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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고서였다. 새로 이사 온 옆집에 놀러갔을 때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을 봤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하드커버에 알록달록한 색깔이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는 전래동화 전집이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웃음과 눈물이 신호등처럼 깜빡거렸다.

우리 집과는 공용 마루 하나를 두고 떨어져 있는 그 집을 나는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밥상이 차려져 있으면 같이 밥을 먹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동화책을 읽었다. 아주머니가 이불을 펴주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읽었다.

나보다 동생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여자 아이가 재미있냐고 물었다. 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어느새 그 아이도 내 옆에 바싹 붙어 같이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그 집에서 잠이 든 적도 있었다. 마루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 집의 분위기는 우리 집과 달랐다. 단칸방이었지만 잘 정리된 분위기와 나무 무늬의 책장이 전해주는 이상야릇한 끌림에 동요됐다. 호시탐탐 책을 읽겠다고 찾아오는 손님을 구박하는 어른은 없었다. 밥도 챙겨주고 이불도 내어주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어렸을 적 마루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지붕 아래에서 복닥거렸던 옛집의 풍경은 내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책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호감을 불러 일으켰다. 읽는 사람에게도, 읽지 않는 사람에게도.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누군가의 얘기만으로도 선뜻 책장을 펼쳤다. 조용한 눈길을 던져주며 차분한 응시의 세계로 곧장 빠져버렸다. 책의 전염성은 바이러스만큼 강력했다.

그런 책을 볼 수 없었던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의 사람들은 얼마나 암울하고 불행했을까. 다이 시지에의 장편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읽기 시작했을 때, 이 책의 시대적 배경만을 떠올리며 섣부른 짐작을 내려버렸다. 그러나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 불리는 이 소설은 내 추측과는 달리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 같았다.

다이 시지에/ 이원희 옮김
▲ 장편소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다이 시지에/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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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주인공과 그의 친구 뤄가 재교육을 받으러 '하늘긴꼬리닭'의 산골 마을로 추방되면서 겪게 되는 사건들을 그려나간다. 재교육이란 1968년 마오쩌둥이 벌인 일대 변혁으로, 중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다시 교육을 받게 했던 사회운동이었다. 그 당시엔 마오쩌둥과 당원들의 저서, 순수한 학술서 외의 모든 책은 금서로 지정됐다.

같은 마을로 재교육을 받으러온 친구 안경잡이의 비밀 가방에서 외국 작가의 소설책을 발견하고부터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점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책은 침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80-81쪽)


마을 탄광에서 일을 하다 죽을 것만 같았던 고립감이나 똥지게를 지고 나르면서 부대꼈던 육체적인 고단함에서 벗어나 비로소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이었다. 돼지 헛간 위에 세운 마을 창고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밤마다 들려왔던 돼지 울음소리에서도 정겨움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뤄는 마을에서 가장 예쁜 바느질하는 소녀와의 사랑을 꿈꾸며 발자크의 소설을 읽어주기로 결심했다. 

"이 책들로 나는 바느질 처녀를 딴 사람으로 만들어 놓겠다. 그 애는 더 이상 단순한 산골처녀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140쪽)


뤄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으면서 바느질 하는 소녀는 점차 바뀌어갔다. 어떤 날은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뤄와 함께 즉흥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보봐리 부인>에 나오는 디자인을 상상해서 브래지어도 만들었다. 남자 재킷의 디자인을 리폼해서 입고 다녔다. 하늘긴꼬리닭에서 최초로 여성 속옷을 만든 디자이너였으며, 재킷 정장을 입은 신여성이었다.

"뤄가 읽어주는 소설을 들으면서 급류의 찬물로 잠수하고 싶은 욕망이 일었어." (197쪽)


발자크의 이야기가 뤄와 바느질 하는 소녀와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했던 주인공은 삶과 인간의 욕구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발자크의 작품을 통해서 여자에 대한 예의와 존경을 배웠다. 소설책을 읽어나가면서 밀도 높은 문장과 소설의 복선과 주제까지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익혀나갔다.

"도둑질을 해서 <장크르스토프>와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재교육까지 받은 나의 빈약한 머리로는 한 개인이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중략) 그 책을 읽고 나니 침범할 수 없는 개인적인 삶도, 세상도 더 이상 이전의 것과 같지 않았다." (153쪽)


이 소설은 금기시된 것들이 자아내는 매력에 빠져든 사람들과 가혹한 체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낭만을 그려냈다. 책이 담아내는 이야기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낭만적인 취향에 대해 이보다 더 강렬하게 묘사해낸 작품은 없을 것이다.

이 소설 속에는 "전대미문의 구전영화"라는 독특한 장르가 등장한다. 큰 마을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고 뤄가 이야기꾼이 되어 저녁마다 중학교 운동장에서 산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책에 소개된 영화는 1930년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창작했다고 전해지는 <꽃 파는 처녀>다. 북한의 영화가 상영되는 중국의 1960년대를 상상해보니 묘한 기분이 솟구쳤다.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도 책이 환기시켜주는 이야기의 낭만성에 대해 모른척하지는 않았다. 공감과 동일시를 불러일으키는 책을 통해 내일의 긍정을 발견하려던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세상은 잘못을 거듭하면서도 변환의 시점을 맞이했다.

공격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사실주의에만 몰입해 있던 그 시절의 엄혹한 핍박 속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았던 책의 낭만성은, 한 개인의 은밀한 내면으로 파고들어와, 세계와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지금 그런 낭만은 내 호주머니 속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사이 나는 어떤 침입자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전히 고지식한 벙어리에 불과했다. 급류의 찬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 따위는 일지 않았다. 내가 쌓아올린 성 안에서 하루하루 잔잔한 물결만이 일렁이기를 바라왔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의지는 좀처럼 발동되지 않았다. 책이 전해주는 감동은 잠시 일상의 팍팍함을 잊게 해주는 알약 정도로만 여겨졌다. 발자크의 소설을 통해 꿈을 키워나가는 소설 속 세 젊은이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동화 같았던 느낌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인간의 능력 중에서 꿈을 꾸는 능력이야말로 가장 높은 단계의 능력일 것이다. 꿈을 꾸는 것도 배워야할 만큼 현실은 사람들을 한가하게 내버려두질 않는다. 죽어서도 화장할 돈이 필요한 인간의 삶은 당장 해치워야할 노동과 감당해야할 자본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꿈을 꾼다는 것이 무한 도전이 아니라 무모한 도전으로 전락돼버린 느낌이었다. 빈약한 통장의 잔고가 내 발목을 잡고 있다고만 생각됐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검열과 통제의 압박 속에서도 제 삶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젊은이들의 행보가 내 가슴 속에 깊은 발자국을 남겨놓았던 것이다.

나를 구속하는 건 먹고사니즘의 굴레가 아니었다. 책을 읽어도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는 나의 가슴이었다. 먹통이 되어버린 나의 가슴은 책이 전해주는 감동과 제대로 교감하지 못했다. 단순히 기계적으로 읽어나갈 뿐이었다. 이 소설 속 젊은이들이 보여준 책에 대한 의미가 이렇게나 충격적으로 다가서는 게 실로 부끄러웠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단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바느질하는 소녀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그 소녀에게 어울릴만한 이름을 상상하게도 된다. 그 소녀가 남긴 말을 뤄가 이렇게 전한다.

"발자크 때문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야.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252쪽)


문득 발자크의 소설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기필코 바느질 하는 소녀가 발견한 아름다움을 내 삶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되새기면서.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현대문학(2005)


태그:#다이 시지에,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 #이원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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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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