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재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IMF(국제통화기금). 난 아직도 IMF가 정확히 어떤 단체인지 무슨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한다. 그저 어렴풋이 세계 경제의 균형을 위해 존재하는 단체라는 것 정도로 알고 있다. 1997년 우리나라에 IMF 사태가 터졌던 것에 대해서도 약간 둔감하다. 그땐 난 너무 어렸고, 나의 아버지는 운좋게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정확히 알고 있다. 디테일을 잘 모른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알 수 있다. 1997년 IMF 사태는 분명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만들만큼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아니 이건 재난이었다. 단순 사망자의 숫자로만 비교해도, 혹은 사람들이 입은 경제적 피해액으로만 비교해도 이건 역대급 재난임이 분명하다.
 
이 사태가 누구의 잘못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든지, 또 IMF를 선택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같은 것들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사실 애초에 완벽히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경제라는 것은 알고 있는 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수도, 탓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정치판단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재난으로 인해 분명 피해자들이 발생했기에,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이 재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하고, 어렵지만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배워야 한다. 왜냐면 언제 우리가 이 재난의 피해자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재난이다.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아직 끝나지 않은 인재(人災)
 
<국가부도의 날>은 재난 영화다. 땅이 갈라지고 홍수가 밀려오거나, 또는 화산이 폭발하거나 빙하기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죽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이라 더 무섭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인 셈이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팀장 한시현(김혜수)은 영화 초반에 자신의 계산으로 남은 시간이 딱 일주일이라고 선포하는데, 이는 마치 지구의 행성 충돌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은 것만큼의 임팩트를 준다.
 
<국가부도의 날>에서의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보통 지구의 위기를 앞둔 지구인들은 처음엔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며 티격태격 대지만, 결국은 모두 힘을 합쳐 지구를 구할 방법을 고민한다. 본부에서 세계의 엘리트들이 머리를 맞대어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하는 모습은 이런 영화에서 가장 익숙한 장면 중 하나이다.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에선 그 반대의 모습이 나온다. 나라에서 경제를 제일 잘 알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힘을 합치지도 않는다. 긴박한 상황인 만큼 전문성이 부족할 수도 있고, 그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지만, 그 과정이 이상하다. 이게 진정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결정인지 의심 가는 멘트들이 난무한다.

정말 없던 능력까지 짜내어 해결책을 만들어도 모자란 시간에 나라의 윗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 국가가 부도가 났다는 사실보다 이것이 더 재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진짜 무섭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이 상황뿐만 아니라 이 상황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위'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아마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IMF사태는 그래서 인재(人災)다.
 
영화는 결국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한 우리나라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몇 줄의 자막으로 보여준다. 피해액이 얼마이며 자살률이 얼마나 늘었고, 실업자가 몇 만 명이 증가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는 어쩐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그것이 숫자의 장점인가 혹은 단점인가. 아니면 너무 오래된 일이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숫자가 내려가고 화면이 어두워지면, 영화는 20년이 지난 현재를 보여준다. 재난이 어떻게 해결이 된 건지 그 중간 과정은 생략되어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금방 알게 된다. 재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아직도 위에 있다. 어쩌면 이젠 진짜 손이 닿지 않는 저 위에 올라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감독은 자신도 답을 모르겠다는 듯,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자"는 교과서적인 나레이션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맘에 들진 않지만 이해는 할 수 있는 마무리였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하는 이유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고작 교훈을 얻었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영화가 끝나도 재난에 대한 해결책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역대급 재난영화로 남을 것 같다.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난 절대 안 속아

금융맨 윤정학(유아인)은 국가부도를 미리 예견하고 다니던 금융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투자자를 모아 자금을 마련하여 나라가 망한다는 것에 베팅, 결국 그의 말대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다. 그런데 재난영화에서 이런 인물은 상당히 생소하다. 그는 재난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도 아니고, 재난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물 또한 아니다. 내가 본 그는 오히려 이 재난이라는 파도 위에서 서핑을 하고 있었다. 파도가 거치면 거칠수록 서핑의 스릴은 더 짜릿한 법. 20년 전 그 짜릿함을 느껴 본 그는 이제 직접 다음 서핑지를 선택하고 있다. 어떤 파도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윤정학이 답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윤정학은 대한민국이 무조건 IMF에 손을 벌릴 것이라는 것에 올인을 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냉철하고 예리한 분석을 했던 그라도, 사실은 불안하다. 언론은 경제수석이 "절대 IMF와 협상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을 연일 쏴대고, 그에게 돈을 맡긴 투자자들은 끊임없이 정말 괜찮은 거냐고 따져댄다. 그 정보의 쓰나미 속에서 그는 외친다. "안 속아. 난 절대로 안 속아." 신뢰가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정학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판단을 내린다. 그는 파도 위에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슬프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인 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현실이다. "가만히 있으라"라고 말을 한 사람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속지 않았다면 많은 것들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미국 옛말에 "Fool me once, shame on you. Fool me twice, shame on me"라는 말이 있다.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 잘못이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 잘못도 있다는 것이다. 두 번 속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결국은 같은 결론.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철홍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anwukim.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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