추며 나타난다. 행운을 축하하는 노랫소리도 들려온다. 새들은 지저귀며 춤추고 천진난만한 사슴들은 기뻐 날뛴다."

신화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이 글은 베트남 이왕조시대인 1121년에 세워진 베트남 북부 남하 지방 두이 띠엔 지역에 소재한 불교사찰 도이사의 비석에 남아 있는 글귀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을 묘사한 기록으로 당시 인형극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상 인형극의 기원이나 기타 자세한 기록과 유물은 프랑스에 이은 미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거의 소실됐다.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이 비문이 수상인형극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베트남 전통수상 인형극이 11세기에 궁중에서까지 유행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인형극은 이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연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베트남 학자들 가운데는 베트남 인형극의 기원을 수천년 전으로 잡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아직 정확한 연원을 실증적으로 입증할 만한 사료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웃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에도 일반 지상 인형극인 '무아 로이 칸'이 있어 '무아 로이 느억'과 함께 전승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물 위에서 펼쳐지는 베트남 수상인형극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찿아볼 수 없는 베트남인들의 독창적인 양식의 인형극으로 베트남에서 압도적인 대중적 인기를 누려왔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가장 유명한 수상인형극 전용극장은 탕롱(Thăng Long) 극장. 지난 세기 69년도에 호안키엠 호수 주변에 설립되어 반세기 동안 전통수상인형극의 맥을 이어 온 탕롱극장은 매일 밤 두 차례 수상인형극을 공연한다. 

주요 레퍼토리는 신화나 전설을 담은 '환검호  전설', '요정의 춤', '봉황춤', '용춤' 등과 중국 후한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으킨 베트남 최최의 대규모 저항운동을 소재로 다룬 '쯩자매 이야기' 등 서사적인 내용도 들어 있다. 이밖에도 소박한 서민생활의 에피소드를 담은 '농사일', '보트경기', '씨름', '고기잡이' 등등 수십 가지가 넘는다. 물 위에 지은 붉은 기와 누각을 배경으로 목각 인형들이 펼치는 베트남인들의 소박한 삶과 꿈 이야기에 빠지다 보면 하노이의 밤은 어느새 깊어간다.

현재 수상 인형극은 베트남 북부 지방의 농촌 마을들을 중심으로 누대를 이어 자연스럽게 전수되어 온 수상인형극 조합들에 의해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의 민속놀이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수상인형극은 본래 호수와 강이 많았던 홍하삼각주 지역의 베트남 북부 지역 마을에서 전통 축제 때 놀던 민속 놀이 중 하나다. 원래는 극장 안이 아니라 마을마다 흔하게 흩어져 있는 호수나 연못에 인형을 조종하는 수상 누각을 짓고 공연을 벌였으며, 공연 시간도 밤이 아니라 한낮이었다. 

무대 배경이 되는 기와를 얹은 2층 양식의 멋스런 누각은 상설 누각이 있었는가 하면 유랑극단이 사용하는 가설 누각도 사용되었다. 이 누각은 모두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인형극단들은 수상 누각의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불교 사원 타이사 롱찌 호수 위의 누각을 그 전형으로 삼고 있다. 

이 누각은 수상인형극만을 공연할 수 있도록 벽돌을 쌓고 기와 지붕을 얹어 물 위에 세운 건축물로, 그 안에 인형 조종방과 악기 연주실을 갖추어 놓고 있다. 민속축제가 열려 수상인형극을 공연할 때는 작은 배로 인형 조종사, 악사 등과 그 밖의 필요한 물건들을 실어 나르도록 되어 있다. 이 노천 수상 누각은 지금도 수상인형극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천의 수상 누각을 중심으로 한 인형극의 무대는 한 폭의 전형적인 베트남 풍경화를 연출한다. 있는 그대로의 푸른 하늘과 연못에 있는 수초조차도 자연스런 극의 배경이 되어 준다. 관객들이 내부를 보지 못하도록  가려진 대나무발 장막 뒤에서는 인형조종사들이 허리까지 차오른 물 속에서 장맊 밖의 인형들을 놀리기 바쁘다.

인형들은 대나무 발 사이로 들고 난다. 무대에서 다 놀고 난 인형들이 대나무발 사이로 들어오면 새로 놀 인형들이 나간다. 인형 조종사들은 물밑으로 인형과 연결되어 있는 긴 막대나 대나무를 손에 쥐고 인형들을 놀랍도록 능숙하게 조종한다. 인형의 관절마다 연결된 줄이 막대기나 대나무와 연결되어 있어 인형 조종사들은 정교하게 인형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할 수 있다.

인형은 전문 조각가들이 솜씨있게 깍아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각 마을의 인형극 조합 구성원들이 직접 인형을 만들기 때문에 인형들의 표정 하나 하나에는 베트남 농민들의 소박한 미학이 담겨 있다. 베트남에서 매우 흔한 돼지나무로 투박하고 거칠게 깍아 만든 인형들은 논이나 밭에서 일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표정이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으로 녹아 있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하노이 중심가에 위치한 탕롱(Thang Long) 수상인형극 전문극장에서 펼쳐지는 목각 인형들의 '요정들의 춤'.목각 인형들이 물위에서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이 넘치는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다.
▲ 베트남 수상인형극 하노이 중심가에 위치한 탕롱(Thang Long) 수상인형극 전문극장에서 펼쳐지는 목각 인형들의 "요정들의 춤".목각 인형들이 물위에서 살아 움직이듯 생동감이 넘치는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다.
ⓒ 변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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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대사는 인형들의 움직임을 쫓아가며 극을 한층 흥겹게 이끈다. 무대 왼편 옆에 자리 잡은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동시에 인형들을 대신해 대사를 읊는다. 이들은 인형의 동작에 맞춰 피리나 북 등 여러 가지 베트남 민속 악기 합주를 들려주기도 하고 구수한 입담으로 대사를 외우기도 하며 극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수상 인형극의 흥겹고 요란한 놀이판을 보면 한국의 유일한 전통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꼭두각시놀음에도 극의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악사가 등장한다. 한국의 꼭두각시 놀음은 인형극 무대안에 들어가 인형 조종과 대사를 하는 대잡이, 무대 밖의 악사와 관객석 쪽에서 인형과 대화를 나누는 산받이로 구성되어 있다.

베트남의 수상인형극의 악사는 우리의 대잡이와 산받이 역할을 일부 겸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희자들의 역할 분담이 우리와 약간은 다르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성면에서 닮은 데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소재로 한 일반 서민들의 해학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측면에서도 낯설지 않다.

인형극은 신체적 표현에는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지만 인형의 상징적이고 형식적인 특성 때문에 독특한 표현의 세계를 갖고 있다. 세계 각지의 인형극에 사용되고 있는 인형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인형의 조종법에 따라 인형극을 몇 가지로 분류해볼 수도 있다.

먼저 막대기 한끝에 인형의 머리를 붙이고 막대기 아랫부분을 잡고 조종하는 가장 간단한 형태의 봉 인형극이 있다. 마로트(Marotte)로 불리는 유럽의 인형극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인형 밑으로 손을 집어 넣어 손가락과 손목을 움직여 조종하는 손인형극은 서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 있다. 또 봉 조종 인형극은 인형 속에 막대를 넣어 그것으로 인형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중국, 인도, 타이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인형극다. 마지막으로 실 조종 인형극은 인형의 관절에 실을 달아 조작하는 방식이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의 인형조종 방법은 기다란 나무 막대와 실을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봉 조종 인형극이나 실 조종 인형극 방식을 혼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물'이 중간매개체로 개입되면서 다른 모든 인형극과는 달리 조종 장치를 감추어주는 효과뿐만 아니라 인형에 놀랄 만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는 점이 경이롭다. 인형이 움직이면 물은 인형의 움직임에 따라 물결치기도 하고 튀어오르기도 한다. 또 물 위에 엷은 물안개를 피워올려 은은하고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물이 인형극을 구성하는 또 다른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북부 지방에서 시작된 '무아 로이 느억'이 '물'을 수용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물은 베트남 역사에서도 중요한 캐릭터의 하나였다. 매년 우기 때마다 불규칙하게 쏟아져 내리는 엄청난 양의 빗물은 기름진 홍하 델타를 자주 범람시킨다. 홍하 델타에 문명을 일구기 시작했던 베트남 사람들은 유사 이래로 이 '물'과의 싸움을 벌여왔다. 베트남의 문명를 잉태한 북부 베트남의 홍하 델타가 수상 인형극을 낳은 모태가 된 것은 자연환경이 가져다준 선물일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종전 후 전쟁의 잿더미에 묻혀있던 유형 무형의 베트남 전통문화 복원에 힘써 왔다. 전통 민속을 보존하기 위해 각 성마다 '문화마을' 지정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전통적인 마을 축제를 부활시켜 정부 차원에서 지원, 장려하고 있다. 베트남 수상인형극은 전통축제 마당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 메뉴로 자리잡고 있다. 하노이 등 북부 지방에만도 모두 26개가 넘은 수상 인형극 조합이 활발히 활동하며 전통의 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수상인형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베트남의 경제적 부흥과 함께 수상 인형극이 뿌리박고 있는 농촌을 비롯한 기층사회의 건강한 삶의 활력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문명의 젓줄 홍하 삼각주를 모태로 탄생한 독창적 수상인형극은 베트남의 울타리를 넘어 점차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사랑받고 있다.

태그:#베트남, #하노이, #인형극, #무아 로이 느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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