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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형무소 사형장 자리에 건립되어 있는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대구형무소 사형장 자리에 건립되어 있는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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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하루 앞둔 2018년 6월 5일 오후 4시, 9명의 대구 시민들이 중구 삼덕동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에서 만났다. 이들 9명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상임대표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가 현충일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역사기행에 참가했다.

남자 6명, 여자 3명으로 구성된 답사단이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에서 만난 것은 이곳이 대구형무소의 사형장이 위치했던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답사 참가자들은 강창덕 선생의 회고담을 듣고 있다. 19세부터 시작하여 대구형무소를 네 번이나 드나든(?) 전력을 가진 강 선생은 현재 국내 최고의 '대구형무소 해설사'라 하겠다.

19세 때부터 대구형무소에 4번이나 투옥되었던 강창덕 선생이 형무소의 건물 배치, 수형 생활 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변함없이 노란 리본을 달고 계시는 모습이 당신의 삶을 상징해주는 듯 보인다.
 19세 때부터 대구형무소에 4번이나 투옥되었던 강창덕 선생이 형무소의 건물 배치, 수형 생활 등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변함없이 노란 리본을 달고 계시는 모습이 당신의 삶을 상징해주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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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장은 형무소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

"사형장은 대구형무소의 북서쪽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 하루는 절도 전과가 10범을 넘는 강오원이라는 잡범이 미결수들이 갇혀 있는 미결사 북쪽에 있던 사형장의 지붕을 밟고 탈옥을 했어. 그래서 난리가 났지. 그 잡범은 사형수였기 때문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에서 탈옥을 감행했던 게야."

대구지방교정청의 누리집도 강 선생의 회고가 사실에 일치한다는 증언을 해준다. 누리집에 따르면 '대구 감옥'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대구 감옥서'를 인수하여 1908년 7월에 개청했다. 1910년 4월 삼덕동 3800평 땅에 건물을 지어 이전했고, 1924년에는 크게 확대되어 부지가 7800평에 이르렀다. 7800평이면 현재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이 들어서 있는 삼덕동2가 149-22(공평로 22)에서 삼덕동2가 210-1(동덕로 115 진석타워)까지 동서로 200m가량, 삼덕동2가 166 일신학원 터까지 남북으로 100m 이상 되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대구형무소 배치도('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 게시물)
 대구형무소 배치도('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 게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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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형무소의 담장은 처음에는 목조였는데 1921년 들면서 일부가 벽돌조로 개축되었다. 이에 대해 강창덕 선생이 해설한다.

"붉은 벽돌 담장이었어. 사방으로 담장이 쳐져 있었는데, 그 중 한쪽엔 30m 정도 간격을 띄워 울타리가 재차 설치되어 있었지(위 '대구형무소 배치도'의 30번 '경계 담장'). 그 사이 공간에는 형무소에 필요한 물건들을 받는 용도계 사무실이 있었어. 동쪽 담장 너머에는 채소밭이 있었고, 죄수들이 거기서 농사를 지었지."

대구 감옥은 1923년부터 '대구 형무소'라는 새 이름으로 불렸고, 1916년에 다시 '대구 교도소'가 되었다. 대구 교도소는 1971년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472(비슬로 2624)로 옮겨갔다.

대구교도소는 달성군 하빈면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2010년 12월 5일 사육신 유적인 하빈의 육신사 일원에는 대구교도소가 이곳으로 옮겨오는 데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경내 곳곳에 게시되어 있었다. 외삼문에도 ‘사당 앞에 교도소가 웬말… 독재 행정 두시오’ 등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진은 ‘박근혜 전 대표(당시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었음)는 큰 정치를 하세요! 면민들에게 한을 심어주면 안 됩니다.’와 ‘김범일 대구시장은 육신사를 모욕하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붙어 있는 육신사 부속건물의 모습.
 대구교도소는 달성군 하빈면으로 이전될 예정이다. 2010년 12월 5일 사육신 유적인 하빈의 육신사 일원에는 대구교도소가 이곳으로 옮겨오는 데 반대하는 현수막들이 경내 곳곳에 게시되어 있었다. 외삼문에도 ‘사당 앞에 교도소가 웬말… 독재 행정 두시오’ 등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진은 ‘박근혜 전 대표(당시 이 지역의 국회의원이었음)는 큰 정치를 하세요! 면민들에게 한을 심어주면 안 됩니다.’와 ‘김범일 대구시장은 육신사를 모욕하지 마시오.’라는 내용의 현수막이 붙어 있는 육신사 부속건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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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은 정문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 옆의 협문으로 했어. 협문 안에 면회실이 있었지. 더 들어가면 기결수 방이 있었는데 꼭 부채살처럼 생겼어(위 배치도의 5번 건물). 간수부장이 그 가운데 앉아서 죄수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도록 지어졌던 게야. 종종 간수부장이 있는 방(위 배치도의 20번 공간)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지. 그 자가 금속은 아닌 걸로 만든 와이어줄 같은 걸로 사람을 때렸어."

형무소 안에는 목공장, 철공장, 양재장, 구두공장 등 작업실도 여럿 있었다. 강 선생은 '죄수들은 이곳에서 노동을 했는데 더러는 여기서 배운 기술을 사회에 나와서 유용하게 활용한 이도 있었다'고 했다.

"1975년에 박정희 정권이 유신 체제를 유지하려고 인혁당이라는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8명을 사형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무기징역 등에 처하잖아.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하재완, 도예종,  이렇게 여덟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지. 이태환, 유진곤, 전창일, 이성재, 김한덕, 나경일 동지, 그리고 나 강창덕 이렇게 7명은 무기징역을 받았고, 네 명이 징역 20년, 다른 네 명이 징역 15년을 받았지.

징역 15년을 받아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동지 중에 전재권 동지가 양재실에서 일했어. 그 동지가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뛰어나서 기술을 아주 잘 익혔지. 나중에 출소한 뒤 서문시장에서 옷 만드는 가게를 했는데 상당히 성공했어. 전 동지가 번 돈을 사회 개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기부를 해서 그 덕에 후배들이 활동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지."

이육사 시인의 부조가 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를 적당히 배치해서 선 대구형무소 터 답사여행 참가자들의 일부.
 이육사 시인의 부조가 잘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를 적당히 배치해서 선 대구형무소 터 답사여행 참가자들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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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9일자 일요신문 기사의 일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지난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 유지를 위해 간첩을 조작, 8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고 17명을 무기징역 등 장기 투옥시킨 사건이다. (중략) 2008년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무죄가 선고되면서 피해자와 가족들(16가족 77명)은 (중략)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중략)

박근혜 정권이었던 2013년 7월 인혁당 사건 피해자와 가족 77명에게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이 제기됐다. 소송 원고는 인혁당 사건을 조작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가정보원'이었고, 소송은 법무부가 맡았다. 한순간에 피고로 전락한 피해자와 가족들은 탄원서도 내고 법정투쟁도 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중략)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은 배상금을 돌려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상금을 받아 그동안의 빚을 갚고, 집을 구매하고, 고령에 노후대비로 적금을 들었다. 또한 서로 돈을 출연해 재단을 만들고, 그 동안 신세를 입은 수십 개 시민단체 등에 기부도 했다. 수억 원에 이르는 배상액을 그대로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중략)지난해부터는 배상금을 변제하지 못한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부동산 등 재산에 대한 '강제경매 명령'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인혁당 사건 당시 15년형을 선고받은 고 전재권 씨의 장녀 전영순 씨 역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가 채권자 국정원에 의해 경매에 부쳐졌다. 전 씨는 "지난해 7월 1차 경매는 다행히 유찰됐지만, 아직 2차가 진행 중"이라며 "언제 집이 팔려 길거리에 나 앉을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전 씨는 "그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통장 모두와 연금까지 압류됐다. 변제해야 풀리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전혀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시간은 흐르고 이자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이제는 처음 받았던 배상금보다 변제해야 할 액수가 더 많다. 갚을 수도 없는 액수"라며 "40년 전에는 '간첩 가족'이라는 꼬리표로 가정을 박살내더니, 이제는 '빚쟁이'로 만들어 괴롭히고 있다"고 토로했다.

전 씨의 첫째 남동생은 폐암 말기 판정 후 빚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3억 8000만 원을 토해내고 세상을 떴다. 둘째·셋째 여동생의 경우 개인회생 신청 후 중년의 나이에 투잡을 뛰며 반환금을 갚아나가고 있다. (후략)

'4.19는 너희들 것, 5.16은 우리 것"

강 선생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에 서늘하게 떠오르는 말이 있다고 했다. 5․16이 일어나 다시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형사가 정치범들을 비웃으면서 '4.19는 너희들 거지만 5.16은 우리 거야!' 하고 일갈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대구형무소와 담장 밖 남대구경찰서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달성군 가창면 가창골과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무자비하게 학살된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부친께서 가창골로 끌려가 유명을 달리하기 직전 천재일우의 도움으로 풀려난 일, 시집 <대가리>를 통해 '그해 10월'의 참혹한 비극을 증언했던 고희림 시인의 여러 일화 소개 등을 들으며 답사여행 참가자들은 모두 숙연해 했다.

삼덕교회 부속 건물 안의 형무소 기념 흔적

강 선생은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안 1층 벽에 이육사 시인의 시와 상반신 부조가 전시되어 있고, 대구형무소 배치도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며 '교회가 이런 일에 소홀해서 그 동안 내심 서운하게 여겨 왔는데 이곳에 와보니 그런 마음이 없어진다'면서 크게 감동해 했다. 대구형무소 답사여행 참가자 일행은 건물 1층 내부 벽에 동판으로 새겨져 걸려 있는 이육사 시인과 대구형무소 건물 일부의 모습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이때 일행을 흐뭇하게 더욱 만드는 일이 일어났다. 장로님 한 분이 다가와 '삼덕교회에서는 이곳이 대구형무소 자리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좀 더 잘 기리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자료들도 여러 통로를 통해 수집하고 있고요. 여러분들께서도 도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앞다투어 장로님과 인사를 나누고는, 수많은 선열들이 순국하고 수형 생활을 했던 처참한 역사유적 대구형무소를 찾은 사람들답지 않게 밝은 얼굴로 기념관을 나왔다.     

기념관 앞 장독대 모양의 화분에 가득 핀 패랭이꽃이 유난히 예뻤다. 대구형무소 사형장 터에 들어선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이 1층 내부에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부조를 새겨두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피어나 있는 패랭이꽃이 이처럼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으리.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 내부 벽에 부조되어 있는 이육사 시인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단 모습과 형무소 건물 일부의 부조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1층 내부 벽에 부조되어 있는 이육사 시인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단 모습과 형무소 건물 일부의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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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대구형무소,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강창덕, #이정우, #고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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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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