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68)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을 통해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씨는 내 엄마다. - 기자 말

차가워진 날씨에 몸이 움츠러든다. 추위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는데 며칠 사이 눈이 두 차례나 내렸다. 겨울이 성큼 내 옆에 와 있다.

진즉 잠에서 깼지만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어 버티고 버티다 목이 말라 겨우 일어났다. 싱크대엔 어젯밤 라면을 끓여먹고 씻어 놓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 있다. 못 본 척 하려다가 '일어난 김에 닦자!'고 맘을 고쳐먹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데 검지 쪽이 점점 축축해진다. 구멍이 난 모양이다. 한참 맘먹고 일할 때 고무장갑이 새면 의욕에도 김이 샌다. 투덜거리며 새 장갑을 꺼내려니 어릴 때 했던 장난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잠을 자기 전에 언니, 동생과 함께 부엌에서 양치질을 했다. 어느 날, 양치질을 하다가 설거지통에 걸쳐져 있는 고무장갑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했다. 평소 같았으면 제일 먼저 입을 헹구고 방으로 들어갔겠지만 그날은 일부러 가장 늦게까지 칫솔을 붙잡고 있었다. 언니와 동생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설거지통의 고무장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다음 날 아침, 밥을 먹으며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누가 고무장갑에 물 넣었어!" 엄마가 호통을 치면 나는 당연히 모른 척 시치미를 뗄 작정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우리 학교 갈 채비를 돕느라 바쁘게 움직일 뿐, 더 기분이 나쁘다거나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번 해봤지만 똑같았다. 반응이 없으니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물을 부었다. 웬 몹쓸 짓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 새삼스레 엄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 바쁜 아침에 얼마나 귀찮고 짜증이 났을까. 물론 엄마는 기억조차 못 하고 있겠지만 지금이라도 자진 사과를 하고 싶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한 일을 소상하게 밝혔다. 엄마가 놀라워하며 큰 소리로 깔깔 웃었다.

"아, 생각나. 어쩐지... 내가 분명히 물 안 들어가게 잘 두었는데 자꾸 물이 들어가 있어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지. 그냥 설거지통 물이 들어간 줄 알았지 누가 일부러 그랬을 거라곤 상상을 못 했어. 하여간 너는 참 짓궂었어."

우와, 우리 엄마 기억력 끝내준다.

"그때만 해도 고무장갑이 소중했어. 구멍 안 나게 쓰려고 늘 조심했거든. 사려면 다 돈이잖아. 살림살이를 많이 아껴서 그런지 살림에 대한 건 잘 안 잊히더라고."

얘기가 나온 김에, 고무장갑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처음 고무장갑을 쓴 건 언제인지부터 물었다.

"글쎄... 고무장갑이 언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어. 동네 사람들이 쓸 때도 나는 안 썼으니까. 결혼한 후인 건 분명해."

엄마가 결혼한 건 1973년, 스물네 살 때다.

"결혼하고 곧바로는 아니야. 막내 태어나고 난 뒤부터 살림이 좀 펴서 한겨울에만 한 개씩 사다 쓴 것 같은데."

그러면 1980년?

"아마 그 무렵일 거야. 지금처럼 질기지 않아서 잘 찢어졌어. 뚫어져도 그냥 썼어. 없는 것 보단 나으니까."

그럼 그 전에는 한 겨울에도 고무장갑 없이 설거지와 빨래를 했다는 건가!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데,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려보니 새삼 내 손가락이 시렸다.

"손 시린 거야 뭐 말로 다 못하지. 손이 뻘겋다 못해 새카맣게 트고 손바닥도 버석버석하게 다 일어나서 스타킹 같은 건 만지지도 못했어. 다 올이 나가버려서. 크림? 그 많은 식구들 옷 다 손빨래 해야지, 설거지 해야지, 밥 해 먹여야지, 온 종일 손에서 물마를 시간이 없는데 크림을 언제 바르겠어. 자기 전에 바셀린이나 좀 바를까..."

그렇게 고생스러운데 좀 비싸더라도 고무장갑을 왜 빨리 사서 쓰지 않은 걸까.

"뭐, 물론 돈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게 나를 위해서 돈을 쓴다는 게 참 어렵더라고. 다들 그랬을 거야. 지금도 그게 습관이 돼서 나한테 제일 인색한 것 같아. 잘 고쳐지질 않아."

사치품도 아니고, 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인데도 '나를 위해 쓰는 돈'이라 생각했다니, 가슴이 턱 막히는 듯 슬프고 안타까웠다.

"김장철, 고무장갑 사용량 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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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무장갑(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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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장갑은 1922년 7월 23일 <동아일보>를 통해 처음으로 언론을 탔다. 용산에 사는 전기직공 리돌이(23)씨가 전기발전소에서 기계를 수리하다 감전돼 숨졌다는,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기사엔 "숙달한 재주만 믿고 손에 고무장갑을 끼지 아니하고 일을 하다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무명지에 전기줄이 닿아서 즉시 전기가 몸에 당기어 즉사"했다고 나와 있다. 감전을 막으려면 일반 고무장갑으론 어림없다. 절연장갑이 필요하다. 아마 기사에서 언급한 고무장갑도 가정용이 아닌 두꺼운 공업용 고무장갑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까지 고무장갑은 주로 전기 작업이나 의료용으로 사용했다. 1956년 10월 27일 <동아일보>에는 "빨래를 할 때와 같이 오랜 시간을 두고 물을 쓸 경우에는 연고를 바르고 통풍이 좋은 무명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무가 두꺼운 장갑을 끼면 (피부가 거칠어지는 것을) 완전히 예방이 될 수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미용 용도로 고무장갑을 소개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고작 3년이 지난 때임을 감안하면 당시 고운 손을 가꾸기 위해 고무장갑을 구매할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물론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이들 역시 소수였다.

1962년 12월 10일 <경향신문>에 "며칠 전 김장하기 전날 손에 양념이 묻으면 쓰릴 거라고 (남편이) 고무장갑을 사갖고 들어온 날은 여간 기쁘지 않았다고 한다"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사용한 실용적인 장갑이 등장했다. 구매자는 은행원 '남편'이란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무렵부터 김장철에 고무장갑을 사용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거리에서 고무장갑을 팔기 시작했다. 김장철이 된 것이다"(<경향신문> 1964년 11월 20일)처럼 '김장철 고무장갑' 기사가 이후 20여 년이 넘는 동안 비슷한 시기에 반복해서 실렸다.

1966년 <매일경제> 기사를 보면 고무장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고무장갑은 본래 병원에서 외과용으로 사용되는 것이었으나 최근 5~6년 전부터 주부들의 김장용으로도 전용, 매년 김장철만 되면 주부들로부터 인기가 높다. 고무장갑은 김장할 때 주부들이 추위에 찬물과 고춧가루 소금을 만지게 되어 손이 트는 것을 보호해주며 또 맨손보다 위생적이기 때문에 매년 그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중략) 요즈음 매일 1천여 개씩 생산하고 있다. 대부분이 영세한 소규모 공장들로써 (중략) 생산된 제품은 주로 행상계통을 통하여 판매되고 있는데 앞으로 본격적인 김장철이 되면 야간작업을 해도 공급이 달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1966년 11월 4일)

고무장갑이 막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의 기사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손 트는 계절입니다! 여성미의 상징인 주부들의 고운 손을 보호하십시오."('대한스폰지 화학공업주식회사'의 광고) (<경향신문> 1968년 11월 11일)

"매끼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다보면 뽀얗던 솜털도 없어지고 벌겋고 퍼런 일꾼손이 된다. 이런 손에다 아무리 매니큐어를 부지런히 바르고 고급 반지를 끼어 봐도 역시 보기 흉한 부엌데기 손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를 감안하여 등장한 것이 고무장갑. 이 고무장갑을 끼고 매일 찬물에서 설거지나 빨래를 거듭해도 우리 손은 여전히 곱게 보존될 수 있다." (<매일경제> 1970년 3월 5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콜드크림이나 올리브기름으로 마사지해주고 잘 닦아낸 다음 크림을 발라 준다. 거친 손은 일할 때 고무장갑을 끼고 하고 잘 때는 면장갑을 끼고 자면 손의 살결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동아일보> 1973년 12월 13일)

기사에 등장하는 고무장갑의 용도는 '미용'이다. 종일 물일을 하느라 거칠어진 손을 '흉한 부엌데기 손'이라 일컬으며 '이를 감안해 고무장갑이 등장했다'는 기사의 논조를 보면, 왜 엄마를 비롯한 여성들이 고무장갑을 사는 데 선뜻 돈을 쓰지 못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엄마와 엄마의 이웃들에겐 시린 손의 고통을 덜기 위해 고무장갑이 필요했을 텐데 기사는 하나같이 '고운 손'을 앞세운다.

여성들에겐 '깨끗함' '검소함'이 미덕으로 강조되는 한편 '여자들은 허영심이 있고 사치스럽다'는 왜곡된 시선도 동시에 존재한다. 고무장갑을 끼면 설거지할 때 그릇도 안 미끄러지고 손도 안 시리고 손등과 바닥이 트지 않아서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고무장갑을 장바구니에 넣자니 '제 손 아끼려고 돈을 쓰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다. 게다가 그 돈은 남편이 땀 흘려 벌어 온 '피 같은 돈' 아닌가. 집었던 고무장갑을 도로 내려놓게 된다.

"고무장갑에서 중금속" 발표 이후 대기업이 시장 진출

1970년대 고무장갑 사용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헌 고무장갑 활용법도 속속 등장했다. 고무장갑을 잘라 "밴드로 활용"하라거나(<매일경제> 1973년 10월 22일) "떨어진 고무장갑은 헌 고무장갑을 잘라 본드로 붙여 쓰고 왼쪽은 뒤집어 오른쪽으로 짝 맞추어 쓴다"(<동아일보> 1974년 2월 14일)는 내용들이다.

1973년 4월 20일 <경향신문>에 "물건을 담아주는 비닐봉지를 고무장갑 대용으로 재활용하라"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 아직도 고무장갑이 흔하게 사용되는 물건은 아니었던 듯하다.

실제로 1974년 12월 16일 <경향신문>엔 "꼭 필요한 물건만 산다는 생활신조 때문에 고무장갑은 번번이 외면당하고 마는" 한 독자의 사연이 실렸다. "옆집 철이 엄마는 한 해 겨울에 고무장갑 일곱 개를 떨어뜨린다고 자랑 비슷하게 말"하지만 독자는 남편 도시락에 넣을 장조림 고기를 사느라 그날도 결국 고무장갑을 못 사고 말았다. 옛날 일이라 치부하기엔 요즘도 고무장갑이 다른 무엇으로 바뀌어서 라디오 사연으로 반복 재생되고 있는 듯한, 미담인 듯 미담 아닌 억압으로 느껴지는 글이다.

비용에 대한 부담과 저항감이 있을지언정, 고무장갑은 정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1970년대 후반, 많은 가정에서 고무장갑이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바로 그 무렵, 기다렸다는 듯 일이 터졌다. 고무장갑에 중금속 등 유해물질이 들어있다는 '주부클럽연합회'의 발표가 나온 것이다.

"대부분의 주부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고무장갑. 중금속이 함유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주부클럽 등에서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1978년 11월 2일 <경향신문>)

주부들은 술렁였다. 언론에선 주부클럽이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며, 사용을 자제하라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이에 고무장갑생산업자들이 신문 광고란에 해명서를 올렸다. "고무장갑 제조에 헌 타이어나 고무찌꺼기를 주 원료로 사용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사용하는 약품은 미국식품위생공사(FDA)에서 승인한 것으로 인체에 해가 없으"니 "앞으로 계속 애용해"달라는 내용이었다(1978년 11월 10일 <경향신문>).

정부에서 이와 관련해 어떤 조사를 했고,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설명하는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중금속 사건은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신문에서 흐지부지 사라졌다. 이로부터 넉 달 후인 3월 17일 <매일경제>에 실린 기사가 예사롭지 않다. 당시 국내 굴지의 신발 회사였던 삼화, 태화, 동양고무산업 등 대기업이 고무장갑 분야에 진출했고, 80여 개 중소업체 중 절반인 40여 개 업체가 이미 도산했다는 내용이다. 중금속 사건 직후 대기업이 중소기업 업종이었던 고무장갑 시장에 진출한 것, 과연 우연일까?

한쪽 고무장갑 만들기, 그렇게 힘들었을까?

이후 고무장갑은 크기와 종류가 다양해지고 품질도 좋아졌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1982년 2월에 "고무장갑 한 짝도 팔았으면"이란 기사가 <경향신문>에 처음 실렸다. 1984년 1월 <동아일보>, 1984년 5월 <경향신문>, 1988년 1월 <동아일보> 등 1990년대 초반까지 같은 내용의 건의가 반복해 신문에 등장했다.

드디어 14년 만인 1996년 6월 19일 <경향신문>에 한화유통에서 만든 한 쪽짜리 장갑이 인기가 높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 한화유통 자체 제작 상품이어서 전국 60여 개 매장, 특히 백화점 매장을 중심으로 판매한다는 내용이다.

1998년 <매일경제>와 <한겨레>에 고무장갑을 한쪽씩 팔아야 한다는 기사가 다시 등장했고 1999년엔 "고무장갑 한쪽판매 환영, (그러나) 왼손잡이도 배려했으면"이라는 기사가 <한겨레>에 실렸다. 앞서 한화유통에서 만든 한쪽 장갑은 왼쪽은 없는 '오른쪽 장갑'뿐이었기 때문이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 모두를 위한 한쪽 고무장갑을 판매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까? 아니면 주부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걸까? 결국 모두를 위한 한쪽 장갑은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대중의 손에 가닿지 못했다. 2001년이 돼서야 마미손에서 '한쪽 고무장갑'을 출시했다.

비싼 것도, 귀한 것도 아닌데 왜 고무장갑에 집착해?

엄마 집에 들를 때면 한 번씩 "이거 가져가"라며 고무장갑을 내놓는다. 시장에서 싸게 파는 걸 볼 때마다 사 둔 것이라 했다. 그 덕분에 내 싱크대 서랍엔 항상 새 고무장갑이 두세 개씩 굴러다닌다. 요즘 세상에 고무장갑이 비싼 것도, 귀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고무장갑에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일까, 의아했다.

그냥 '옛날 사람이어서 그렇겠지' 했는데 글을 쓰는 동안 어렴풋이 깨달았다. 엄마의 역사엔 꽁꽁 언 손으로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던 시린 고통과 고무장갑 하나 내 맘대로 돈 주고 살 수 없었던 무력감이 아주 크고 깊게 새겨져 있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거였다. 딸에겐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의 기억에 새겨진 그 무언가 만큼은 물려받아야겠다. 잊혀져선 안 되는,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이다.