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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년 전 군 입대 당시, 우리 조상들이 현명해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해 이런 '철없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래 세대의 삶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음은, 자명하면서도 엄중한 상식일 것이다. 특히 한반도의 주민들로선, 이와 관련해 항상 마주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바로 남북관계다. 한반도의 분단구조는, '남북관계'와 '평화', '전쟁'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 선택을 항상 요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분단구조의 특징'이기도 하다.

최근 남북 단일팀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그 핵심은, 남북 단일팀 구성이 우리 선수들의 출전 기회를 축소해 '공정성'에 민감한 2030세대의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당 논란은 더 나아가 2030세대의 대북관과 통일관을 둘러싼 논란으로까지 확대됐다. 기성세대와 달리 2030세대는 남북통일을 바라지 않으며, 북에 대한 적대감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오히려 기성세대의 통일관이 기만적이라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통일을 당연시 여기는 기성세대의 인식은, 학교 교육과 사회적 담론의 영향을 받은 '조건반사적 반응'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선 주목해야 할 사실은, 해당 논란이 애당초 정치성을 갖고 시작된 점이다. 즉, 평창올림픽 개막식 이전, '평화올림픽으로서 평창올림픽의 흥행'을 막고 싶어 했던 보수언론의 집중적 여론몰이를 간과할 수 없다. 실제 올림픽 개막 이후 <경향신문>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해 20대는 53.8%, 30대는 55.4%가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2030세대가 남북 단일팀 구성에 극렬하게 반대한다는 프레임과, 이에 기초한 2030세대의 대북관·통일관 논란은, 정확한 실상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다.

현재의 지배구조를 기정사실화하는 '2030 통일인식론'

그럼에도 해당 논란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예컨대 장은주 영산대 교수는 지난 2월 14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특히 북한 선수들 때문에 … 출전 기회를 제약 당하게 된 일부 선수들은 단일팀 구성이 권력자가 무슨 '낙하산'을 팀에 내려 보내는 불공정한 일로 여기기까지 했고, 많은 청년들이 그에 공감했다고 한다. 통일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의 자기실현과 경쟁의 공정성이 중요하다고 보는 어떤 원초적 정의감의 표출이리라. … 나는 이번 소동을 기본적으로 특히 현 정권의 중심에 있는 '86세대'의 어떤 게으름과 오만에 대한 경고라고 이해하고 싶다. 단순히 소통 미흡에 대한 몇 마디 사과로 넘어 갈 일이 아니다. 나는 우리 핵심 정권 담당자들이 작금의 한반도 문제에 대해 너무 상투적으로 '민족 통일'에 초점을 둔 낡은 80년대식 패러다임을 갖고 접근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우리 한민족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체제 때문에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 온 바, 통일, 곧 단일 민족국가 건설만이 그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남과 북의 우리 민족 구성원들은 하루빨리 그 통일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 우리는 청년 세대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 많은 성원들이 통일 문제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데, 이제 그런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 분단체제의 극복은 무턱대고 통일을 외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 지금까지처럼 민족적 동질성 같은 것을 아무리 강조해 보아야 통일의 길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통일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건 비현실적인 통일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한반도에 서로 이질적인 두 국가의 지속적인 평화공존을 보장할 국제 질서와 그것을 뒷받침할 국내정치다.('86세대 오만을 향한 2030의 경고')
이 글에는 기본적으로 세대론이 깔려있다. 기성세대의 '상투적 통일관'과 2030세대의 통일관을 대비시킨 다음, 남북통일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단일 민족국가 건설로서의) 통일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을 버리자고 호소한다. 대신 남북 두 국가의 '평화공존'을 보장할 국제질서와 국내정치가 우선이라 주장한다.

그러면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대북관과 통일관을, 이와 같이 '세대 간 단절론'으로 파악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통일에 대한 기성세대의 감수성을, 현재의 2030세대는 공유할 수 없는 것일까? 현재 20대인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번 북한 예술단(삼지연 관현악단)의 공연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만납시다"를 부르며 눈물을 글썽이는 출연자들과 관중의 모습은, 글쓴이 같은 20대들에게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글쓴이 주변에서도 그런 반응이 많았다. '통일 감수성'을 둘러싼 세대별 단절성의 강조는, 실상 올림픽 개막 이전 보수언론이 유포한 프레임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최근 통일연구원의 여론조사 결과 20∼30대의 '민족동질성 인식'은 기성세대와 별 차이가 없었던 점 역시 이를 증명한다.

설령 기성세대와 달리 '민족'이라는 관념을 중시하지 않더라도, 남북의 주민들이 결국 '(같은) 인간'이라는 보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국적과 국경, 인종을 넘어 서로 감성을 공유할 수 있고, 이웃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남북의 주민들 역시 이 점에선 예외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남북의 주민들이 자주 만나(혹은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서로의 차이와 공통성을 공유하며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확인해나가는 과정일 것이다.

한편, 기성세대의 통일관을 '상투적'인 것으로 간단히 치부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물론 기성세대의 통일관에 상투적 측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만일 기성세대가 통일을 열렬히 희망했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과 대북지원 역시 전폭적으로 지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성세대의 통일관이 지닌 양면성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특히 기성세대가 통일을 당연시 여기며 통일을 외친, 그 자체는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라도 '말하는 것'과 '말조차 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을 뿐더러, 그러한 기성세대의 언술 속에는 분단을 '외세의 작품'으로 여겨 타파의 대상으로 보는 의식이 은연 중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남한의 학생운동권과 시민사회에서 '저항적 반미주의'와 '급진적 민족해방 담론'이 풍미할 수 있었던 토대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 한편, 역대 군사독재정권은 이러한 기성세대의 통일관·통일 담론을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쿠데타 직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남북대화와 통일을 유신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기성세대의 통일관이 지닌 변혁적 요소를, 정권 차원에서 흡수해 장기집권 수단으로 악용한 사례였다.

요컨대 기성세대의 통일관에는 '상투적 측면'과 '변혁적 요소'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와 같은 기성세대의 통일관을 '낡은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려면, 한반도 분단체제를 규정하는 조건이 그동안 변화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외세'라는 조건과, 미국/(주한)미군의 압도적 군사력이 분단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현실은, 현재까지 변함이 없다. 따라서 기성세대의 통일관이 '낡은 패러다임'이라는 주장은, 분단체제의 한 축인 '미국의 군사력이라는 폭력'을 외면한 결과로서, '분단체제의 내면화'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거시적 구조를 인지하고 알리는 것은, 이 땅의 주민들로선 매우 긴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성세대의 통일관을 상투적인 것으로 몰아붙이거나, 세대 간 통일관의 간극만을 부각시키는 것은 남북문제·분단체제 해소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법이라 볼 수 없다. 이와 함께 위 글에서 2030세대를 "통일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의 자기실현과 경쟁의 공정성이 중요하다고 보는" 세대로 대상화하고 있는 시각 역시 문제다. 왜냐면 지금의 청년세대가 처음부터 '사회적 대의'를 자발적으로 외면하려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의 이러한 가치관과 공정성 열망은 어디까지나 '우리시대의 산물'이다.

즉, '무한경쟁'이라는 한국사회의 지배원리가 지금의 청년세대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공정성에 대한 2030세대의 '민감한 감수성' 역시 이러한 현재의 체제를 내면화한 결과일 것이다. 결국 '공정성'이란, 각자도생의 경쟁체제와 능력주의,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한 위계질서를 수용하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성'이 아니라, 경쟁의 '낙오자'와 '패배자'들까지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공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2030세대를 공정성에 민감한 세대로 대상화할 것이 아니라, 청년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지배구조를 해체하고, 사회적 공공성 강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 2030세대를 경쟁의 공정성과 개인의 이익을 지향하는 세대로 대상화할 경우, 현재의 지배구조를 '변화의 대상'이 아닌, '기정사실화'하는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최소한 남북 간 군사연합이라도 실현해야

한반도 통일론의 본질은, 일차적으로는 분단체제의 타파에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한반도 주민들의 더 나은 삶을 향한 '변화'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 통일론의 일차적 본질이 한반도 분단체제의 타파라면, 그 방법 역시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북의 단일국가화만이 유일한 해법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단, 어떤 방식이 됐건 간에, 그러한 변화가 한반도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삶',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있어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선 두 가지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한반도 통일론이 지닌 변혁적 요소를 남북한사회 내부 개혁의 동력으로 살려나가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북의 국가체제·국가조직을 사유화하여 그것에 강고한 이해관계를 지닌 기득권 집단과 그 부역자들이 '현상타파'를 의미하는 '통일(또는 분단체제 해체)'을 희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한반도 통일론'이 지닌 변혁적·현상타파적 측면에 주목할 때, 그것은 한반도 '주민' 또는 '민중'이 주도할 수밖에 없으며, 민중의 이해관계로부터 실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 분단체제 타파의 전제는, 남북한사회가(또는 둘 중 어느 한 쪽에서건) '거짓 민주주의'가 아닌 '직접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해 '정치의 민중화'를 이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남북 사회 구성원 모두 자기 사회를 객관화·대상화하는 동시에, 자기 사회의 '공공성 강화'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몇몇 엘리트 집단에 의해 장악된 현재 남북한의 사회 상태로는, 통일에 성공하더라도 한반도 주민 모두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남한사회의 경우 최근 이재용 삼성 부회장 석방이 상징하듯 자본권력과 그 부역자들(사법부·언론·입법부 일부)이 기득권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국가조직을 사유화하고 있다. 반면, 북의 경우 다 알다시피 정치권력이 3대 세습을 하였다. 한마디로 남에선 자본권력이, 북에선 정치권력이 민중의 의사와 무관하게 3대 세습을 자행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체제의 현상 변화를 희망한다면, 남북 내부의 그러한 현실을 해소할 수 있는 '사회개혁'과 '정치의 민중화'(또는 직접민주주의)야말로 급선무인 것이다. 물론 이것의 실현에는, 북한사회보다 남한사회가 좀 더 유리할 것이다.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삶의 질 및 자기 사회에 대한 만족감·자부심이 고양될 때, '분단체제 해체'를 향한 여유 역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현재 남한사회가 북한사회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월의식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상징하듯 남한 주민들의 삶의 만족도와 자기 사회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편, 이러한 남북 사회 내부의 개혁 노력과 함께 '분단 비용'을 없애기 위한 남북의 공동 실천 역시 필요할 것이다. 특히 장래에 국가 간 통일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남북 간 '군사연합'이 실현되어 '남북연합사령부'가 설치될 수만 있다면, 남북의 주민들이 치르는 분단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현재 분단 비용은, 남북의 민중들이 부담하고 있고, 그것의 가장 큰 몫이 군사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점은 분단체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남북의 민중들은 분단 비용이라는 짐을 덜기 위해서라도 분단체제 타파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한반도 분단체제 타파를 위한 실천은 남북의 사회개혁과 분단 비용의 절감을 모색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달리 말해 그것은 한반도의 주민들이 자신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정치에 반영시키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향후 관련 논의가 사회적으로 활성화되어야 할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의 블로그 '다르게 생각하는 글방'(http://anarchism-historian.tistory.com/93)에도 게시한 글입니다.



태그:#2030세대, #통일관, #대북관, #분단체제 타파, #남북 군사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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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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