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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제자가 보내준 선물
 어느 제자가 보내준 선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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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영어를 처음 배웠다. 그때 영어교과서 Lesson 1 단원명은 'Spring is Come'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즈음 정녕 봄은 왔는지 오늘은 창을 통한 햇살이 그지없이 따사롭다. 모처럼 거실에서 창살을 통한 햇볕을 마냥 즐기면서 클래식을 듣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우체부가 택배상자를 전했다.

확인하자 한 졸업생이 보낸 선물상자였다. 예쁜 포장지를 벗기자 이런저런 과자와 차, 그리고 조청이 나왔다. 과자는 내가 28년 동안 근무했던 이대부고(현, 이대부중) 앞 이화당 제과점 제품이었다. 이화당은 나의 단골로 우리 가족들도 입에 익은 곳이다. 상자 속 예쁜 카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박도 선생님께
몸은 좀 어떠신지요? 3월이라고 봄옷을 꺼내 입다가는 감기 들기 딱 좋은 요즘입니다. 겨울이 '나 아직 안 갔다고'하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 같네요. 선생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에 저희들은 얼마나 설레고 행복했던지요. 모두 마흔을 넘어, 몇몇은 쉰 살을 넘은 제자도 있지만, 학창시절 선생님을 만나는 설렘으로 가득했답니다.

쾌차하시어 꼭 뵈면 좋겠습니다. 이대부고 근처에 간 김에 이화당 빵과 Tea, 그리고 가마솥에서 달인 조청을 넣어봤습니다. Tea는 37회 졸업생 정하봉 군(선생님을 1학년 담임으로 만난)의 호텔에서 받은 거구요. 조청은 제 친정어머니 친구가 몇 주 전에 고은 것입니다. 치통 나으시면 쫄깃한 떡을 찍어 드시면 아마도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조만간 또 좋은 소식 전하겠습니다. 2018. 3. 2. 33회 졸업생 김수진 드림

한올 정기공연 초대장과 편지
 한올 정기공연 초대장과 편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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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올' OB 정기공연 초대장을 받다

한 달 전 쯤 한 졸업생한테서 메일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이대부고 33회 졸업생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누구지?'하고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책만 보지 말고, 가끔은 아름다운 하늘도 보라"고 하셨던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시를 외우지 말고, 입 속에서 읽고 느껴 삼켜보라"고 하셨던 선생님도 기억납니다.

오늘, 선생님께 메일을 보낸 이유는 제가 현재 이대부고 중창단 OB 모임인 '한올OB밴드'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 밴드에는 이대부고 1985년 졸업생부터 2000년 졸업생이 모여 있습니다. 선생님도 기억하시겠지만, 이대부고에 선교단 합창부 외에 중창단 '한올'이 있습니다. 이 모임은 이대부고 내에서 유일하게 10기수 차이가 나는 선후배들이 모두 알고, 서로를 챙기며, 지내는 모임입니다.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제자인 96년 졸업생 '조홍제'군이 선생님 이야기를 종종 올려서 저희들 모두가 추억을 회상하고 있던 가운데, 엊그제 85년 졸업생인 '이자경' 선배가 선생님의 기사를 출장 중 우연히 읽고서 추억에 눈물이 났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 어제 오늘 저희 게시판엔 선생님의 추억담이 가득합니다. 기사로라도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자 김수진 드림-

이후 몇 차례 메일이 오고간 뒤 '한올' OB 중창단 정기공연이 3월 3일 서울 신촌 창천교회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리는데 초대를 받았다.

나는 2004년 퇴직 후 곧장 강원도 산골로 내려 온 뒤, 가능한 서울나들이를 자제해 왔다. 자칫하면 잦은 나들이로 귀촌한 의의가 무색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졸업생들의 초대는 가능한 참석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빚을 많이 졌기 때문이다.

1988년 나의 첫 작품집 <비어 있는 자리> 출판기념회 때 이대부고 한올 중창단의 축하노래
 1988년 나의 첫 작품집 <비어 있는 자리> 출판기념회 때 이대부고 한올 중창단의 축하노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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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올 중창단의 'Perhaps Love'

나는 미션학교인 이대부고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가장 감명 깊었던 시간은 남녀학생들의 혼성합창을 듣는 일이었다. 그들이 하느님에게 드리는 찬양은 더없이 맑고, 아름다우며, 성스러웠다. 1988년 이대교수식당에서 열린 나의 첫 작품 출판기념회 때 한올 중창단의 'Perhaps Love'의 그 아름다운 선율은 지금도 내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다.

이런저런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들의 초대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자 치통이 몹시 심하고, 눈에는 눈곱이 끼는 게 몹시 가려웠다. 혹이나 당뇨망막증과 같은 큰 병이 아닐까 하여 놀라 안과에 갔다. 안과의사는 각종 검사를 마친 뒤 결막염이라고 하면서 바깥출입을 자제하는 게 좋다는 말을 했다.  

거기서 멀지 않는 치과로 가자 의사는 어금니에 충치가 몹시 심하다고 30분 정도 치료를 해주면서 네댓 차례 통원 치료하라고 일렀다.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이즈음 내 신체의 각 기능은 경고등으로 노란 불빛들이다. 하기는 일흔이 넘도록 큰 병 한 번 치르지 않고, 여태껏  잘 지내온 것만으로 부모님과 하늘에 감사할 일이 아닌가?

그날 밤 깊은 고민 끝에 초대 제자에게 사실대로 말한 뒤 불참을 통보했다. 아무튼 나는 애초 약속을 지키지 못해 몹시 미안한 차에 공연일인 오늘 제자로부터 추억의 선물까지 받았다. 지난 추억을 되새기면서 선물로 보낸 과자를 막 입에 넣으려는데 그들은 스승보다 나은 '청출어람' (靑出於藍)의 제자들이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생각은 늙은 훈장의 눈물샘을 마구 자극했다.

봄볕이 한창 무르익으면 그들을 내가 사는 고장으로 초대하여 강원도 명품 막국수를 대접한 뒤, 산속의 미술관자작나무숲으로 안내하고 싶다. 거기 다실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면서 나의 '마지막수업'을 한 뒤, 그 답례로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가능하다면 'Perhaps Love'라는 곡을 들었으면 더욱 좋겠다.

오늘은 모처럼 볕도 좋은, 참으로 유쾌한 날이다.

Perhaps love is like the ocean
Full of conflict full of pain
Like a fire when it's cold outside

Or thunder when it rains
If I should live forever
And all my dreams come true
My memories of love will be of you.

(아마 사랑은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 찬 바다와도 같은 것
비 오고 천둥 칠 때 불과도 같은 것
만약 내가 영원히 살 수 있고
내 모든 꿈이 진실로 된다면 사랑에 대한 내 기억은 오직 당신 뿐.)


태그:#선물,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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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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