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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부음(訃音), 친구의 죽음은 다른 사람의 부음을 듣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 친구가 죽기 보름 전쯤 전화를 걸어와 술 한잔하자고 했었다. 술이 목적이 아니라 얼굴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이건만, 그러자 하고서 그냥 흘려 버렸다.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볼 수 있으리라고 추호도 의심치 않고 다음으로 미룬 것이다.

막상 국화 한 송이를 올려놓고 명복을 빈 후 영정 액자에 담긴 친구의 얼굴을 보니 기가 막혔다. 남편을 먼저 보낸 아내의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고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의 모습은 그렇게 짠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도 더한 것은 졸지에 아들을 잃은 친구 어머니의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슬픔이었다. '아무개야!'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다 혼절했다가 가까스로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친구 어머니의 눈과 마주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창자를 끊는 듯 참담한 아픔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참척지변(慘慽之變)'이라고 한다.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인데, 그 비통함이 너무 처절하고 참담해서 가늠조차 안 되는 슬픔을 의미한다. 부모는 땅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남편을 잃은 지 석 달 만에 사랑하던 외아들을 떠나보냈다. 명문대 졸업반으로 남들이 많이 부러워하던 아들이었다. 그녀는 산문집에서 자식을 잃은 비통함을 이렇게 썼다.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중략) 하느님, 사랑 깊은 아이로 점지한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말씀만 하소서!"

아들을 따라 죽지 못한 자신을 저주하며 하느님께 물어뜯듯이 따졌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부모상을 당하면 세월을 한탄하지만, 자식을 떠나보내면 하늘을 원망하게 된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호곡성은 창자를 끊는 듯 참담하다.

중국 진(晋)나라 제후인 환공이 삼협(三峽)의 강가 길을 따라 유람에 나섰는데 하인이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왔다. 그러자 어미가 구슬피 울어대며 무려 100여 리를 함께 따라오다 자식을 구할 길이 없자 뱃전에 머리를 들이받아 죽고 말았다. 어미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비통의 극치를 단장지애(斷腸之哀)라고 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즉 단장지애는 이처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참담한 심정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다. 또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고도 하는데, 자식을 보낸 슬픔이 너무 커서 밝음(明)을 잃었다(喪)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는 아들이 죽자 밤낮을 울다 상심해 눈이 멀었다고 전한다.

죽음!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단어만 들어도 괜히 마음이 슬퍼진다. 하물며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어버리는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세상에는 직접 겪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이 있다. 나는 아직 미혼일 때 부모님과 이별을 했다. 가정을 등한시하고 객지로만 떠돌았던 아버지하고는 정이 깊지 않아 장례를 치르면서도 무덤덤했다.

그런데 살아생전 고생만 하시다가 눈을 감으신 어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리자 순식간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가슴 한복판이 뻥 뚫린 것처럼 시린 바람이 넘나들며 슬픔이 파도처럼 물결쳤다. 어머니와 이별 후 다른 사람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성이 생겼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슬픔과 숙연해지는 마음은 여전하다.

'당신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라'

인간은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고, 살아 있기에 죽음으로 치달을 뿐이다.
 인간은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고, 살아 있기에 죽음으로 치달을 뿐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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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연속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세상에 가장 확실한 사실 하나는 죽음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가 사람의 일생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산 자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고, 만나면 반드시 이별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우리 인간이다. 생명이 끝나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죽음을 이해하고 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죽음에 대하여 천착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게 닿는다. 그는 '히틀러의 슈퍼맨'이라는 별명이 붙은 나치 부역자였다. 화려한 명성의 이면을 보면 무척 이기적이고 치졸한 인간성을 지닌 존재였지만, 위대한 저서 <존재와 시간>을 남겼다. 그 책에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 삶의 의지를 참 멋들어지게 풀어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이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 즉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로 보았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말인데도 자꾸 곱씹어지는 철학적 명제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국적, 고향, 부모, 형제, 성별, 생년월일, 외모의 미추, 재능의 우열 등을 선택할 수 없다. 무법천지 원시시대에 던져진 인간도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통에 던져진 기구한 인간도 있었으며, 평화롭고 풍요로운 환경에 던져진 행운아도 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원하거나 선택하지도 않은 환경에 던져진 존재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인간은 그저 태어났기에 살아가고, 살아 있기에 죽음으로 치달을 뿐이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살아 있는 동안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수많은 문장을 나열한 책이 <존재와 시간>이다. 솔직히 말해서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읽고 나면 가슴에 큰 울림을 주는 명저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일상은 늘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연속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가 사람의 일생이다. 생명이 끝나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죽음을 이해하고 죽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큰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에게 무척이나 화려하고 웅장한 개선식을 열어주었다. 원로원 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선장군이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전쟁포로와 전리품 운반자들을 거느리고 행진을 하면, 늘어선 로마 시민들은 아낌없이 꽃과 환호를 보냈다. 개선식의 주인공은 로마인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예였다.

그런데 개선장군의 바로 뒤에 한 명의 목청 좋은 노예가 따랐다. 그 노예의 임무는 개선장군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 노예가 부르는 노래가 바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다.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마라, 인간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은 당신도 언젠가 죽을 운명이니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교만에 빠지지 마라, 겸손하라, 이런 의미를 함축한 경고를 뇌리에 박히도록 계속 들려주었다. 삶의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한 교훈으로 되새기면 딱 좋은 말이다.

즐겁게 살 걸, 베풀 걸, 참을 걸

붓글씨 사진을 쓰실 경우에는 위와 아래의 벽지가 보이지 않도록 트리밍해 주십시오.
▲ Memento Mori,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붓글씨 사진을 쓰실 경우에는 위와 아래의 벽지가 보이지 않도록 트리밍해 주십시오.
ⓒ 이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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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죽음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생의 어느 순간에 찾아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에게 죽음은 좀 일찍 만나느냐 좀 늦게 만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느 순간 촛불이 꺼지는 것처럼 숨이 멈추면 내 뜨겁던 심장도 차갑게 식을 것이다.

중세 이후 서양에서는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써 놓은 경우가 많았다. 살아 있는 동안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 후를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자기 죽음을 생각하고 직접 묘지명을 작성하거나 '자만시(自挽詩)'를 짓기도 했다. 자만시란 죽음을 가정하고 스스로 쓴 만시이다. 죽음이란 거대한 장벽 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인간적 속내가 울림을 준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 4년 후에 회갑을 맞았다. 회갑을 맞이하여 지난 삶을 반추하며 자찬묘지명을 썼다. 그 내용을 보면 잘못한 일이 너무 많다는 후회와 반성이 가득하고, 아침저녁으로 성찰하는 데 힘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담고 있다. 자기 자랑이나 변명은 어디에도 없는데,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객관화하여 기록한 것이 자찬묘지명의 최대 강점일 것이다.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따금 시한부 인생을 산다고 가정하고 내 삶을 깊이 사유해 보곤 한다.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고 남은 삶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나는 왜 이곳에 태어났고 왜 사는가? 또 어떻게 살다가 이곳을 떠나야 하는가? 죽음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더 주체적인 삶을 택하고, 주변 사람에게 관대하고, 가진 것을 베풀며, 무엇보다 시간을 소중하게 선용할 것이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재물의 축적은 무상하다. 남들과 다투면서 악착같이 모아 놓은 재물을 갈 때는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것을 죽기 직전에 깨닫는 것은 늦어도 너무 늦다. 새가 장차 죽을 때는 그 울음이 가장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가장 착하다는 말이 있다.

20여 년간 임종 간호를 해 온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임종을 맞은 수많은 사람의 공통적인 후회는 '즐겁게 살 걸, 베풀 걸, 참을 걸' 하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이런 때늦은 후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언젠가 나도 그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머잖아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내 빈소에 와서 처연한 눈으로 내 영정 사진을 바라볼 것이다. 문상객들은 과연 무슨 말들을 주고받을까? 만약 듣기 싫은 말들이 난무한다면 죽은 나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가족들의 마음이 더 슬플 것이다.

낙엽귀근(落葉歸根), 가을이 깊으면 나무들은 꽃보다 더 고운 단풍 옷으로 갈아입고 왔던 곳으로 간다. 떠날 때를 알고 은밀하게 가장 고운 빛깔로 단장하고 훌쩍 떠나는 그 모습은 아름답고 품위가 있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기 위해서는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블로그 '축성여석의 방'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메멘토 모리, #참척지변, #상명지통, #자만시, #공수래공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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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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