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2년에 제작된 조선의 세계지도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아프리카 탐험을 이어갑니다. 지난 번에는 모로코의 유서 깊은 오아시스 도시 '씨질마싸(Sijilmasa)'를 강리도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모로코의 옛 수도 파스(Fas, 영어로는 Fez 혹은 Fes, 앞으로 현지 발음인 파스로 통칭함)와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Tripoli)를 강리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아득히 먼 북부 아프리카의 두 도시가 정말 15세기 초 한양에서 그려진 지도에 기록되어 있을까요?
먼저 아래 지도를 봅니다.
중세시대 북아프리카가 이슬람화되면서 교역과 문화가 발달하습니다. 특히 무역 거점 도시들은 크게 융성하였습니다. 강리도에 북아프리카의 주요 도시가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이 그러합니다. 위 지도에서 아프리카 가장 북쪽의 거점 도시를 나열해 보면 맨 서쪽부터 마라케쉬(Marrakech), 파스(Fez), 씨질마싸(Sijilmasa), 튀니스(Tunis), 트리폴리(Tripoli), 카이로(Cairo) 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튀니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강리도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씨질마싸에 대해서는 바로 지난 번 글에서 살펴보았고, 카이로에 대해서도 확인해 본 바 있습니다. 강리도상의 마라케쉬는 위치에 오류가 있지만 '마리타이사(麻里苔撒)'로 표기되어 있습니다(추정, 일본 교토대학 스기야마 교수, <대지의 초상>, 58쪽).
아래 강리도에서 이들 5개 도시를 표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오른쪽 위에 보이는 파고다 형상은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표시한 것입니다. 보다시피 지중해에는 바다 색깔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상상으로 채워 넣고 보아야 합니다.
맨 아래가 씨질마싸, 그 위 왼쪽이 파스, 그 오른쪽 위가 마라케쉬, 등대 왼쪽이 트리폴리, 등대 오른쪽이 카이로입니다. 상대적 위치가 실제와 차이가 있지만, 표기해 놓았다는 사실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파스와 트리폴리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선조들의 세계 지도를 통해 우리가 속하지 않는 문명권으로 여행을 떠나봅니다. 먼저 파스를 찾아가 봅니다. 강리도의 지리 정보가 유통되던 14세기 모로코 출신의 불세출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파스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파스는 명실공히 이방인들의 정주처이고 무의탁자들의 은시처이며 사신들의 도착지다. (…) 알라께서 이 수도 파스에 행복과 기쁨, 광명을 더해 주시고 시의 내외를 공히 보호해주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 정수일 역, <이븐 바투타 여행기> 345쪽
도시 이름에 주의해 봅니다. 영어로는 Fez, 불어로는 Fes라 하는데 모로코를 포함한 이슬람권에서는 아랍어로 '파스(Fas)'라 부릅니다. 이 명칭은 원래 8세기에 이 도시를 세웠던 베르베르족의 언어라 합니다. 베르베르족이 이슬람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파스라는 지명으로 굳어졌습니다.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족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프랑스 축구 영웅 지네 지단, 참회록으로 유명한 성 어거스틴(354~430)이 베르베르족 출신이라 합니다. 베르베르족은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명인 '파스'가 우리의 강리도에 '파수(法蘇)'라 표기되어 있는 것입니다. 8세기에 베르베르족이 건설한 이 도시는 옛 모로코 왕국의 고도였으며 현재는 100만 여의 인구를 지닌 모로코 제2의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소재지이기도 합니다. 859년에 설립된 알-카라윈(Al-Karaouine) 대학은 116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대학의 발자취를 보면 문명의 부침과 성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중세가 암흑시대였다고 말하는 것은 서구 기독교 문명권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중세는 이슬람권에서는 황금 시대였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도 모두 이슬람권에 소재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알-카라윈(Al-Karaouine)대학(모로코, 859)
2. 알-아자(Al-Azha)대학(이집트, 970-972)
3. 니잠 알-물크(Nizam al-Mulk)대학(이라크, 1065)
4. 볼로냐(Bologna)대학(이태리, 1088)
5. 파리(Paris)대학(프랑스, 1096)
6. 옥스포드(Oxford)대학(영국, 1096)
7. 몽펠리에(Montpelier)대학(프랑스, 1150)
8. 캠브리지(Cambridge)대학(영국, 1209)
다음은 지중해의 항구 도시이자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Tripoli)로 떠납니다. '지중해의 인어' 혹은 '바다의 신부'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는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이래로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까요. 트리폴리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Tripolis('세 도시'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트리폴리는 강리도에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요? '他剌思布魯'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중국어 발음으로 '타라쓰푸루'입니다. 트리폴리와 발음이 차이가 많아 보입니다. 헌데, 아랍어로 타라불루쓰(Tarabulus)라 불립니다. 고대 희랍어(세 도시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강리도의 '타라쓰푸루'와 많이 흡사합니다.
그런데 '思'를 맨 마지막에 읽어 보면 '타라푸루쓰'가 되어 더욱 일치합니다. 어쩜 지도 제작자가 '思'의 위치를 오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원본을 베끼면서 오기하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건 어떻든 他剌思布魯가 트리폴리를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해안의 윤곽이나 위치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트리폴리 위쪽의 지중해에 시칠리아 섬이 있고 그 바로 위에 이태리 반도가 이어집니다. 강리도에서도 트리폴리의 위쪽(약간 왼쪽으로 치우며 있음)에서 시칠리아 섬(녹색 섬)과 이태리 반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아래 지도). 놀랍지 않나요?
다음은 우리의 강리도로부터 100여년 후인 16세기 초반에 터키에서 그려진 지도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이 지도는 터키의 해적 출신으로 나중에 해군 제독이 되었으며 지도 제작의 달인이기도 했던 피리 레이스(Piri Reis, 1467~1554)의 작품입니다(현재 미국 메릴란드주 월터스 미술관 소장). 위쪽에서 지중해를 향해 돌출된 지역이 트리폴리입니다(북쪽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음).
피리 레이스의 지도가 다 그렇듯이 이 지도 또한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 지도와 강리도는 100여년의 시간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피리 레이스 지도의 트리폴리가 접하고 있는 지중해 해안선의 윤곽을 강리도의 그것과 대조해 보면 기묘한 호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강리도를 통해 아득히 먼 북아프리카의 시공간을 답사했습니다. 강리도의 지명을 탐험하노라면 동서양 및 아프리카 지역에 새겨진 문명의 문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로 강리도는 인류 기록 유산의 보고(寶庫)임을 부인할 길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