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응급실 간호사로 일했다. 응급실은 전쟁터와 비슷하다. 긴박하고 고성이 오가고 피가 난무하고 생사가 나뉘는 곳. 심폐 소생술을 할 때는 긴장감속에 엄숙함과 신성함마저 감도는데 나는 그 시간, 그 환경 속에 내가 들어있는 게 좋았다.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특권. 그 어마어마한 특권을 가진 그룹에 속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첫 직장인 그 곳에서 선배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남들보다 1.5배속으로 움직였다. 실재로 밤새 일해도 긴장한 탓인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들이 탈의실에서 야식을 먹을 때도 나는 응급실을 지켰다.

사실 야식시간이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잠깐 한가한 틈에 컵라면이나 도시락을 그야말로 흡입하는 것이니 억울하거나 부당하진 않았다. 3교대근무라 식사시간이 불규칙할 수밖에 없는 데다가 근무 중에도 밥을 굶는 건 부지기수다. 응급환자를 두고 밥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교대로 먹으면 되지'는 뭘 모르는 소리다. 응급상황 때는 동시에 많이 손이 필요하다.

"...결국 나는 계란을 한 손에 꼭 쥐었다. 급히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중환자실 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피 묻은 폐기물 박스 앞에서 마음을 졸이며 껍질을 벗겨 누가 볼 새라 황급히 계란 한 알을 통째로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마스크 안으로 다급하게 입을 오물거리고 있던 내 눈에 창가의 따스한 봄볕이 들어왔다. 제대로 씹지도 못한 계란을 급히 삼키며 잠시 내려다본 바깥엔 내가 있는 곳과 전혀 다른 세상이... (중략) 이유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p31)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책표지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책표지
ⓒ 쌤앤파커스

관련사진보기


<나는 간호사, 사람 입니다>(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저자 김현아씨는 오전 근무하는 날, 하루 종일 응급상황이 발생, 아침도 거르고, 점심 먹을 십 분이 없었던 그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눈에 보이는 듯 내게도 선명하다. 몸은 고되고 속은 허기지고 밥은커녕 물 한 잔 마시기도 허락되지 않던 날들. 그래서 경력이 쌓여 갈수록 나는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락해져 갔다.

아침근무를 하는 날엔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한다. 행여 늦잠이라도 자서 늦을까 봐 15분마다 깨는 바람에 잔 것 같지도 않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인수인계시간은 7시. 미리 비품도 챙겨야 하고 기계들의 작동도 확인해야 한다.

근무가 시작되고 점심 무렵 교통사고 환자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이 중 한 명은 호흡이 없다. 인턴이 환자 위로 올라가 심장마사지를 하고 레지던트가 기도 확보를 위해 관을 삽입한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선배는 이를 어시스트를 하고 나는 가위를 들고 재빨리 옷을 자르고 외상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심장이 뛰는지를 볼 수 있는 기계와 다른 필요한 기계들을 몸에 붙이고 혈관을 찾아 바늘을 넣고 피검사 샘플을 뽑고 수액을 연결한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심장 전기충격을 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약물이 주입됐지만 잠깐 돌아온 맥박은 힘없이 꺼져버렸다. 삶과 죽음의 고비에서 그를 삶의 장으로 끌어오지 못했다. 환자에게 부착된 모든 것들을 제거하고 오물과 피가 범벅이 된 환자를 깨끗이 닦아준다.

마지막 길을 떠나는 그에게 살리지 못한 죄스러운 마음을 담아 내가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예우'를 다한다. 이런 날에는 아침, 점심은커녕 자취방에 돌아와서도 밥이 안 넘어갔다.

"간호사가 가족조차 꺼리는 사망한 환자를 양치시키고 열린 항문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대변을 씻겨주며 소독약으로 얼룩진 몸을 구석구석 닦이고 면도하는 것은 돈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래왔고 내 후배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왔다. 그건 '인간에 대한 예우'였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런 후배 간호사들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항상 "복 받을 거야"라는 말로 격려할 뿐...(중략) 수많은 간호사들이 돈이 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예우를 하느라 병원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모른다."(p281)

응급실 일이 힘에 부치던 나는 병동근무가 가능한 병원으로 이직했다. 일의 강도는 덜했지만 낯선 일에 적응하느라 쉽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격리 병동 1인실에 결핵환자가 입원했다. 결핵균은 공기 중을 떠다니다 면역이 떨어진 사람에게 감염된다. 건강한 사람은 설사 같이 있다 해도 걸리지 않는다.

활동성 결핵 환자였던 그로부터 나는 결핵에 감염되었다. 마른기침은 내장이 딸려 나올 지경까지 터져 나왔고 진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감기가 아님을 직감한 나는 검사를 받았고 결핵 판정을 받았다. 그날로 나는 병원을 나왔다. 병원생활 5년만이다.

대충 짐을 꾸려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나를 보자 엄마는 "그거 밥 잘 먹으면 낫는 병이라 그러더라. 암것도 아니라더라"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하며 내 손을 잡고 주방으로 앞장섰다. 엄마는 진짜 밥이 약이라고 생각한 거 같다. 식후에 또 밥을 내밀었다.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처럼 기세등등하던 엄마도 병든 딸 앞에 눈물을 흘렸다. 밤이면 내 방으로 조용히 들어와 웅크리고 자고 있는 내 등을 한없이 문질렀다. 비몽사몽 나는 엄마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다.

행여 부모님께 전염될까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자발적인 격리 상태. 하루 20시간 신생아처럼 잠을 잤다. 책도 TV도 볼 기력이 없었다. 외롭지도 않았다. 밀려오는 잠과 방바닥에 달라붙는 몸만 있었다.

결핵은 새벽 공복에 약을 한 주먹 먹어야 했다. 조금 지나면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에 화장실 가기도 힘이 들었다. 소변에서는 독한 항생제 냄새가 났고 이게 싫어서 나는 물을 두 번 내렸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와 약물과 사투를 벌이고 1차 방어에 성공할 무렵 엄마가 밥상을 들고 온다.

송아지 같은 눈을 꿈뻑이며 내가 한 숟가락이라도 더 뜨길 원했지만 나는 숟가락이 무거워서 국도 포기했다. 나를 덮친 결핵균은 힘이 세서 몸무게가 40킬로그램 안팎까지 여위었고 이러다 죽을까 봐 겁도 났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내 상태도 호전 되고 있었다. 그제야 엄청난 소외감이 밀려왔다. 때때로 억울했다. 미련하게 왜 그렇게 몸 바쳐서 일했을까. 적당히 할 걸. 누구보다도 일찍 출근했고 마지막에 퇴근했다. 누군가 아프거나 일이 생기면 대타를 자청했다.

밀려드는 환자와 선후배 간호사들을 배려하고 챙기느라 정작 나는 병들어갔다. 자기 몸도 못 챙기는 사람이 감히 누굴 챙긴다고. 그들의 안부전화는 나를 더 무력감에 빠뜨렸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데 나만 한없이 뒤처지고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기분.

"간호사의 편지...(중략) 그 환자의 메르스 판정과 동시에 전 메르스 격리 대상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숨어서 출근하고 숨어서 퇴근합니다. 퇴근 후에는 바로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를 격리합니다.(155) (중략) 저희들도 사람입니다... 병이 무섭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기에 병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생을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차가운 시선과 꺼리는 몸짓 대신 힘주고 서 있는 두 발이 두려움에 뒷걸음치는 일이 없도록 용기를 불어 넣어 주세요."(157)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읽었는지 모른다. 너무 아파서, 공감 돼서, 지금도 여전해서. 열악한 의료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간호사들에게 응원과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힘들고 아팠던 내 청춘에게도. 

이후 나는 경력인정이 안되고 월급은 적지만 교대가 필요 없고 점심시간이 있는 개인병원에서 일했다. 일을 할수록 간호사가 천직이라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살을 부딪치며 깨닫게 되는 것들은 살아있는 것들이어서 감히 돈으로도 교환할 수 없는 값진 뭔가를 남긴다.

삶의 스펙트럼이 넓고 깊어져 지켜야할 중요한 것과 흘려보내도 되는 사소한 것을 구별하는 힘이 생긴다. 그리고 누군가의 상처를 돌보는 일은 선한 일이니까. 간호사는 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처우가 제발 개선이 되었으면.

간호사도 사람임을 가끔 잊는 사람들, 간호사가 되고 싶은 사람들, 현재 간호사인 분들께 이 책을 권한다. 다만 간호사 가족을 두고 있는 분들은 절대 읽지 마시길. 너무나 가슴이 아플 테니까.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김현아 지음, 쌤앤파커스(2018)


태그:#간호사, #중환자실, #응급실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