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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년 새해 들어 추위가 매섭다. 날선 칼바람이 모질고 거칠다. 정초(正初) 추위가 아무리 맵다 한들, 이만큼 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화폭 가득히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한기가 뼛속까지 사무친다.

무릇 예술가는 작품 속에 그들의 삶을 오롯이 투영(投影)해 놓곤 한다. 여기 일생이 고단하고, 춥고, 배고팠지만 예술가의 자존감을 지켜며 서럽디 서럽게 살다간 옛 화가가 있다.

<최북 초상>. 조선후기 화가 이한철(1808~?)작품 41.5* 65.5 cm .최북이 금강산 구룡연에 몸을 내던졌다가 살아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반 고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고흐보다 270 여 년 먼저 태어 났다
 <최북 초상>. 조선후기 화가 이한철(1808~?)작품 41.5* 65.5 cm .최북이 금강산 구룡연에 몸을 내던졌다가 살아난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반 고흐'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고흐보다 270 여 년 먼저 태어 났다
ⓒ 최북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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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시대인 1700년대 중반의 어느 날이다. 근엄하게 의관을 갖춰 입은 양반 사대부와 행색이 초라하디 초라한 환쟁이로 보이는 사내가 큰소리로 다투고 있다. "뭐야, 네 이놈이 정녕 내 그림을 못 그리겠다고? 감히 내 명령을 거절해?··· 고얀 놈 같으니라고··· 관가에 알려 곤장을 치게 할 테니 곤장을 맞기 싫으면 어서 그려라!" 양반은 욕설을 해대며 사내를 윽박지르고 있다.

그러자 사내가 발끈 화를 내면서 "세상이 나를 깔보고 함부로 대하는구나. 이렇게 무시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내 눈을 멀게 해버리겠다!"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는 붓대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야 만다. 눈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양반은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때부터 그는 화가에게 목숨과도 같은 한쪽 눈을 버리고 애꾸눈이 되어서 전국을 유랑하며, 그리고 싶을 때 그리고 그리고 싶지 않을 때는 죽어도 그리지 않는 자유로운 화가로 살아간다. '붓 한 자루에 의지해 먹고 산다'는 의미의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가진 '조선의 아웃사이더' 화가 최북이 애꾸눈이 된 사연이다.

'눈'을 찌르고 진정한 자유인이 된 화가 최북(崔北)

최북(崔北)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로 불리는 영조, 정조시대의 화가다. 어느 떠돌이 환쟁이와 그 그림에 미쳐 따라다니던 기생 사이에서 미천한 신분의 아이가 태어났다. 북극성을 보고 낳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최북이라고 지었다.

경주 최씨 후손으로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라북도 무주에 <최북 미술관>이 있는 이유다. 스스로 호를 '호생관(毫生館)',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 했고, 유별난 그의 기행(奇行) 때문에 '광생(狂生)'또는 '미치광이' 소리를 들었다. 그의 이름 북(北) 자를 둘로 쪼개어 '칠칠(七七)이'라고도 했다. '칠칠치 못한 놈'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자기비하를 한 셈이다.

최북은 단원 김홍도,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 등,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들과 교유했으며 시와 글씨에도 탁월하여 시· 서· 화의 삼절(三絶)로도 통했다. 그림 한 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다.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3대 기인(奇人)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

자유롭게 전국을 유랑하며 명승지에서 노닐면서 그 풍경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자기만의 예술에 도취되어 살았으며, 광기의 기질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어느 날,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이르렀을 때 "천하의 명인이 천하의 명산과 하나 되는 것은 마땅하다"며 못 속에 뛰어들기도 했다.

최북은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려서 최산수(崔山水)라고도 불렀다. 기행적인 성격과는 달리 그의 초기 작품은 당시 화단의 전통을 따르는 남종화풍의 경향에서 후기에는 조선 고유의 진경산수화풍으로 바뀐다.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당시의 화풍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단원 김홍도에게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의 풍속이 서로 다르다. 조선사람은 조선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림에는 힘이 있고, 울음이 있고, 아픔이 있어야지. 무엇보다 조선 정신이 있어야 해"하며 조선 미술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호생관'이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는 그림이 전부인 '전업화가'였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하루 종일 오두막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예술가의 혼을 팔지는 않았다. 그의 그림을 알아주는 이가 있으면 동전 몇 닢에도 선뜻 그림을 넘겨주었으나, 붓 솜씨를 트집 잡는 세도가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자신의 눈을 찌를망정 절대로 그림을 주지는 않았다.

최북의 그림에 '춘화도(春畵圖)'가 없는 이유 중의 하나다. 호생관 최북, 그는 예술가의 자존을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르고 진정한 자유를 찾은 참예술인이었다. 기성의 권위와 강요에 굴복하지 않은 저항의 표상이었다.

'결핍과 고독'을 예술로 승화시킨 '조선의 아웃사이더'

조선 후기 회화 역사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최북은 1712년 출생하여 49세인 1760년에 사망했다는 설과 75세인 1786년 사망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술에 취한 겨울 어느 날 성벽 아래에서 잠들었다가 폭설이 내려 얼어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북의 작품으로는 <풍설야귀인도 風雪夜歸人圖>. <표훈사도 表訓寺圖>. <공산무인도 公山無人圖>등이 있고 약 90여 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최북의 대표작 <풍설야귀인도 > 종이에 연한색 66.3*42.9 cm 화가 최북은 이그림 한 장에 자신의 일생을 투영해 놓았다. 제2의 자화상 이라 할 수 있다
 최북의 대표작 <풍설야귀인도 > 종이에 연한색 66.3*42.9 cm 화가 최북은 이그림 한 장에 자신의 일생을 투영해 놓았다. 제2의 자화상 이라 할 수 있다
ⓒ 최북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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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서 죽어갈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최북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풍설야귀인도 風雪夜歸人圖>는 그의 성격과 화풍이 잘 드러나 있다. 이 그림은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로 알려져 있다.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이란 제목과 함께 전체적인 분위기가 낭만적이면서도 황량하고, 쓸쓸하다. 최북이 보여준 기인의 면모는 이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눈보라 치는 겨울밤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귀가하는 나그네를 그렸다.

그림 속 나뭇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에서 최북의 거침없는 저항적 성격과, 고단하고 서러웠던 그의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의 화제(畵題)는 당나라 때 5언시에 뛰어나 '오언장성(五言長城)'이란 칭호를 가지고 있는 시인 유장경(劉長卿 725? ~ 791?)의 <눈을 만나 부용산에 머물며>라는 시에서 차용해 온 것이다.

"날이 저물어 푸르른 산은 먼데/ 차가운 하늘 밑 시골집이 쓸쓸하네/ 사립문에 개 짖는 소리 들리더니/ 눈보라 치는 밤에 돌아온 사람(風雪夜歸人)"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바로 그림의 제목인 '풍설야귀인'이다. 그림 아래쪽 보일 듯 말 듯 아이와 함께 허리가 꾸부정한 나그네가 지팡이를 들고 한 겨울밤에 삭풍을 맞으며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고독했던 삶의 뒷모습을 보는 듯하다. 다 쓰러져가는 산골집에서는 인기척에 놀라 뛰쳐나온 검둥개가 사납게 컹컹 거리고 있다.

<풍설야귀인도> 아랫부분 확대. 겨울 나그네는 무사히 집에 돌아 갈 수 있을까
 <풍설야귀인도> 아랫부분 확대. 겨울 나그네는 무사히 집에 돌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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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고독', '신분의 차별'을 예술로 승화시킨 조선의 이단아, 최북은 이 그림 한 장으로 자신의 일생을 대변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있다. 한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눈 덮인 산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을지라도, '변명하지 말고 거침없이 짊어지고 나가라'라고 옛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신분의 벽과도 다름없는, 높디높은 '계층의 벽'을 넘지 못해 좌절하고 있는 오늘의 '수많은 최북들'이 있다. 이들이 눈보라 치는 밤에 진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태그:#최북, #풍설야귀인, #겨울나그네, #호생관, #조선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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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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